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씨의 길지 않은 삶에서 언니(31)는 전부였다. 지적장애 2급과 정신질환을 갖고 있던 언니는 주변의 도움 없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지적수준은 4~6세 정도에 불과했다. 말하고 읽고 쓸 수 있지만 어느 수준 이상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정신장애까지 가져 종합장애등급 1급 판정을 받은 언니 류 씨는 24시간 돌볼 사람이 필요한 상태였다. 자신을 잘 챙기는 동생을 언니는 그만큼 의지하고 따랐다. 때문에 눈 감는 순간까지 언니를 걱정했던 것이었다.
2012년 대구에 정착한 류 씨는 밤낮없이 마트에서 일하며 언니를 뒷바라지했다. 하루 종일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기에 언니는 봉덕동에 있는 한 보호시설에서 생활했다. 너덧 명의 장애인이 한 가구를 이뤄 생활하는 시설이었다. 종일 복지사가 돌봐주고, 함께 생활하는 곳이었기에 언니는 편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기초생활수급자였던 류 씨의 언니는 다행히 보호시설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다. 류 씨는 언니를 위해 옷과 먹을 것 등을 사들고 종종 찾아왔다. 매일 찾아오진 못해도 인터넷 카페에 게시된 언니가 생활하는 모습을 보며 지친 가운데서도 힘을 냈다.
자매의 기구한 삶은 류 씨가 돌을 맞이하기 전부터 시작됐다. 류 씨가 태어난 1987년 아버지는 갑작스레 세상을 떴다. 그로부터 3년 후 어머니도 재가하고 연락이 끊기면서 두 사람은 할머니와 삼촌 부부 손에 길러졌다. 언니에 대한 걱정을 할머니와, 삼촌 부부와 함께 나눠지며 단란하게 살았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10년 전 언니가 가출을 했고, 류 씨는 부산에 있는 보호시설에서 언니를 찾아내 대구로 데려왔다. 할머니와 삼촌부부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류 씨는 언니를 데리고 집을 나왔다. 어떻게든 언니는 자신이 책임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대학을 다니고 연애를 하고, 세상 즐거움을 누릴 나이지만 류 씨는 오롯이 돈을 벌고 언니를 책임지는 데만 매진했다.
꿋꿋하게 생활을 꾸려가던 류 씨에게 지난해 8월 비보가 날아들었다. 항상 자매를 걱정해주고 키워주었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류 씨는 보호기관에 있던 언니를 데리고 할머니의 장례를 위해 광주로 내려갔다. 할머니를 여읜 충격은 생각보다 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언니의 상태는 나빠지기를 반복했다. 병뚜껑과 손톱으로 온몸을 긁는 등 자해를 했다. 한 번 시작된 자해행동은 말리기 힘들었다. 함께 생활하던 이들이 따라할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행동이었다. 결국 언니가 생활하던 시설에서 류 씨에게 언니의 상태를 알리고 동의를 얻어 병원에 입원시켰다. 두 차례 입원과 퇴원이 반복됐다. 그 과정에서 언니를 지켜보던 류 씨의 심적 부담감은 점점 커져갔다. 몸에 상처를 내며 몸부림치는 언니를 보며 언제 끝날지를 생각했다.
류 씨 자매가 생활했던 원룸(왼쪽)과 류 씨 언니가 생활했던 시설.
할머니의 부재와 언니의 계속된 상태 악화, 변변한 직업 없이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충당해야 하는 현실. 모든 상황이 겹치자 류 씨를 붙들고 있던 삶의 의지는 점점 약해져 갔다. 아등바등 살아도 생활고는 심해져만 갔다. 2년 동안 한 번도 밀리지 않던 월세는 두 달 치나 밀렸다. 가스비, 자동차 보험료, 카드값 등 30만 원이 쌓여갔다. 100만 원 남짓한 돈이었지만 근근이 살아가는 류 씨에겐 너무 큰 부담이었다. ‘이렇게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류 씨를 덮쳤을 것이다. 결국 성실히 일해오던 아르바이트도 그만뒀다.
12일 류 씨는 언니와 함께 봉덕동 주민센터를 찾았다.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된 언니 앞으로 기초생활수급비를 지원 받으면 숨통이 조금 트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주민센터 직원은 “류 씨가 언니와 함께 와서 서류 안내를 해줬지만 그 후에 다시 찾아오진 않았다”고 말했다.
일부 언론은 언니인 류 씨가 보호시설에 1년 이상 입소했다가 퇴소했기 때문에 자립정착금 500만 원을 받을 수 있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남구청 복지 관련 담당자는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자매는 구에서 규정된 자립정착금 지원대상이 아니다. 정착금은 실제로 시설을 퇴소한 장애인이 홀로 자립을 했을 경우에만 지원금 600만 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경제활동이 가능한 동생이 언니를 데려갔기에 해당사항이 없다는 설명이었다.
지원을 받을 길도 여의치 않았던지 지난 13일 류 씨는 언니가 생활하던 보호소를 찾아 “언니는 주간보호소에 맡기고, 저녁엔 내가 돌보겠다. 함께 생활하고 싶다”며 언니를 데려갔다. 류 씨의 언니가 생활했던 보호소 관계자는 “일도 쉬고 언니도 데려간다기에 의아했지만 더 이상 묻진 않았다. 함께 자살하려고 언니를 일부러 데려간 게 아닐까 뒤늦게 생각했다”며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자매는 시설을 나간 13일부터 열흘 사이에 수차례 동반자살을 시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류 씨의 언니는 경찰에서 “동생이 높은 곳에서 같이 뛰어내리자고 했지만 죽기 싫어서 그러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20일에는 집에서 번개탄을 피워놓고 자살을 하려 했다. 연기가 피어오르자 언니가 창밖으로 소리를 질러 주변 사람들이 신고를 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당시 삼촌이 올라와 류 씨 자매를 돌보려 했지만 류 씨가 ‘괜찮다’며 만류해 다시 돌아간 것으로 전해졌다. 동생은 언니의 삶의 의지가 확고하다는 걸 알게 되자 더 이상 언니를 괴롭힐 수 없었다. 결국 언니를 집에 혼자 남겨두고 집을 나섰고, 아르바이트를 위해 마련한 시가 40만 원짜리 중고차 안에서 번개탄을 피우고 숨을 거뒀다.
경찰 관계자는 “삼촌이 계신 광주에서 장례는 치른 것으로 알고 있다. 류 씨의 언니 역시 삼촌이 보호하고 있다”고 전했다. 대구광역시장애인부모회 나호열 사무국장은 “장애인과 가족에 대한 금전적 지원도 중요하지만 심리적 지원도 병행돼야 한다. 선제적으로 장애가족을 돌보는 시스템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사회의 따뜻한 배려와 관심 없이는 제 2의 류 씨는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것이다.
대구=서윤심 기자 hear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