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장본인은 지난달 22일 사기 등의 혐의로 서초경찰서에 체포된 오아무개씨(여·23). 연예기획사를 드나들며 사채를 끌어쓰다 많은 빚을 지게 된 오씨는 급기야 친할아버지의 인감도장까지 위조해 거액을 대출받았다가 철창 신세를 지게 됐다.
특히 오씨는 친할아버지의 인감증명서를 발급 받기 위해 자신의 할아버지와 닮은 윤아무개씨(63·구속)를 고용해 동사무소에서 친할아버지 행세를 하게 하는 등 치밀한 사기극을 벌인 것으로 알려져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오씨는 자신 또한 ‘피해자’라며 눈물로 항변하고 있다. 대체 어떤 곡절이 있었던 걸까.
모 여대 연극영화과에 다니던 오씨가 깊은 수렁에 빠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2년, 서울 강남에 있는 한 연예기획사를 찾아가면서부터였다.
오씨는 “연예인으로 성공시켜주겠다”는 이 연예기획사 박아무개 사장(신원미상)의 달콤한 말에 넘어가 사무실을 드나들며 스타의 꿈을 키워갔다. 처음엔 드라마와 영화의 단역에 출연하는 등 연예계 입문이 순조로운 듯했다.
그러나 얼마 후 박 사장은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연예인이 되려면 관계자들에게 돈을 많이 써야 한다. 지금 회사 형편이 안 좋으니 네가 회사에 2억원만 투자해라. 투자하면 수익금의 절반을 주겠다”며 오씨를 꼬드겼다.
학생 신분으로 돈이 있을 리 만무했던 오씨는 당연히 박 사장의 제안을 거절했다. 하지만 “돈은 나중에 갚고 우선 각서에 서명만 하면 된다”는 박 사장의 말에 넘어가 사채업자에게 2억원짜리 채무각서를 작성해주고 만다. 오씨는 경찰 조사에서 “나는 각서에 서명만 했고 2억원은 사채업자가 박 사장에게 바로 지급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박 사장은 돈을 받자마자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오씨는 연예기획사에 여러 번 찾아가보았지만 매번 사무실은 굳게 잠겨 있었다. 오씨는 자신이 속았다고 생각하며 전전긍긍했지만 웬일인지 사채업자는 빚독촉은커녕 오씨에게 연락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지난해 6월 모든 걸 잊고 지내던 오씨 앞에 예의 사채업자가 갑자기 나타났다. 그는 채무각서를 들이대며 “빨리 돈을 갚으라”고 종용하기 시작했다. 당황한 오씨는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이에 사채업자는 오씨에게 “인감을 위조해 할아버지의 소유 건물을 담보로 대출받으면 된다. 인터넷에 대출을 알선해주는 브로커들도 많으니 알아보라”고 방법을 가르쳐줬다.
오씨는 사채업자가 가르쳐준 대로 인터넷에서 만난 대출브로커의 소개로 종로 탑골공원에서 소일하던 윤씨를 소개받고 윤씨에게 친할아버지로 행세해 줄 것을 부탁했다. 오씨가 윤씨에게 주기로 한 ‘역할 대행료’는 2천만원.
지난달 3일 오씨는 집에서 친할아버지의 주민등록증을 훔친 뒤 윤씨를 동사무소로 데리고가 친할아버지의 인감증명서를 부정 발급받았다. 또 지난달 5일 오씨는 친할아버지가 집을 비운 사이 공증을 받기 위해 찾아온 법무사 직원도 감쪽같은 연기로 속였다. 그에게 ‘누워 있는 윤씨’를 보여준 뒤 “할아버지가 말하기조차 힘든 상태”라며 건물을 담보로 2억원을 빌린다는 대출서류를 대신 작성했던 것. 물론 이렇게 받아낸 대출금은 고스란히 사채업자의 손에 쥐어졌다.
그러나 오씨의 이 같은 사기행각은 할아버지 소유 건물에 세들어 살던 한 입주자가 건물에 근저당이 설정된 것을 확인하고 오씨의 친할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서 들통 나고 말았다.
일단 경찰은 오씨가 연예기획사 사장과 사채업자의 농간에 속아넘어갔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지만 이들의 신원이 밝혀지지 않아 행방을 찾기는 어려워 보인다. 한 수사관계자는 “오씨가 말한 연예기획사에 찾아가봤지만 다른 사람이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더라. 또 건물 주인도 ‘그런 연예기획사에 건물을 임대해 준 적이 없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사채업자와 대출브로커도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다. 또 다른 수사관계자는 “연예기획사가 교육비 명목으로 연예인 지망생들에게 거액을 뜯어가는 경우는 있었지만 이런 사례는 처음이다. 혹시 연예기획사와 사채업자가 짜고 이런 짓을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설명했다.
한편 오씨의 친할아버지는 ‘발칙한’ 손녀의 사기행각을 전해듣고는 몸져누웠다고 한다. 수사관계자는 “오씨의 할아버지가 오씨를 괘씸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그래도 부모 없이 자란 오씨가 하나밖에 없는 혈육이라 안타까움이 더 큰 것 같더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