▲ 한 집안의 가장이 불륜에 빠져 아내와 아들을 뺑소니사고로 위장해 살해했다. 사건 현장의 핏자국이 당시의 참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 ||
잠시 뒤 어디선가 나타난 5톤 트럭 한 대가 이들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트럭을 피해 도로 한켠으로 비켜섰지만 오히려 트럭은 갑자기 굉음을 내며 이들에게 달려들었다. 미처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두 사람은 트럭에 받혀 쓰러졌고 그 위를 트럭 뒷바퀴가 밟고 지나갔다. 그 직후 트럭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어둠 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다음날 아침 7시40분 인근 D물산 경비실엔 ‘난리’가 났다. 한 경비원이 이 두 사람의 처참한 시신을 발견했기 때문. 경비원이 경찰에 신고를 하면서 이 사건은 ‘뺑소니 사고’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그러나 이들의 죽음에는 또 다른 흑막이 숨어 있었다.
피해자들은 주부 김아무개씨(43)와 아들 이아무개군(8)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사고 소식을 전하기 위해 피해자 김씨의 남편 이아무개씨(48)를 찾아 나섰다. 이씨는 형사들이 들려준 아내와 아들의 사망 소식에 순간 놀라움과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형사들은 이씨를 Y병원 영안실로 데려가 피해자들의 신원을 최종 확인했다. 경찰서에서 이씨가 밝힌 바에 따르면 아내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사고 전날인 27일 아침 9시였다고 한다. 당시 아내 김씨가 아들을 데리고 나가며 ‘기도원에 갔다오겠다’는 메모를 남겨놓았다는 것.
그러나 형사들이 보기에 이 사건은 뭔가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우선 피해자인 김씨와 아들이 인적이 드문 공장지대에서 사고를 당한 것이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 부분이었다.
두 모자의 시신에 바퀴자국이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일단 교통사고로 처리됐다. 하지만 형사들은 누군가가 이들 모자를 어디선가 살해한 후 뺑소니로 위장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부검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가족인 남편에게는 별다른 혐의점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귀가시켰다.
하지만 형사들의 레이더에 이내 남편 이씨의 수상쩍은 점이 포착됐다. 이씨가 이번 사고로 2억5천만원가량의 보험금을 타게 돼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 형사들은 남편 이씨에게 혐의점을 두고 다시 수사했다.
마침 이씨의 집 앞에 있는 한 기업체 건물에 설치된 CCTV에는 이씨 집 입구의 모습이 잡혀 있었다. 그런데 CCTV 화면에는 경찰에서 이씨가 밝힌 얘기와는 다른 부분이 많았다. 특히 “아내를 전날 아침에 봤다”는 이씨의 진술과는 달리 사고 전날 밤 10시30분에 이들 가족이 함께 외출했다 새벽 3시에 이씨 홀로 귀가한 모습이 화면에 담겨 있었다.
형사들은 이런 점들을 내색하지 않고 다음날 부검에 동행하기로 한 이씨를 기다렸으나 이씨는 약속장소에 나타나지도 않고 휴대폰 전원도 꺼버린 채 연락이 두절됐다. 경찰은 잠적한 이씨를 살해 용의자로 지목하고 수배를 내렸다.
▲ 1. 이씨(원안)가 아내와 함께 지난달 27일 밤 집을 나서고 있다. 2. 이씨 가족이 트럭에 올라 어딘가로 가는 모습. 3. 다음날 새벽 이씨 혼자 트럭을 타고 들어오고 있다. CCTV 화면 | ||
사건 이틀 후인 30일 이씨는 익산의 N모텔에서 경찰에 붙잡혔다. 검거 직전 이씨는 농약을 마시고 중태에 빠졌으나 현재는 상태가 호전돼 구속 수사를 받고 있다.
경찰이 이씨를 조사해 밝혀낸 사건 당시 정황은 이렇다. 이씨는 지난 27일 토요일 10시30분 “서울로 재활용품을 가지러 가자”며 아내, 아들과 함께 자신의 1톤 트럭을 타고 외출했다. 이씨는 고물상에서 차량운반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국으로 폐품을 가지러 다니곤 했다.
그러나 이씨는 이들을 사고 현장인 팔복동 공장지대로 데리고 간 뒤 아내에게 ‘아들이 소변을 보게 하라’며 함께 내리게 했다. 그 직후 이씨는 급히 골목을 돌아 미리 준비해 놓은 5톤 폐품수집용 트럭에 갈아타고 다시 아내와 아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집게손이 달려 있는 이 트럭은 지난 한 달 동안 이씨가 일했던 전북 완주의 한 고철상 차량이었다. 이씨는 일하는 동안 이 트럭의 열쇠를 복사해 놓은 뒤 주말을 이용해 고철상 주인 몰래 차량을 빼내온 것.
아내와 아들은 골목 한쪽 모퉁이로 피했지만 이씨가 몰던 트럭은 이들 모자를 사정없이 덮쳤다. 그후 이씨는 다시 자신의 1톤 트럭으로 바꿔 타고 집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이씨는 왜 자신의 아내와 자식을 죽였을까. 거액의 보험금 때문이었을까. 이씨가 2천만원을 빚지고 있기는 했지만 알려진 것처럼 단순히 돈 문제 때문에 일을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 이씨는 자신의 내연녀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가정을 버려야 했고 또 돈이 필요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씨가 내연녀 김아무개씨(43)를 만난 것은 올해 2월. 당시 김씨는 남편과 함께 경기도 안산에서 포장마차를 하고 있었고 단골손님이던 이씨는 어느새 김씨와 불륜에 빠지게 됐다. 김씨의 남편은 오랜 기간 투병하느라 정상적인 성생활이 불가능했다고 한다. 결국 가출한 김씨는 올해 5월 전주로 내려와 이씨와 동거를 하면서 막걸리집을 차렸다.
그러던 어느 날 김씨의 남편이 김씨를 찾아내 다시 집으로 끌고가는 일이 벌어졌다. 남편에게 맞아 보름간 입원한 김씨의 모습을 보면서 이씨는 김씨를 다시 데려와 함께 살 궁리를 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이용해 보험금을 탈 계획을 세운 것이었다.
처음 경찰 조사에서 이씨는 ‘사랑’에 눈이 멀어 아내와 자식을 죽였지만 ‘차로 뭉개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고 거듭 후회를 했다. 실제로 음독 직전 쓴 유서에서 이씨는 “아들과 애 엄마에게 너무 미안하다. 나는 아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나를 아빠라고 부르지 마라. 저승에서는 서로 만나지 말자. 자식을 죽여놓고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현재 이씨는 자신의 살인 혐의를 강하게 부인하고 있다. 브레이크가 듣지 않아 과실로 아내와 아들을 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
사건을 담당한 전주북부경찰서 장승우 형사는 “사고 후 곧바로 신고를 하지 않고 내버려둔 점, 타인의 뺑소니로 위장하기 위해 차량을 바꿔탄 점, 사고 전 아내와 아들 명의의 보험을 든 점으로 보아 계획적인 살인이 확실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