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 씨는 아내를 죽인 뒤 인적이 드문 지방도로변의 무성한 수풀에 사체를 버렸다. | ||
경찰은 사체에 신발이 신겨져 있지 않은 점, 휴대폰 등 소지품이 없는 점으로 미루어 다른 곳에서 살해당한 뒤 풀숲에 버려진 것으로 보고 수사를 진행해왔다. 사체를 발견한 지 23일 만인 지난 2일 경찰이 유력한 살해 용의자로 체포한 사람은 다름 아닌 변사한 여성의 남편. 대체 이들 부부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경찰이 밝힌 20여 일간의 수사기록을 따라가본다.
이번 사건은 사체가 발견된 곳이 ‘화성’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세간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화성살인사건’의 악몽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 아니냐는 일각의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경찰은 “화성사건이 벌어졌던 곳과는 20~30㎞나 떨어져 있는 데다가 성폭행 흔적도 나타나지 않아 연관은 없어 보인다”며 별개의 사건일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세상의 관심이 큰 만큼 경찰의 대응도 기민했다. 현장 인근 마도파출소에 전담반을 구성해 내로라하는 베테랑 형사들이 달라붙었다. 하지만 사건 현장에 어떤 단서도 남아 있지 않은 데다가 목격자조차 없어 수사는 난항을 거듭했다. 특히 사체가 워낙 심하게 부패된 탓에 처음부터 어려움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해골 상태의 사체에 남아 있는 것은 검정색 티셔츠와 청바지, 액세서리뿐이었다. 변사자는 당나귀 캐릭터가 그려진 티셔츠와 욘사마 양말 등 최신 유행하는 옷을 입고 양 갈래로 땋은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또 커다란 링 귀고리와 팔찌, ‘7942’라는 음각이 새겨진 반지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변사자는 20대 초반의 여성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됐다.
처음에 경찰은 경기도 내 실종자와 가출자 중 20대 초·중반에 해당하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신원확인에 나섰다. 그러나 변사자의 신원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다. 경찰은 연령대를 높여가며 경기도 및 인근 시도의 가출 및 실종 신고 접수기록을 일일이 확인한 결과 변사자의 의복 등이 수원에 살던 미용사 김 아무개 씨(30)의 것과 흡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변사자에게 채취한 DNA와 김 씨 모친의 DNA를 분석한 끝에 변사자가 김 씨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변사한 김 씨의 남편 강 아무개 씨(30)는 지난 5월 중순께 이미 ‘아내가 돌연 집을 나갔다’며 가출 신고를 해놓은 상태였다. 남편 강 씨의 지난 행적에 대해 탐문수사를 벌이던 경찰은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아내가 실종된 이후 강 씨가 자신의 승용차를 갑자기 팔았던 것.
강 씨가 판 차량을 수소문해서 찾아낸 경찰은 차 안 시트에서 희미한 혈흔 몇 점을 발견했다. 그동안 제자리걸음을 계속해오던 수사의 가닥이 잡히는 순간이었다. 뒤이어 경찰은 수원 장안구에 있는 강 씨의 집안 곳곳을 세밀하게 수색한 끝에 욕실 벽에 남아 있던 혈흔 세 점을 채취하는 데 성공했다. 이 혈흔들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의뢰해 긴급 감식한 결과 아내 김 씨의 것임이 확인됐다.
처음에 범행을 완강히 부인하던 강 씨도 경찰이 들이대는 증거 앞에선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화성경찰서 최재만 형사과장은 “과학적인 수사의 승리”라며 “드디어 집에 들어가 발 뻗고 잘 수 있게 됐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남편 강 씨는 대체 왜 아내를 살해한 것일까.
두 사람은 고등학교 동창으로 7~8년간의 오랜 동거 끝에 지난 2003년 부부의 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진다. 사건은 결혼 3년째를 맞던 지난 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편 강 씨는 지난해 11월에 실직한 뒤 창피한 마음에 이 사실을 아내에게 숨겨왔다. 강 씨는 실직 사실을 감추기 위해 아내 몰래 모두 900만 원을 대출받아 매달 월급날에 120만 원씩을 김 씨에게 건넸다. 그러나 6개월간 숨겨온 강 씨의 비밀은 결국 탄로 나고 만다.
5월 10일 마침 월차휴가를 얻은 김 씨가 집안 청소를 하던 중 대출 내역서를 발견한 것. 깜짝 놀란 김 씨는 남편을 추궁했고 강 씨는 거짓말로 일단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다음날에도 아내의 의심은 풀리지 않았고 집요한 추궁 끝에 강 씨는 사실을 털어놓게 된다. 평소 생활력이 강했던 김 씨는 남편이 자신도 모르게 큰돈을 대출받았다는 사실에 좀처럼 화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무엇보다 남편이 실직했음에도 6개월이나 자신을 감쪽같이 속여왔다는 사실에 대한 배신감도 컸다.
결국 이날 저녁 8시께 두 사람은 심한 말다툼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김 씨가 남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모욕적인 언행을 한 것으로 보인다는 게 경찰의 설명이다.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강 씨는 순간적으로 치밀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했다. 결국 그는 부엌에서 흉기를 들고 욕실에 들어가는 아내를 뒤쫓아가 잔인하게 살해하고 만다. 범행은 이처럼 그 흔한 부부싸움 끝에 우발적으로 시작됐다.
그러나 정작 경찰을 놀라게 한 것은 범행 후 강 씨가 보인 치밀함이었다. 아내를 살해한 지 몇 시간 뒤 강 씨는 아내가 근무하는 미용실에 태연히 전화를 걸어 “들어올 시간이 지났는데 아내가 아직 안 들어왔다. 혹시 오늘 회식이 있느냐”고 묻는 등 알리바이를 짜내는 여유를 보였다.
이날 자정께 아내의 사체를 차에 실은 강 씨는 사체를 유기할 장소를 찾아 두 시간여를 돌아다닌 끝에 인적이 드문 지방도로변에 차를 세웠다. 그곳은 인적이 드문 데다 수풀이 무성히 우거져 있어 작정하고 살피지 않는 이상 사체를 발견하기 힘든 곳이었다.
사체를 버리고 온 후에도 강 씨의 치밀한 ‘알리바이 만들기’는 계속됐다. 사건 발생 6일 후인 17일 아내가 가출했다며 경찰에 가출신고를 하고 그뒤에도 몇 차례 경찰서에 찾아와 아내를 찾아달라며 수사를 요청한 것으로 전해진다.
강 씨의 뻔뻔스러운 연기는 결국 두 달여 만에 들통나고 말았다. 경찰 조사에서 강 씨는 “실직상태가 길어지는 탓에 가뜩이나 마음이 불편했는데 뒤통수를 때리며 모욕적인 발언을 하는 아내의 태도에 순간적으로 화가 치솟아 범행을 저질렀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존심이 상한다는 이유로 10년 이상 함께 산 아내를 무참히 살해하고 사체를 유기한 강 씨의 행동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 경찰의 얘기다.
이수향 기자 lsh@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