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에는 자신과 이름이 비슷한 전 국정원 기조실장을 사칭, 거액의 돈을 챙긴 혐의로 붙잡힌 최 아무개 씨(55·건설업)는 또 다른 형태의 권력자 사칭 사기범이었다.
경찰에 따르면 최 씨는 DJ 정권 시절 국정원 기조실장을 지낸 최 아무개 씨의 실명을 쓰면서 사기행각을 벌여왔다. 피해자들은 대부분 부유층 여성들인 것으로 드러났으며 그 중에는 최근에도 맹활약하고 있는 인기 중견탤런트 B 씨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더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수십여 명에 이르는 피해자들이 최 씨에게 거액의 사기를 당하고도 피해사실을 한사코 숨기려 드는가 하면 그것도 모자라 심지어 최 씨를 훌륭한 사람이라고 여전히 믿고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그는 어떤 식으로 사기 행각을 벌였던 것일까.
최 씨가 사기행각을 꾸미게 된 계기는 2001년 우연히 한 국정원 직원을 만난 자리에서였다. 그는 이 직원으로부터 자신의 이름이 전 국정원 기조실장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또한 전체적으로 풍기는 중후한 이미지도 상당히 닮았다는 얘기도 들었다. 순간 최 씨의 머리가 재빨리 회전하기 시작했다.
경찰에 따르면 이후 최 씨는 국정원 고위 간부 최 아무개 씨 행세를 하기 위해 그의 출신 학교와 정치적 배경 등 주변신상에 관한 것을 철저하게 학습했다. 최 아무개 씨가 되기 위해서였다. 최 씨는 또 재력있는 사람들에게 접근하기 위한 통로로 골프장과 카바레를 이용한 것으로 경찰조사 결과 밝혀졌다.
수도권 지역의 골프장을 돌며 재력가들을 물색한 최 씨는 서서히 인맥을 넓혀나가지 시작했다. 그는 라운딩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전 국정원 기조실장 최 아무개라고 소개했고 그의 연기는 아주 그럴싸해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이를 그대로 믿었다.
2001년 어느 날 최 씨는 경기도 용인시 모 골프장에서 중견탤런트 B 씨와 우연히 함께 라운딩을 할 기회를 잡게 됐다. 최 씨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그동안 준비해 뒀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최 씨는 B 씨에게 “당신이 1967년 청와대에 초청받아 왔을 당시에 내가 전국 최연소 검사로 일을 하고 있었다”며 “그때 내가 당신 신원조회를 했기 때문에 당신 족보까지 꿰차고 있다”고 과시했다. 최 씨는 이미 B 씨에 대한 사전 조사를 어느 정도 거친 후였기에 B 씨 또한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고 그의 말을 그대로 믿어버렸다.
최 씨는 이처럼 그의 가짜 인품에 속은 이들을 중심으로 ‘E 클럽’이라는 골프 사교 모임을 만들어 자신이 회장을 맡기도 했다. 경찰조사 결과 이 모임의 회원들은 모두 10여 명 정도로 이들 대부분은 상당한 재력가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 역시 최 씨를 전 국정원 기조실장으로 알고 있었다.
최 씨 사건을 수사한 강남경찰서의 한 관계자는 “일반인들은 이해가 안 갈지 모르겠지만 실제 최 씨와 대화를 몇 마디 나눠 본다면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일단 외모나 행동거지가 품위 있어 보일 뿐만 아니라 말하는 것 또한 매우 점잖으면서도 청산유수”라고 혀를 내둘렀다. 그는 “탤런트 B 씨 등 피해자들은 누구나 다 최 씨의 중후한 인품(?)에 깜박 속아 넘어갔다”고 덧붙였다. 최 씨는 이 모임의 회장이라는 직함을 이용해 골프부킹을 주선해 주면서 범행대상을 물색했다.
최 씨의 제2의 사냥터는 엉뚱하게도 고급 카바레였다. 최 씨가 자주 이용한 카바레는 강남의 부유층이 드나드는 것으로 유명한 신사동 W 카바레. 이 카바레의 단골이었던 최 씨는 가깝게 지내던 웨이터 J 씨에게 “좋은 사모님들을 많이 소개시켜 달라”고 특별히 부탁했고, 웨이터가 이른바 ‘부킹’을 통해 재력 있는 중년 여성들을 연결시켜주면 팁을 두둑이 찔러주곤 했다.
최 씨의 카바레 여성 공략법은 독특했다. 그는 여성들과 합석해도 절대 플로어로 나가 함께 춤을 추지도 않았고 손이나 어깨에 손을 얹는 등의 치근덕거리는 행위도 일절 하지 않았다.
경찰 관계자에 따르면 최 씨는 여성들과 함께 카바레에서 나와도 2차를 가는 일이 절대 없을 만큼 자기 관리를 철저하게 했다고 한다. 다만 “시간이 늦었으니 내가 집까지 바래다 주겠다”며 최고급 승용차로 여성들을 안전하게 집까지 태워다 주는 매너를 보였던 것.
또 최 씨는 카바레에서 만난 여성들에게 절대 먼저 전화하는 일이 없었다. 완벽한 매너와 자상함이라는 미끼를 던진 후 먼저 여성들로부터 전화가 걸려오기를 기다렸고 이는 대부분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
경찰 관계자는 “최 씨는 그야말로 여자의 심리를 이용할 줄 아는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인 듯했다”며 “온몸을 명품으로 휘감고 최고급 외제차를 타고 다니며 100점짜리 매너까지 갖춘 멋쟁이 중년 남성이 접근해 온다면 누구나 여기에 혹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은 최 씨의 휴대폰에 저장된 100여 개의 전화번호를 일일이 확인한 결과 이 가운데 60여 개의 전화번호가 모두 40~50대 중년 여성들의 것이며 이들 중 대부분이 최 씨와 깊은 관계인 것으로 파악됐다고 밝혀 충격을 주었다.
취재 결과 기자가 확인한 충격적인 사실은 더 있었다. 경찰이 추가 피해자 확인을 위해 ‘최 씨의 여자들’에게 피해사실 유무를 물었으나 여성들은 한사코 “최 씨에게 피해본 사실이 없다”고 부정하고 있다는 것. 그런데 경찰에 따르면 피해 여성들이 단순히 자신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최 씨에 대한 믿음과 연정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는 사실이다.
경찰 관계자는 “심지어 일부 여성들은 ‘그렇게 훌륭하신 분을 왜 사기꾼이라고 하느냐’면서 오히려 우리를 욕하는 경우도 있었다”며 기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피해자들이 이처럼 피해사실을 숨기거나 최 씨에게 연정을 보이는 데에도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경찰 관계자는 “최 씨는 피해자들로부터 무턱대고 돈을 뜯어가지 않았다”며 “상대가 부담스러워하지 않을 만큼의 적정선에서 돈을 요구하는 치밀함을 보였고 따라서 피해 여성들도 피해액에 대해서는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최 씨는 피해 여성의 재력이 100억 원대면 1억 원, 10억 원대면 1000만 원, 1억 원대면 100만 원 하는 식으로 돈을 뜯어 갔다는 것이다.
한편 경찰 조사에 따르면 최 씨는 사기전과 2범에 폭력 전과 1범 등의 전과 기록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윤지환 프리랜서 tangohunt@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