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은 지난 9일 ‘민 마담’으로 불리는 주범 박아무개씨(여·38)가 변호사 A씨(42)를 “이혼 문제로 상담하고 싶다”고 모텔로 불러내면서 시작됐다. 통상 의뢰인이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가 사건을 의뢰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 하지만 박씨는 A변호사에게 “시댁식구들에게 신변의 위협을 받고 있으니 변호사가 직접 와 달라. 사건을 수임하면 즉시 7백만원을 입금하겠다”고 말했다.
사실 A변호사는 자신이 모텔로 직접 찾아가는 것이 영 꺼림칙했다. 하지만 경기침체로 사건 수임이 많이 줄어든 데다 박씨가 보통 이혼소송의 배가 넘는 수임료를 약속해 다음 날 아침 수원시 팔달구 한 모텔로 그녀를 찾아갔다.
하지만 ‘의뢰인’인 박씨는 관련 서류가 거의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A변호사가 “서류가 미비하다”고 하자 박씨는 “제부가 서류를 가지고 있다”며 제부에게 전화를 거는 척하며 같은 모텔에 미리 대기중이던 공범 김아무개씨(42)와 조아무개씨(31)에게 연락했다.
잠시 후 A변호사와 박씨가 함께 있던 모텔방에 김씨와 조씨가 들이닥쳤다. 이들은 A변호사의 손과 발을 전깃줄로 묶은 뒤 흉기로 위협하며 현금 3억원을 요구했다. 위기감을 느낀 A변호사는 가족과 친구, 자신의 사무실에 연락해 현금을 끌어모아 박씨 명의의 N은행과 E은행 계좌에 모두 9천3백만원을 나누어 입금했다. 입금 사실을 확인한 이들 ‘3인조’는 A변호사를 모텔방에 그대로 놔둔 채 하나둘씩 모습을 감췄다.
그러나 사건은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박씨는 그후 공범 김씨와 조씨를 교묘히 따돌리고 혼자서 현금을 몽땅 챙겼다. 결국 사건 다음날인 지난 11일 ‘빈털터리’로 경찰에 자수한 공범 김씨와 조씨는 “박씨만 믿고 하라는 대로 했는데 결국 우리까지 속았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김씨와 조씨에 따르면 박씨가 벌인 제2의 사기극은 ‘몸값’이 입금된 직후부터 시작됐다.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던 사건 당일 오전 11시쯤 갑자기 박씨가 “몸이 안 좋아 약 좀 사와야겠다”며 모텔 방안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때 박씨는 김씨와 조씨를 안심시키기 위해 자신의 통장과 도장을 이들에게 맡겼다.
김씨와 조씨는 ‘곧 돌아오겠지’ 하고 박씨를 기다렸지만 그녀가 나간 지 한 시간이 지나도 아무 연락이 없었다. 불안해진 이들이 박씨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물었지만 “곧 들어간다. 기다리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그리고 이것이 박씨와의 마지막 통화가 되고 말았다. 오후 1시께 박씨에게 속은 것을 직감한 두 사람은 A변호사를 모텔방에 그대로 둔 채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경찰 수사결과 박씨는 모텔을 나간 직후 E은행으로 가서 통장분실신고를 하고 즉시 현금 5천여만원을 인출했다. 또한 N은행에서는 다시 통장분실신고를 하면 의심을 살까 우려했는지 현금카드로 자신의 어머니 김아무개씨(70) 통장으로 4천여만원을 계좌 이체시킨 후 어머니 김씨를 통해 현금을 인출했다. 대범하면서도 치밀하게 계획된 사기극이었던 셈이다.
경찰에 따르면 공범 김씨와 조씨는 지난 8월과 10월 “성인오락실에 투자하면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박씨의 꼬임에 넘어가 각각 7백만원과 3천만원을 빌려줬다가 돈을 돌려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던 중 박씨가 “빌린 돈을 받으려면 내가 하라는 대로 해라”고 제의를 해와 범행에 가담하게 됐던 것. 박씨의 말만 믿고 난생 처음 납치극에 나섰던 두 사람은 결국 본전도 못 찾고 쇠고랑을 차게 됐다.
경찰은 박씨에 대해 “대낮에 변호사를 감금한 것이나 공범을 따돌리는 수법으로 보아 아주 대범하고 치밀한 여인이다. 모텔에서 나온 박씨의 지문과 은행 CCTV에 찍힌 박씨의 모습을 확보하고 검거에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찰에 따르면 사기 전과가 있는 박씨는 수원 일대에서 ‘민 마담’으로 통했다. 하지만 박씨의 행적에 대해선 경찰도 아직 구체적으로 파악하지는 못한 상태다. 박씨는 A변호사에게 전화를 걸 때도 “예전에 저희 가게에 몇 번 오셨죠”라며 술집마담으로 행세하며 친근감을 표시했고, 공범 김씨와 조씨도 박씨를 민 마담으로만 알고 있을 뿐 그녀의 ‘내력’에 대해선 전혀 모르고 있었다.
실제로 공범 김씨와 조씨는 경찰 진술에서 “우리는 그저 박씨가 술집을 운영하는 마담인 줄로만 알았다”고 말했다. A변호사 역시 “이혼문제를 상담하고 싶다고 해서 아무 의심 없이 박씨를 만났고 전에도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은 낯익은 얼굴이었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A변호사와 공범들의 진술을 토대로 수원 일대의 룸살롱을 모두 뒤져봤지만 ‘민 마담’의 실체는 확인되지 않았다.
박씨는 범행 하루 전 A변호사 외에도 수원지역 3~4명의 변호사들에게도 ‘출장 상담’ 전화를 걸어 범행대상을 물색한 것으로 드러났다. 박씨가 사전에 변호사들을 상대로 한 범행을 치밀하게 계획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경찰의 한 관계자는 “우리도 박씨의 실체가 궁금하다. 진짜 술집 마담을 지낸 것인지, 아니면 변호사들을 유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인지 박씨를 검거해봐야 알 것 같다”고 전했다.
한편 수원지방변호사회의 한 관계자는 이번 사건에 대해 “최근 변호사들의 사건 수임이 줄어들자 A변호사가 적극적으로 사건 수임을 하는 과정에서 이 같은 범죄를 당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수원지역 변호사들 중 사무실 운영이 어려워질 정도로 사건을 수임하지 못하는 변호사들이 늘어나 최근엔 변호사가 직접 의뢰인을 만나러 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한 달에 4건의 사건도 수임하지 못하는 변호사들도 있어 사무장 대신 변호사가 발품을 팔아가며 영업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는 것. 경찰의 한 관계자도 “요즘 같은 불경기에 A변호사도 ‘7백만원을 즉시 입금해준다’는 박씨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변호사들도 불황의 짙은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운데 벌어진 황당하기만 한 납치·사기 사건. 이 ‘발칙한’ 사기녀가 붙잡히게 되면 과연 어떤 변호사가 변론을 맡게 될 것인지가 지역 변호사들 사이에선 또 다른 이야깃거리로 오르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