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고 횡령 피의자 최 씨의 용인 별장과 지하의 당구장. 사진제공=경찰청 | ||
무려 2년 동안 이어진 최 씨의 간 큰 범죄 행각이 들통난 것은 감사원의 모니터링 덕분. 옛 철도청의 수원-천안간 복복선 전철화 사업과 관련된 지장물 이설공사가 장부의 지출액과 달리 실제로는 많지 않았다는 단서를 포착한 감사원이 최 씨의 신병을 확보해 경찰에 인계했던 것.
경찰 수사 결과 현재 최 씨의 통장에 남아 있는 돈은 ‘불과’ 1500만 원 정도. 그는 횡령한 돈 가운데 절반가량을 화폐 수집에 사용했으며 나머지는 별장과 자동차 구입, 해외여행과 유흥 등 호화생활을 하는 데 탕진한 것으로 드러났다. 한순간 물거품이 돼버린 최 씨의 빗나간 ‘인생역전’ 스토리는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방불케 했다.
최 씨가 횡령한 돈의 용처를 조사 하던 경찰은 돈의 행방이 드러난 순간 말문을 잃고 말았다. 대개의 경우 거액의 공금을 횡령한 이들은 이 돈으로 빚을 갚거나 도박이나 경마, 주식 등에 돈을 탕진하는 ‘전형적인 과정’를 밟게 마련. 불안한 심리 때문에 횡령한 돈을 유흥비나 도박, 주식 등에 탕진하고 결국 빈털터리로 전락하는 게 대다수 횡령범들의 말로라는 것이 경찰관계자의 설명이다.
그러나 최 씨는 달랐다. 그의 행각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그가 횡령액의 상당 부분을 희소가치가 있는 것에 ‘투자’했다는 사실이다. 또 주위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간의 척박한 생활을 보상받으려는 듯 영화에서나 봄직한 호화판 생활을 해왔다는 것도 특이한 점. 그는 횡령한 돈으로 자신의 취미생활을 즐기고 가족과 친지들을 호강시키는 등 그간 공무원 급여로는 상상할 수 없었던 낭만적인 ‘귀족생활’을 실천에 옮겼다.
그가 범행 뒤 사들였던 경기도 용인의 고급빌라는 최 씨의 ‘무릉도원’으로 사용됐던 곳이다. 이 일대는 수년전부터 이국적인 별장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용인의 베벌리힐스’로 불리던 곳.
최 씨는 범행 직후 대지 150평, 건평 60평에 이르는 이 2층짜리 빌라를 2억 5000만 원에 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별장 지하에 노래방 시설과 당구대를 설치하고 고급 양주들이 가득한 홈바까지 갖춰 놓고 있었다. 평소 TV나 영화에 등장하는 재벌가의 분위기로 꾸며놓은 것이다. 이곳에서 그는 주말마다 가족들과 호화로운 생활을 누려왔으며 이따금 회사동료들을 초대해 성대한 파티를 열기도 했다는 것이 경찰의 설명이다.
▲ 피의자 최 씨는 15억 원가량을 화폐 등을 수집하는 데 썼다. | ||
이처럼 어려웠던 과거 때문이었을까. 마치 가난에 대한 한풀이라도 하듯 범행 뒤 최 씨의 씀씀이에는 브레이크가 없었다. 그는 아버지와 형, 여동생에게 각각 3000만 원 상당의 그랜저 승용차를 사주고 자신은 스포츠카를 몰고다니며 재벌 행세를 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또 그동안 꿈도 꾸지 못했던 해외여행도 3000만 원을 들여 가족 단위로 네 차례나 다녀온 것으로 확인됐다.
뿐만 아니라 수시로 생활비나 사업자금 명목으로 친척들에게 수백만~수천만 원씩 건네는가 하면 경마로 돈을 잃었다며 어려움을 호소하는 회사동료들에게 선뜻 수천만 원을 빌려주는 등 선심을 쓰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얼마 필요해?’ ‘계좌 번호 불러봐’라는 말을 달고 다니며 호기를 부렸다”는 것이 경찰 관계자의 얘기다.
특히 최 씨는 횡령액 중 절반이 넘는 15억 원을 국내외의 희귀한 화폐를 수집하는 데 사용한 것으로 드러나 경찰을 놀라게 했다. 최 씨의 화폐수집이 일종의 투자개념인지 단순한 취미생활인지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그가 비슷한 종류의 물품을 대량으로 모아온 것으로 보아 수집광 기질이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가 온라인 경매사이트와 화폐상을 통해 구입한 주화와 지폐는 그 무게만 총 2t가량. 발행은 되었지만 시중에 유통되지 않은 종류도 많아 그 가치가 상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옛 엽전꾸러미를 비롯해 개당 100만 원이 넘는 세계 각국의 은화와 금화, 기념주화, 연도별 1원짜리 동전, 각종 희귀 지폐 등으로 가득찬 최 씨의 방은 마치 화폐박물관을 방불케 했다.
최 씨는 어렵게 구한 이 화폐를 모두 개별 포장해서 40여 개의 공구함에 넣어두거나 진열해뒀다. 별장의 방 6개 중 3개가 최 씨의 소장품으로 채워져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그동안 얼마나 화폐 수집에 공을 들여왔는지를 보여준다. 별장에 별도로 마련된 서재에는 그가 평소 좋아했다는 만화책 1000여 권(1000만 원 상당)과 수백 개의 비디오테이프(400만 원 상당)들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하룻밤에 수백만~수천만 원을 아무렇지 않게 써대던 최 씨는 화류계에서 단숨에 VIP손님으로 떠올랐다. 특히 모든 결제를 현금으로 해 ‘재벌 2세’ ‘유능한 사업가’ ‘큰손’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그가 주대와 팁으로 흥청망청 쓴 유흥비는 자그만치 3억 원 정도. 그는 이곳에서 사귄 한 여성에게 3000만 원을 ‘용돈’으로 주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전과 달라진 최 씨의 씀씀이에 동료들이 의아해했지만 그때마다 최 씨는 ‘주식이 대박 났다’ ‘수집해둔 화폐가치가 올랐다’는 말로 둘러댔다고 한다.
경찰은 현재 최 씨의 주변인물들을 상대로 범행 가담 혹은 묵인 여부를 조사하고 있다. 6급 공무원이던 최 씨 홀로 저지르기에는 횡령 규모가 너무 크다는 점과 그의 범행이 오랫동안 발각되지 않은 점 등 석연치 않은 부분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최 씨가 간부들의 서명을 모방해 위조 결재를 해왔고, 수차례에 걸쳐 허위 문서로 공사비용을 가로챈 뒤 관련 문서를 고의로 파기했음에도 한 번도 발각되지 않은 것도 의심을 사는 대목이다. 최 씨는 자신이 허위 청구한 공사비를 해당 법인명의가 아니라 자신의 아버지 명의의 계좌로 입금하게 할 정도로 대담하기까지 했다.
현재 최 씨 가족들은 최 씨의 횡령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확연히 달라진 가정형편과 최 씨의 씀씀이를 보고서도 가족들이 아무 낌새도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이해되지 않는다”는 게 경찰의 지적이다.
그동안 가족을 부양하며 쪼들린 생활을 해오다 순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국고에 손을 대게 됐다는 최 씨. 부정한 돈으로 귀족처럼 살아보려던 그의 허망한 꿈은 결국 일장춘몽에 그치고 말았다.
이수향 기자 lsh@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