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일 발생한 보라매공원 사건 현장. 이곳을 지나던 여대생이 10여 차례 흉기에 찔려 무참히 살해됐다. | ||
주민들 사이에서 ‘사건이 특정 버스노선을 따라 발생한다’, ‘범인은 지하철 2호선을 따라 움직인다’, ‘하얀 옷을 입은 여자만 노린다’ 등의 괴담이 회자되었고 특히 사건이 발생한 날 모두 비가 왔었고 한 사건을 제외하곤 목요일 밤에 발생해 ‘비 오는 목요일 밤의 괴담’으로 불리기까지 했다.
현재 서남부 연쇄살인사건 수사본부는 사건이 발생한 지역별로 팀을 나누어 긴밀한 협조체제 아래서 수사를 벌이고 있다. 그러나 이 중 대림동 사건은 유력한 용의자 박씨가 주민등록증을 위조해주겠다며 김씨로부터 1천만원을 받아 가로챘다가 벌어진 사건. 그런 까닭에 경찰은 이 사건을 제외한 나머지 세 사건을 서남부 연쇄살인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사건 발생 당시 언론은 ‘동일범에 의한 연쇄살인 가능성’을 제기했고 경찰은 “연쇄살인범으로 볼 만한 뚜렷한 증거나 정황은 없다”며 언론보도에 불만을 나타냈다. 하지만 수사가 장기화되면서 수사본부 일각에서도 동일범 가능성이 조심스레 제기되고 있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이들 사건에 대해 범죄프로파일링 기법(사건현장의 단서로 범인의 윤곽을 그려내는 것)을 적용해 분석한 결과 동일범일 가능성이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인에게는 아직 생소한 이 수사기법은 최근 동기가 불분명한 살인사건이 잦아지면서 사건 해결의 단초를 제공하리라 기대를 모으는 과학적인 현장 분석기법. 국내에서도 통상적인 ‘살인사건의 공식’을 벗어난 의문의 살인사건에 대해 프로파일링 수사기법이 이용되고 있다.
국내 유일의 프로파일러인 서울경찰청 김원배 경위(그의 공식 직함은 살인사건전문 수사관이다)는 “프로파일링이 만능은 아니다. 다만 사건 해결의 방향과 실마리를 제공할 뿐이며 어디까지나 참고용이다”라며 조심스럽게 견해를 밝혔다.
그에 따르면 서남부 연쇄살인사건은 모두 ‘낯선 사람에 의한 이유 없는 살인’이다. 또한 범행 정황으로 보아 범인은 피해자들을 따라가지 않고 숨어서 피해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갑자기 나타나 흉기를 휘둘렀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김 경위는 “그렇다고 해서 서남부 지역 사건들이 동일범의 소행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단지 각 사건마다 공통되는 부분이 있을 뿐이다”라며 지나친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그러나 경찰 내부에서는 이런 프로파일링 결과와 사건 정황을 근거로 서남부 사건을 ‘동일범에 의한 연쇄살인사건’으로 보는 견해도 적지 않다.
우선 프로파일링 적용 결과와 같이 실제로 경찰은 세 사건을 모두 ‘낯선 사람에 의한 동기 없는 살인’으로 규정하고 있다. 신림시장 사건의 생존자인 박양은 “(범인은)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했고 보라매공원 사건의 김씨도 숨지기 직전 “모르는 사람이다”고 밝혔다.
고척동 사건의 경우 피해자의 집 앞에서 사건이 발생해 애초엔 ‘원한관계에 의한 면식범의 소행’으로 보았으나 수사결과 숨진 김씨는 물론이고 김씨의 가족들도 별다른 원한이나 채무관계는 없었다.
또 김씨가 찔린 상흔도 ‘원한에 의한 칼부림’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범인은 가슴, 배, 허벅지 등 피해자를 무작위로 찔렀다. 특히 김씨가 왼쪽 가슴을 정확히 세 차례 찔려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음에도 범인은 배, 허벅지 등에 흉기를 휘둘러 보통의 원한에 의한 살인사건과 다른 양상을 나타냈다. 이런 점을 들어 경찰은 신림시장 사건, 보라매공원 사건과 마찬가지로 고척동 사건도 ‘낯선 사람에 의한 동기 없는 살인사건’으로 추정하고 있다.
세 사건의 묘한 공통점은 또 있다. 범인은 범행 후 몇 분간의 시간적 여유가 있음에도 피해자의 금품에 손도 대지 않았고 성폭행의 의도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피해자와 대면한 짧은 시간에 무작위로 흉기를 휘두르고 달아난 것이 전부였다.
피해자들이 모두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막 들어선 지점에서 변을 당했다는 것도 또 다른 공통점이다. 즉 범인은 피해자들을 뒤따라가지 않고 어둠 속에 숨어 있다가 피해자들이 어둠 속으로 들어오는 순간 범행을 저질렀다.
보라매공원 사건의 피해자 김씨는 골목길에 들어서 가로등을 지난 지점에서 살해당했고 신림시장 사건의 박양 역시 시장골목의 조명이 사라지는 지점에서 피습을 당했다. 마찬가지로 고척동 사건 역시 경찰은 범인이 피살된 김씨의 집 위층 어두운 계단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김씨를 살해한 것으로 보고 있다.
게다가 각 사건의 목격자와 피해자가 모두 ‘40대 남성’을 범인으로 지목했다는 점도 또 하나의 유사점이다. 신림시장 사건의 박양은 “검정색 계열의 옷을 입은 40대 남자가 갑자기 나타나 흉기를 휘둘렀다”고 진술했고 보라매공원 사건의 김씨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의사에게 “(범인은) 베이지색 잠바와 미색 바지를 입은 40대 남자”라는 말을 남겼다. 고척동 사건에서는 김씨의 아랫집 주민이 사건 발생시각에 “한 40대 남성이 ‘까불면 죽니 어쩌니’ 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말했다.
낯선 사람에 의한 동기 없는 살인, 그리고 어둠이 시작되는 곳에서의 습격…. 묘하게도 일치하는 세 사건의 공통점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프로파일러’ 김 경위는 “세 사건의 범인(들)이 무조건 찌르기만 하고 달아나 정상인은 아닌 것 같다”고 범인의 상태를 분석하기도 했다. 경찰 일각에서는 ‘반경 4km 내에서 서로 다른 40대의 정신이상 남자가 아무 이유 없이 모르는 사람을 비슷한 수법으로 살해할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로 이들 사건을 동일범의 소행으로 추정하고 있다.
마지막 사건인 보라매공원 사건이 발생한 후 8개월이 지나도록 아직 꼬리를 잡히지 않고 있는 범인.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경찰의 집중 수사 때문에 잠시 살인의 광기를 억누르고 있는 걸까. ‘서울판 살인의 추억’의 악몽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1. 2004. 2. 26(목)
새벽 5시께 여고생 박아무개양(18)이 일하러 나가는 할머니를 배웅하러 나갔다가 관악구 신림시장 골목에서 갑자기 나타난 괴한에 의해 흉기로 10여 차례 찔려 중상. 유일한 생존자(일명 신림시장 사건).
#2. 2004. 4. 22(목)
새벽 3시께 귀가하던 여대생 김아무개씨(20)가 구로구 고척동 M빌라 자신의 집 현관 앞에서 열쇠를 꽂아둔 채 괴한의 흉기에 의해 가슴과 허벅지 등 6군데 찔려 사망(고척동 사건).
#3. 2004. 5. 9(일)
새벽 2시쯤 여대생 김아무개씨(22)가 남자친구와 헤어진 후 집으로 가기 위해 신대방역에서 보라매공원 남문 방향으로 가던 중 갑자기 나타난 괴한에 의해 흉기로 10여 차례 찔려 치료받던 중 과다출혈로 사망(보라매공원 사건).
#4. 2004. 5. 13(목)
새벽 2시30분께 영등포구 대림동 조선족 출신 김아무개씨(39)가 자신이 운영하는 중국집 화장실에서 가슴 등을 네 차례 찔려 치료 도중 사망. 유력한 용의자인 탈북자 박아무개씨(35)는 사건 후 중국으로 도주(대림동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