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 독극물 요구르트 사건은 불특정 다수의 사람을 특별한 이유 없이 공격한 만큼 범인의 실체가 오리무중이다. 사진은 대구 달성공원 현장. | ||
이 사건은 지난해 9월19일 노숙자 전아무개씨(63)가 달성공원 물개사육장 뒤편 산책로 벤치에 놓인 요구르트를 마시고 사망하면서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전씨의 죽음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간 달성공원에서 독극물이 든 요구르트를 먹은 사람이 12명이나 더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용의자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사건 해결을 어렵게 하는 것은 이번 사건이 원한이나 금전을 노린 범죄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번처럼 불특정인을 대상으로 독극물 음료수를 먹인 사건은 처음이라는 것이 경찰의 설명이다.
독극물 요구르트의 등장 이후 시민들의 불안감이 큰 만큼 경찰은 사건 해결에 적잖은 부담감을 느끼고 있다. 이 사건을 담당한 대구중부경찰서의 수사본부는 매일같이 아침 회의를 열며 탐문수사를 계속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단서를 찾아내진 못하고 있다. 현재 대구 시내 곳곳에 뿌려진 전단만이 시민의 제보를 절실히 기다리고 있는 경찰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다.
사건의 무대가 된 달성공원은 대구시 중구 달성동에 위치한 3만8천 평 규모의 근린공원으로 사적 제62호로 지정된 곳이다. 역사적 유물과 동물원, 넓은 잔디공원이 어우러져 지난 1969년에 개원한 뒤 오랫동안 대구시민의 사랑을 받아온 명소로 지금도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2000년 4월부터는 무료로 개방돼 평일 낮에는 노인들과 노숙자들이 많이 드나들고 있다. 때문에 이번 사건의 피해자도 60세가 넘은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이번 사건은 8월11일부터 모두 6일간 여덟 차례에 걸쳐 벌어졌고, 피해자는 14명에 이른다(표 참조). 그러나 9월19일 전씨가 사망할 때까지 독극물에 의한 증세라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아 이전 피해자들에 대해선 ‘단순 식중독’이란 오진이 내려졌다. 더운 여름인 데다 특별한 원인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씨 사망 후 경찰이 주변 탐문을 한 결과 이전에 벌어졌던 똑같은 유형의 피해사실이 드러나면서 독극물 요구르트가 연쇄적 사건임이 알려졌다. 경찰이 급히 119 구급대의 기록을 조회한 결과 사건발생 1주일 후에야 13명의 피해사실이 밝혀졌던 것.
피해자들이 벤치에 방치된 요구르트에 대해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뭘까. 당시 문제의 요구르트는 5개들이로 포장돼 있었는데 마치 누군가 새로 사서 먹다 남긴 것처럼 포장이 반만 뜯긴 상태였다. 독극물을 주입한 주사바늘 흔적 또한 뚜껑으로 사용된 은박 아랫부분에 교묘히 가려져 있었다.
분석 결과 요구르트에서 발견된 독극물은 원예용 살충제인 메소밀(Methomyl)로 밝혀졌다. 메소밀은 진딧물이나 나방의 애벌레 방지용으로 주로 배추, 상추, 사과 등에 광범위하게 쓰이는 맹독성 농약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피해자들이 마신 요구르트에는 메소밀이 소량 투입되었기 때문에 사망자는 1명에 그쳤다. 피해자 중 78세의 할머니도 응급처치 후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범행에서 사망자가 나온 점으로 보아 범인이 자신의 수법이 ‘통하지’ 않자 농약의 양을 점차 늘려 주입했을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대체 누가 왜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일까. 사건 현장에 남은 단서만으론 범인의 실체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범행에 사용된 메소밀이 비교적 구하기 쉬운 농약인 데다 독극물 투입에 사용된 주사기 바늘만으로 범인을 특화하는 것도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요구르트에 메소밀을 투입한 주사기바늘은 직경 1mm가 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정도 크기의 주사바늘은 일반적으로 병원에서는 약물 투입 효과를 빨리 봐야 하는 응급환자에게나 사용되며, 이외에는 가축병원 등에서 쓰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범죄심리 전문가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독극물 범행을 저지른 범인의 정서 상태는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전문가들은 범인이 그 즈음 이혼이나 실직 등 불행한 사건을 당했거나 경제적으로 어렵고 채무에 시달리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데 대해 자신의 능력이나 노력 부족보다는 세상을 탓하기 때문에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범행에 나섰을 개연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자살을 생각하기도 하지만 ‘나 혼자 당할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이 억울함을 풀어야겠다’는 심경에 빠지게 된다는 것.
범인이 독극물을 탄 음료수를 이용하는 것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타인에게 공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후 멀리서 ‘현장’을 지켜보거나 언론을 통해 추이를 관찰하면서 자신의 범행이 성공하면 ‘쾌감’을 느끼는 것이 일반적인 범죄자의 심리. 과연 이번 사건의 범인도 현장 주변에서 어슬렁거렸을까.
사건일지 | |||
날짜 | 시간 | 장소 | 피해자 |
① 8.11 | 오후 2시30분 | 달성서씨 비문 앞 | 이아무개씨(여·70) |
② 8.11 | 오후 2 | 곰사육장 뒤 | 정아무개씨(54) |
③ 8.12 | 오후 7시30분 | 원숭이사육장 앞 | 이아무개군(10)과 여동생(3) |
④ 8.21 | 정오 | 원앙사육장 옆 | 김아무개씨(64), 이아무개씨(66) (김씨만 병원 후송) |
⑤ 9.5 | 오후 6시50분 | 시계탑 뒤 | 김아무개씨(63) |
⑥ 9.9 | 오후 3시30분 | 곰사육장 뒤 | 이아무개씨(78) 등 70대 여성 3명 |
9.9 | 오후 6시35분 | 두류도서관 화장실 앞 | 이아무개씨(68) 등 60대 환경미화원 3명(두류공원) |
⑦ 9.19 | 오후 5시45분 | 물개사육장 뒤 | 전아무개씨 (63·노숙자·사망) |
농약이 여러 차례 범행에 사용된 점으로 보아 범인이 평소 농약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사람일 가능성도 점쳐진다. 때문에 경찰은 농약상과 인근 원예농가를 대상으로 탐문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또 최근 농사를 짓다 실패했거나 대구로 이주해 온 사람들도 수사 대상에 올리고 행적을 되짚고 있다.
피해자의 진술 가운데서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 발견된다. 9월9일 발생한 사건의 피해자 중 한 사람인 김아무개씨(여·76)의 관련 진술 내용.
“…50대 남녀가 앉아 있다가 떠난 벤치에 놓여 있던 요구르트를 무심코 먹었다. 그런데 그곳에 앉아 있었던 여자가 다시 (우리가 있는 데로) 오기에 ‘요구르트 때문에 왔나보다’고 여기고 “요구르트 우리가 다 마셔버렸다”고 얘기를 했다. 그러자 그냥 가버렸다.”
김씨가 목격한 50대 남녀는 ‘얼굴이 넓적하고 키 160cm가량에 파란색 반팔 티셔츠와 검정색 치마를 입은 여성과 이 여성보다 얼굴이 길고 호리호리한 체격의 남성’이다. 경찰은 이들이 범행에 연루됐을 가능성을 보고 신원 파악에 나섰으나 아직은 별다른 성과가 없는 상태다.
독극물 사건에 대한 언론 보도로 세상이 떠들썩해졌기 때문일까. 범인은 지난 9월 하순 이후 범죄행각을 멈췄다. 그 후 흡사한 피해 사례가 접수되고 범인에 대한 갖가지 제보도 들어왔지만 아직 사건 해결의 실마리로 삼을 만한 결정적 단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만약 범인이 사회에 대한 복수를 꿈꾸는 ‘망상가’라면 다시 농약 주사기를 손에 쥘 개연성도 있다. 아니,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또 다른 유형의 범행에 나설 가능성도 점쳐진다. 범인 추적에 ‘올인’하고 있는 수사팀이 내심 우려하는 ‘최악의 시나리오’이기도 하다. 수사팀 관계자는 “시민들의 제보만이 제2의 연쇄 범행을 막을 수 있다”고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