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3년차의 전도유망한 이종운(33) 변호사가 실종된 것은 지난해 7월29일. 이 변호사는 이날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평소보다 이른 퇴근을 했다. 당시 이 변호사는 사무실을 나가면서 직원들에게 “내일 봅시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이 변호사는 그 후 다시 돌아오지 못했고 실종된 지 1년 4개월이 된 지금도 아무런 소식이 없다. 가족들은 이 변호사가 두 달 후 결혼을 앞두고 가출할 이유가 없다며 경찰에 수사를 요청했다.
이 변호사의 약혼녀 최아무개씨(30)는 당초 수사중인 경찰에게 “이 변호사가 결혼을 앞두고 ‘차를 바꿔 달라’ ‘큰 사무실을 차려 달라’ ‘3억원을 빌려달라’며 요구사항이 많았다. 내가 이런 걸 들어주지 못하자 이 변호사가 결혼에 회의를 느끼고 잠적한 것으로 보인다”고 진술했다. 최씨는 또 실종 직전 이 변호사가 현금 5천만원을 요구해 예금에서 인출해 전달했는데 아마 이 돈을 가지고 이 변호사가 잠적했을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최씨의 이 같은 진술과 함께 마침 실종된 날로부터 이틀 후가 이 변호사의 여름휴가였기 때문에 경찰은 이 변호사가 머리를 식히기 위해 휴가를 떠난 것으로 보고 사건을 단순가출로 처리하고 종결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결혼을 앞둔 이 변호사가 돈 욕심을 내며 약혼녀를 버린 비정한 남자쯤으로 치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속속 벌어졌다.
약혼녀 최씨가 이 변호사가 실종된 이틀 후부터 이 변호사의 신용카드로 명품 가방 등 8백만원어치를 쇼핑하고 이 변호사의 자동차를 팔아 1천만원을 자신의 용돈으로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또한 최씨는 실종 직전까지 이 변호사가 살던 오피스텔을 세를 내주고 전세금 6천만원을 챙겼으며 이 변호사의 예금통장에 들어있던 현금 2백여만원을 모두 인출해 버렸을 뿐 아니라 은행에서 이 변호사의 명의로 7천만원의 대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최씨는 기다렸다는 듯 이 변호사의 재산을 모두 가로채거나 자신의 명의로 돌려버렸다. 모두 이 변호사가 실종된 지 두 달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이에 대해 최씨는 “이 변호사가 나를 버리고 도망가 홧김에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변호사의 가족들과 지인들의 눈길은 달랐다. 가족들은 “결혼날짜까지 잡아 놓은 이 변호사가 잠적할 이유는 전혀 없다. 이 변호사는 소탈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결혼을 명목으로 거액의 금품을 요구할 사람이 절대 아니다”라고 항변했다. 또한 “결혼할 마음도 없는 사람이 자신의 돈으로 산 오피스텔을 어떻게 최씨의 명의로 해줬겠느냐”며 자신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최씨의 주장을 반박했다.
뿐만 아니라 최씨는 이미 2003년 11월 이 변호사와 혼인신고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대해 최씨는 “이 변호사가 너무 바빠 나보고 알아서 하라고 해 혼인신고를 했다”고 말해 이제까지 이 변호사가 자신을 버렸다고 말한 것과 대치되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여기서 충격적인 사실 하나가 더 발견됐다. 혼인신고서의 이종운 변호사 연락처란에 낯선 휴대전화번호가 남겨져 있던 것. 최씨는 혼인신고서 작성시 순간 이 변호사의 전화번호가 생각이 안나 직장동료의 전화번호를 기재했다고 변명했지만 경찰수사 결과 놀랍게도 이 전화번호는 최씨의 동거남 A씨의 연락처였다. 최씨가 이 변호사와 2년이나 교제하고 결혼까지 약속했지만 최씨에겐 또 다른 남자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변호사가 실종되기 한 달 전 최씨가 이 변호사의 명의로 거액의 생명보험에 가입한 사실이 밝혀졌다. 보험수익자를 최씨로 기명한 이 보험계약은 보험금만 자그마치 15억원. 이 변호사가 재해로 사망하거나 실종된 지 2년이 지나면 최씨가 이 보험금을 고스란히 손에 쥐게 된다.
도저히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최씨의 행각은 경찰수사가 진행되는 가운데서도 계속됐다. 이 변호사가 사라진 두 달 후인 지난해 9월 말 자신이 고용한 사람을 시켜 이 변호사의 고향집에 있는 부모에게 “종운이에요. 걱정말아요. 잘 있어요. 다른 여자가 생겼어요. 곧 들어갈께요”라는 짧은 통화를 하게했다. 그리고 이 변호사의 수첩에서 글자를 잘라내 “헤어지자. 중언부언하지 말고 이혼하자. 너도 다른 남자 만나라”는 내용의 허위 팩스를 만들어 경찰에 제출해 이 변호사의 사건을 단순가출로 종결시키려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이 겹치자 결국 경찰도 최씨가 이 변호사의 실종과 모종의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고 최씨의 집을 압수수색했다. 압수수색결과 최씨의 집에서 이 변호사의 주민등록증과 수첩, 재산을 빼돌리기 위해 허위로 발급받은 이 변호사의 인감 증명서 등이 발견됐다. 그럼에도 최씨는 발견된 물건에 대해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며 “이 변호사가 집에 놀러왔다가 두고 간 것 같다”고 발뺌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이 같은 정황이 나타나도 물증이 없다는 점에서 최씨는 무죄였다. 결국 최씨는 사기 및 사문서 공문서 위조, 공문서 부정행사 등의 죄명으로만 기소됐고 재판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9월21일 선고 공판에서 최씨는 사기 혐의로만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이 사건을 맡은 서울중앙지법은 최씨에게 사기 혐의로는 이례적으로 10년 징역이라는 중형을 선고하며 판결문에도 여운을 남겼다. 10년 징역형이라면 사기죄로는 이례적이며 살인죄에 가까운 범죄에 내려지는 중형이다. 재판부는 또 판결문에서 “정황상 최씨가 이종운 변호사의 실종과 관련이 있고 최씨가 이 변호사의 실종에 따른 뒷마무리로 계획적으로 범행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제3자가 볼 때 최씨가 이 변호사의 실종과 연관 있다고 볼 수 있을 만큼 암시한 것이다. 현재 법적으로 최씨는 실종 사건과 관련이 없다.
경찰에 따르면 최씨는 어릴 적부터 사법고시를 합격한 판검사나 변호사와 결혼하는 것이 꿈이었다고 한다. 최씨의 어머니는 유언처럼 평소 “사위는 법조인이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해 최씨가 자연스럽게 이런 꿈을 갖게 된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명문여대 출신에 웹디자이너로서 남부러울 것 없는 최씨는 지인을 통해 알게 된 이 변호사와 2년 넘게 결혼을 전제로 교제해 오면서도 동거남 A씨를 만나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였다. 동거남 A씨 역시 이 변호사의 존재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변호사가 실종되기 보름 전 최씨와 A씨는 2박3일 여정으로 제주도 여행을 가기도 했다는 것이 경찰 수사 기록에 나와 있다.
이 변호사의 한 가족은 “경찰수사가 시작된 후 최씨가 이런 사정을 얘기하면서 ‘결혼 약속은 이 변호사와 했지만 진짜 결혼하고 싶은 사람은 동거남 A씨였다. A씨는 내 이상형이다’라고 털어놨다”고 전했다. 결국 최씨는 자신의 허황된 꿈을 이루기 위해 이 변호사를 이용하려했던 것이다. 현재 강남경찰서가 이 변호사의 실종을 재수사하고 있지만 실종된 지 2년이 되는 내년 7월까지 이 변호사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15억원의 보험금도 최씨가 갖게 된다.
경찰의 한 관계자는 “최씨가 이 변호사 실종에 연관됐는지, 또 다른 공범이 있는지 수사가 계속되고 있다”고 전해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시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