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씨가 근무했던 부산의 A 업체는 최근 3~4년 사이에 홈쇼핑 등을 통해서 매출액이 급격하게 늘어났던 중견 전자업체. 주력 상품은 청소기였지만 그 외의 다양한 생활 전자 제품 등을 출시하면서 성장가도를 달려왔다. 특히 A업체의 제품은 국내 모 일간지로부터 ‘유망 아이디어 상품’으로 선정될 만큼 탁월한 기능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뿐만 아니라 일본 측으로부터도 안전인증마크인 ‘S마크’를 획득하기도 했다.
김 씨가 범행의 유혹을 느꼈던 것도 이러한 회사의 성장과 무관하지 않다. 회사 통장에 접근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경리부 직원이었던 그녀는 차츰 늘어나는 회사 매출액을 보면서 점점 ‘검은 유혹’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침내 회사 돈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횡령한 돈으로 고급 수입외제차인 렉서스와 BMW를 구입하는가 하면 시가 2억 5000만 원짜리 33평 아파트를 장만했다. 뿐만 아니라 값비싼 명품 옷과 액세서리 등을 구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녀는 회사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출근할 때에는 아반떼를 탔다가 집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수입외제차를 타며 자신의 허영심을 마음껏 충족시켰다. 그녀는 친구들과 만날 때에도 거의 모든 비용을 자신이 냈으며 친구들에게도 명품 등을 선물하면서 환심을 샀다고 한다. 친구들이 그녀의 행동에 대해 의아해했지만 그러한 의심도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처음에 그녀의 과소비에 대해서 걱정하던 친구들도 그녀의 선물공세 세례가 계속되자 이내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범행동기에 대해서는 경찰도 무척 의아해하고 있다. 김씨는 4년제 대학까지 졸업했고 평소 인간관계 역시 문제가 없었으며 거기다 차분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졌기 때문. 경찰은 그녀의 범행동기에 대해서 ‘순간적인 욕심에 의한 낭비벽’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만 단정짓기에는 그녀의 ‘이중생활’은 매우 철저하고 용의 주도 했다. 김 씨는 입사 당시 자신의 나이를 속이기 위해 6살이나 어린 동생의 주민등록증을 제시할 정도로 대담한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던 것이다.
또한 그녀는 회사의 신뢰를 얻기 위해 거래업체에게는 철저하게 신용을 지킬 것을 요구했다. 대금 입금일 며칠 전부터 독촉을 시작해 어김없이 돈을 받아냈고 회사 측에서도 이런 김 씨에 대해 전폭적으로 신뢰했다는 것이다. 회사 내에서의 평판 역시 좋았으며 매우 겸손하고 예의바른 직원으로 인식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회사 경영진은 물론 직원들도 그녀에 대해서는 크게 의심을 하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주변 사람을 속이는 사이 그녀의 횡령액수는 점차 커져가기 시작했다. 적게는 1000만 원에서부터 많게는 1억 원 이상의 돈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범행수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그저 인터넷 뱅킹으로 회사 공금을 자신의 통장으로 이체를 했던 것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업체의 경우 경리부 직원이 그녀밖에 없었고 주변에서도 그녀에 대한 의심을 하지 않았기에 범행은 3년간이나 지속될 수 있었다.
또한 김 씨의 범죄는 바쁜 회사 사정으로 발각이 늦춰질 수 있었다. 매일 매일 홈쇼핑으로 팔려나가는 양이 상당했고 전국에 산재해 있던 6개의 서비스 센터를 통해 접수되는 A/S업무를 처리하기에도 빠듯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3년간의 계속된 공금 횡령은 너무 길었다. 매출은 계속해서 증가하는데 입금액은 그에 비례해서 늘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여긴 회사 경영진들이 그녀에게 결산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했던 것. 위기감을 느낀 김 씨는 핑계를 대며 결산보고서의 제출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급기야 잠적하기에 이르렀다.
갑작스런 김 씨의 무단결근에 비상이 걸린 경영진은 그때서야 회사 회계 장부와 통장을 확인하기 시작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실제 입금액과 회사 통장에 있던 돈이 무려 12억 원이나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 회사는 경찰에 고발했고 김 씨는 곧 잡혔다.
이번 사건을 수사한 부산 연제경찰서 측은 김 씨에 대해 “일반 횡령 사건을 저지른 직원들과 상당히 다른 케이스”라며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김 씨는 40대의 나이임에도 독신으로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원래 집안이 가난한 편도 아니었고, 가정에 문제가 있는 것도 더더욱 아니었다는 것. 평범한 가정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한 전형적인 커리어우먼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녀는 자신에 대한 수사망이 좁혀오리란 것을 뻔히 알고 있었음에도 깊숙이 잠적하거나 도망가지도 못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의 한 관계자는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랐거나 자신이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도 아닌 독신 여성이었다는 점에서 우발적인 욕심과 많은 돈이 가져다주는 신기한 경험 때문에 범행을 지속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남훈 프리랜서 freehook@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