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들은 이 사건을 보고 또 다시 ‘살인의 추억’을 떠올렸지만 경찰의 시각은 달랐다. 사체가 타살당한 것으로 보이지만 범행 수법 등으로 미루어 화성 연쇄살인 사건과는 무관하다는 판단이었다. 키와 치아 치료 흔적 등으로 보아 사체는 지난 1월 말 실종된 강아무개씨(62)인 것으로 추정됐다. 사실 경찰이 이 야산을 뒤진 것도 강씨의 시신을 찾기 위해서였다.
당시 경찰이 염두에 둔 용의자는 다름 아닌 강씨의 의붓아들 김아무개씨(38). 수사 결과 김씨는 재산 문제로 다퉈온 새어머니 강씨를 자신의 동거녀의 남동생 조아무개씨와 함께 살해한 뒤 암매장한 것으로 밝혀졌다. 화성경찰서는 지난 15일 김씨와 조씨(38)를 존속살해 및 사체유기 혐의로 구속했다.
경찰에 따르면 김씨는 사채 3천만원을 빌렸다가 빚 독촉에 시달리자 범행을 계획한 것으로 드러났다. 새어머니 강씨에게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땅을 팔든지 대출을 받아 돈을 달라”고 수차례 요구했으나 이를 거절하자 패륜 살인을 저지른 것.
김씨는 경찰 조사에서 “어릴 적부터 우리 남매는 부모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자랐다”며 그간 새어머니 강씨에게 불만이 많았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강씨의 유족들은 “강씨가 친자식처럼 키워줬는데 은혜도 모르다니…”라며 분을 감추지 못했다.
경찰에 따르면 김씨가 다섯 살 되던 지난 74년 김씨의 아버지와 결혼한 강씨는 친아들도 낳았지만 의붓아들인 김씨를 차별하지 않고 열심히 키웠다고 한다. 10대 시절 김씨가 폭력, 가출 등으로 부모 속을 많이 썩혔으나 강씨는 김씨를 위해 30여 년 동안 어머니 역할을 다해왔다는 게 주변의 얘기다. 실제로 김씨는 어린 시절 강씨를 자신의 친어머니로 알고 자랐을 정도.
하지만 내성적인 성격이던 김씨는 강씨와 친혈육지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부터 더 삐뚤어지기 시작했다. 자주 말썽을 부리던 김씨는 결국 아버지의 눈 밖에 나게 됐고, 그가 생업으로 삼으려던 포클레인 기사 자격시험에도 연거푸 떨어져 집에서도 ‘미운 오리’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던 2001년 8월 김씨의 아버지가 패혈증으로 사망하게 되면서 김씨는 새어머니 강씨와 결정적으로 멀어지게 된다. 김씨는 아버지 사망 이후 본가 출입도 뜸해졌고 강씨와는 더욱 소원해졌다. 게다가 강씨 몰래 아버지 명의의 시가 10억원 상당의 논밭 4천6백여 평을 법무사를 통해 임의로 지분 상속을 해 버렸다. 김씨의 지분 상속으로 논밭은 김씨와 누나, 강씨 그리고 김씨의 배다른 남동생 4명의 공동소유가 됐다.
강씨는 이 일을 모르다가 지난해 친아들이 농약을 물로 오인해 마시고 사망한 후 호적정리를 하면서 사실을 알게 됐다. 남편을 여의고 친아들까지 사고로 잃게 된 마당에 의붓아들 김씨가 자신의 몫을 챙기려고 몰래 남편의 유산까지 정리해버린 걸 알게 된 강씨는 김씨에 대해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한 수사관은 “어차피 집안 재산은 김씨도 상속받을 텐데, 그가 서둘러 땅에 대한 지분정리를 해버리자 강씨와 김씨의 사이는 더욱 멀어졌다”고 전했다.
김씨는 지분을 상속받은 땅을 담보로 사채까지 끌어다 썼으나 하는 일마다 실패해 결국 부채 3천여만원을 지게 됐다. 빚 독촉에 시달리자 김씨는 다시 강씨를 찾아가 “땅을 팔든지 대출을 받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강씨는 “땅 문제는 나 혼자 처리 못한다. 집안 어른들과 상의해봐야 한다”며 거절했다. 그 후로도 강씨와 김씨 사이에 재산 문제에 따른 갈등이 잦았다. 결국 김씨는 새어머니 강씨에게 돈을 얻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자신을 친자식처럼 길러준 강씨를 살해할 결심을 했다.
김씨는 동거녀의 남동생 조씨에게 이 같은 사실을 털어놓으며 “어머니를 죽여주면 2천만원을 주겠다”고 범행을 제안했다. 조씨는 처음엔 거절했지만 무직에 생활이 어려웠던 터라 결국 김씨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 피의자의 선친 묘소 옆에서 현장검증. | ||
두 사람은 사체를 태우던 중 날이 밝아오자 행인들에게 들킬 것을 우려해 다시 강씨의 사체를 차에 실었다. 이들이 핸들을 멈춘 곳은 화성시 마도면에 있는 한 야산, 김씨의 선친 묘가 있는 곳이었다. 그나마 마지막 ‘배려’였을까. 김씨는 숨진 새어머니 강씨를 남편인 아버지의 묘 옆에 암매장했다. 김씨는 경찰 조사에서 “그래도 (새어머니를) 아버지 곁에 묻어주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랬다”고 진술했다.
한편 지난 1월 말 이후 강씨가 집에서 보이지 않자 인근에 살던 강씨의 친척들은 ‘사고’가 난 것을 직감했다. 지난 2월1일 강씨의 한 친척은 “지난해 7월 친아들이 농약을 마시고 사망한 이후 거의 외출을 하지 않던 강씨가 아무 연락도 없이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며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다.
경찰은 강씨가 범죄 피해를 당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즉각 수사에 착수했다. 평소 강씨와 아들 김씨가 재산문제로 다툼이 있었다는 사실과, 강씨의 실종 당일에도 강씨 집 근처에서 김씨를 봤다는 진술을 확보해 김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그러나 김씨는 자신의 혐의를 극구 부인했다.
그러던 지난 11일 마을 주변을 샅샅이 수색하던 경찰은 강씨의 사체를 김씨 선친의 묘 근방에서 찾아냈다. 사체가 비교적 얕게 묻힌 상태여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 수사관은 “김씨와 조씨가 땅을 파다가 땅 아래 바위가 있어 깊이 파지 못해 사체 일부가 드러난 것 같다”고 전했다.
경찰은 조사를 하기 위해 다시 김씨를 경찰서로 불렀다. 출석요구에 불응하던 김씨는 결국 지난 15일 경찰에 자신의 범행 모두를 자백했다. 김씨는 “사채이자도 갚지 못하고 시달리는 형편이어서 범행했다”며 고개를 떨구었다.
김씨의 범행이 밝혀지자 강씨의 유족들은 더 큰 충격을 받은 듯한 모습이다. 유족들은 처음엔 “조용하고 말 없던 김씨가 설마 강씨를 살해했을까”라며 믿기지 않는 듯한 반응을 보였지만 김씨의 범행이 낱낱이 드러나자 배은망덕한 김씨의 소행에 분루를 흘리고 말았다.
4년 전 농약 마시고 사망한 친아들 죽음도 혹시?
의붓아들 김씨가 강씨의 살해범인 것으로 밝혀지자 강씨의 유족들은 ‘4년 전 사망한 강씨의 친아들 A씨도 김씨가 살해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유족들에 따르면 당시 A씨는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와 농약을 물로 오인해 마신 후 다음날 병원에 실려가 일주일간 입원 치료를 받던 중 사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A씨가 농약을 마신 사실은 사후에야 밝혀졌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마신 것이 농약이 아닌 물로 알고 있었다. 입원 중에도 A씨는 이 사실을 몰라서 해독 치료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사망한 것이다.
가족들은 이제까지 A씨의 사망을 단순 사고로 생각했으나 이번 사건으로 김씨가 이때부터 재산을 노리고 A씨 몰래 집 안에 농약을 비치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한 수사관은 “유족들의 요청이 있어 그 가능성에 대해서도 수사할 계획이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