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4월 서초동 모텔서 화재가 일어나 투숙객 네 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 범인은 전날 이 모텔에 투숙했던 평범한 40대 건축회사 과장인 최 아무개 씨로 홧김에 불을 냈다고 진술했다. 사진=YTN 화면 촬영 | ||
이번에 다루는 사건은 ‘묻지마 방화’로 4명의 사망자를 낸 ‘서초동 모텔 방화사건’이다. 수많은 엽기 사건을 다뤘던 이인열 남양주경찰서 강력범죄수사팀장(49)은 이 사건을 잊을 수 없는 사건으로 꼽은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대부분의 강력 범죄들은 ‘돈 때문에’ 혹은 ‘사랑 때문에’ 일어난다. 하지만 ‘무동기’ ‘홧김에’ 범죄는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누가 희생될지 종잡을 수 없다는 점에서 더욱 위험하다. 잠재되어 있는 인간의 악한 본성이 표출되는 순간 범행으로 직결되는 셈이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 사건에서 급증하고 있는 ‘묻지마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자 한다.”
지난해 4월 21일 오전 9시 55분경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 위치한 A 모텔 2층에서 화염이 치솟았다. 놀란 투숙객들이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오거나 창문으로 사다리를 타고 탈출하는 등 모텔 일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소방차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모텔은 온통 검은 연기로 휩싸인 상태였다. 불은 15분 만에 꺼졌지만 이 화재로 6층에 투숙 중이던 박 아무개 씨(여·27)와 오 아무개 씨(여·23) 등 3명이 사망했고 중상을 입고 치료를 받던 최 아무개 씨(33)도 7일 만에 숨을 거뒀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순식간에 2층 객실 두 개와 복도가 몽땅 타버렸으니까. 주말이었거나 밤시간대였더라면 수십 명은 죽었을 것이다.”
당시 서초경찰서 강력수사3팀에 근무했던 이 팀장의 말이다.
이 사건은 사고원인을 규명하는 단계부터 애를 먹었다. 화재 다음날 서울경찰청 화재감식반, 한국전기안전공사 등에서 화재원인 감식작업에 들어갔지만 원인을 밝혀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일단 경찰은 이 사건이 단순 화재사고가 아닐 가능성에 방점을 두고 수사에 착수했다.
처음 화재 사실을 발견한 사람은 모텔 종업원이었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화재경보음을 듣고 불이 난 객실을 찾던 중 문이 열려 있는 206호실 침대 매트에 불이 붙은 것을 발견했다”고 진술했다. 소화기를 이용해 불길을 잡으려 했지만 곧이어 맞은편에 있는 209호실 문 틈에서도 불길이 치솟는 것을 보고 모텔을 빠져나와 행인에게 119에 신고해줄 것을 부탁했다는 것이다.
이 종업원의 진술에 따르면 서로 다른 두 객실에서 비슷한 시각에 불이 났던 셈이다. 정황상 방화일 가능성이 컸다. 누군가 고의로 불을 지른 것이라면 범행 후 급히 모텔을 빠져나갔을 터. 하지만 모텔에 있던 CCTV가 작동되지 않아 수사는 난관에 봉착했다. 경찰은 우선 모텔 컴퓨터 숙박기록 프로그램에 기록된 투숙객들의 입·퇴실 시간과 카드 사용내역 등을 추려내 의심스러운 점이 없는지 조사했다. 당일 모텔에는 26개실에 30여 명의 투숙객이 들었지만 상당수가 출근시간에 맞춰 화재 전에 퇴실한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화재 발생 전에 퇴실한 투숙객들을 1차로 조사했으나 이들 모두 “퇴실 당시에는 불이 나지 않았고 수상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진술, 수사는 원점을 맴돌았다. 특히 이 모텔은 숙박부를 일일이 기재하지 않고 객실 출입시에 자동으로 체크되는 시스템을 쓰고 있어 수사에 어려움이 컸다. 즉 투숙객이 객실 키텍에 키를 꽂은 시간이 입실 시간으로, 키텍에서 키를 뽑은 시간이 퇴실 시간으로 기록되는 시스템이었는데 키텍에 키를 꽂아둔 채로 퇴실하는 경우가 빈번한 것이 문제였다.
도대체 누가 왜 모텔에 불을 지른 것일까. 이 팀장은 “누군가 모텔 업주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 등으로 범행을 저질렀을 수도 있다고 보고 업주를 상대로 모텔을 인수하게 된 경위와 채무관계 등에 대해서 조사를 벌였지만 성과가 없었다. 정말 막막했다. 사망자들의 유가족들은 혼절지경인데 ‘범인을 못 잡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피가 바싹 말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 팀장은 화재가 난 모텔 일대가 유흥가 밀집지역이라는 점을 감안, 용의자가 인근에서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모텔에 투숙했을 가능성에 눈길을 돌렸다. 만약 그렇다면 범인은 술이 덜 깼거나 상당히 격앙된 상태에서 범행을 저질렀을 것으로 추측됐다.
이에 따라 3팀 형사들은 모텔 인근 200여 개의 유흥업소를 하나씩 방문해 정보를 수집했다. 사건 당일 만취상태로 나갔거나 소동을 일으킨 인물이 있는지가 체크 포인트였다. 사흘간 밤낮으로 탐문이 이어지던 중 형사들은 서초동의 한 주점 상무로부터 ‘수상한 사내’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된다.
“혼자 와서 술을 마신 후 술값 문제로 시비가 붙었다고 하더라. 한참 실랑이를 벌이다가 잔뜩 신경질을 내며 돌아갔다는 것이다. 아가씨를 붙여줬다니까 집으로 돌아가진 않았을 테고…. 딱 얘기를 듣는 순간 감이 오더라.”
형사들의 피를 말리며 제자리를 맴돌던 경찰 수사는 사건 당일 최 씨의 행적이 드러나면서 일대 전환점을 맞게 된다. 그러나 심증은 있었지만 물증과 용의자의 범행 진술을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당시 정황을 파악한 형사들이 최 씨를 찾아갔으나 그는 ‘무슨 일로 오셨느냐’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행동했다고 한다. 게다가 머리를 짧게 깎는 등 문제의 주점에서 술을 마시고 모텔에 묵었던 인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변신’한 상태였다는 것.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고 태연히 형사들을 맞는 최 씨의 모습에 이 팀장은 꾀를 냈다고 한다.
“사람이 넷이나 죽었다고 하면 겁이 나서 실토하겠나. 그래서 ‘사실은 인명피해가 없다’ ‘연기만 많이 났지 객실 기물만 약간 태우고 꺼졌다. 그러니 모텔 주인한테 가서 죄송하다고 해라’고 구슬렸다. 그랬더니 최 씨가 ‘진짜 안 죽었냐’라고 몇 번이나 되묻는 거다. ‘그렇다’고 했더니 그제서야 ‘아, 진짜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술김에 그만…’이라며 범행을 순순히 시인하더라.”
문제는 범행에 사용했다는 최 씨의 라이터를 찾는 것이었다. 최 씨가 범행을 시인했어도 증거물이 없으면 그를 범인으로 단정지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특히 최 씨가 진술을 번복할 경우 수사는 원점으로 돌아올 수도 있었다. 최 씨가 모텔에서 나오며 버렸다는 라이터를 찾기 위해 형사들은 모텔은 물론 그 인근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한 환경미화원으로부터 ‘사건 직후 모텔 옆에 라이터가 하나 떨어져 있었는데 사고 난 집에 또 불이 날까봐 땅에 파묻었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 라이터가 범행에 사용된 최 씨의 라이터였다고 한다.
대체 최 씨는 왜 이 엄청난 방화 사건을 저질렀던 걸까. 어처구니없게도 범행은 사소한 시비에서 비롯됐다. 이 팀장의 얘기과 최 씨의 당시 진술을 토대로 본 사건 전모는 이렇다.
우범자나 동일수법 전과자일 거라는 애초 예상과 달리 최 씨는 건축회사 과장으로 근무하던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사건 전날 최 씨는 회사 동료들과 대치동의 한 삼겹살집에서 회식을 했다. 그리고 귀갓길에 나선 최 씨는 거리에서 속칭 ‘삐끼’를 만나게 된다.
“미혼인 최 씨가 ‘27만 원만 내면 양주에 과일안주가 거나하게 나온다. 예쁜 아가씨랑 잘 수 있다’고 꾀니까 술김에 따라갔던 거다.”
하지만 호객꾼의 말과는 달리 술값이 무려 80만 원이나 나왔던 것이 문제였다. 화가 난 최 씨가 따지고 들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술값을 두고 한참 실랑이를 벌이던 최 씨는 몹시 흥분한 상태로 술집을 나섰다. 업소 종업원이 부리나케 달려와 아가씨 한 명과 함께 그를 한 승용차에 태웠다. 이 승용차가 멈춘 곳이 바로 문제의 모텔이었다.
잔뜩 기분이 상한 상태로 투숙한 최 씨. 하지만 처음부터 삐딱한 태도를 보이던 아가씨는 잠자리가 끝나기도 전에 신경질을 내며 나가버렸다.
“술값을 바가지 쓴 것만도 억울하던 차에 모텔비까지 따로 지불했음에도 만족스런 관계를 갖지 못하자 분노가 극에 달했던 것이다. 게다가 업소 측에서 최 씨와 아가씨를 그 모텔에 내려줬으니까 최 씨는 술집과 모텔을 같은 주인이 운영하고 있는 곳이라고 여기게 된 거고.”
만취 상태로 잠이 들었다가 깨어난 최 씨의 컨디션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게다가 전날 거액의 술값을 지불한 것이며 아가씨와의 불쾌한 잠자리 등 ‘악몽’이 되살아났다. 비몽사몽 상태에서 최 씨는 출근을 하기 위해 카운터에 면도기를 부탁했다. 하지만 술이 덜 깼던 탓일까. 최 씨는 면도 도중 면도기 날에 베이고 만다. 이마저 남이 사용하던 면도기를 가져다 준 탓으로 여긴 최 씨는 급기야 분노를 폭발시켰다. ‘이것들이 어제부터 날 가지고 노는구나. 한번 된통 당해봐라’라는 생각에 최 씨는 비어 있는 206호실에 들어가 라이터로 휴지에 불을 붙여 침대시트에 던졌다. 그리고 이어 209호 객실에도 불을 놓고 유유히 모텔을 빠져나와 출근길에 올랐다.
형사들이 경악한 것은 최 씨의 이 같은 범행동기 때문이었다.
“그냥 가기 억울해서 불을 놨다는 것이다. 자기가 당했다는 생각이 든 거지. 술값이랑 모텔비, 아가씨와 잠자리 문제, 면도기까지…. 자기 분에 못 이겨 한순간 돌아버린 것이다. 당시에는 모두 할 말을 잃었었다. 정말 기가 막혔다.”
이 팀장은 이번 사건을 전형적인 ‘묻지마’ 범죄로 규정했다. 특히 최 씨가 홧김에 놓은 불로 인해 4명의 무고한 인명이 희생됐다는 것에 대해선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그 사람도 성인이 아닌가. 감정을 조절할 수 있어야지. 억울하다고 분하다고 불지르고 칼 휘두르면 세상 꼴이 어찌 되겠나. 살인 의도는 아니었다고 해도 여러 사람들이 묵고 있는 모텔에 불을 지르면 무수한 인명피해가 난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지 않나.”
이 팀장은 억울하게 죽은 피해자들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피해자들은 모두 유독가스에 의해 질식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2층에 불을 질렀는데 연기가 위로 올라가니까 사망자는 거의 6층에서 나왔다. 화재시 발생하는 일산화탄소는 두어 모금만 마셔도 의식을 잃고 쓰러질 만큼 유독한 가스다. 얼마나 억울하겠나. 그땐 범인 못 잡으면 평생 발 뻗고 못 잘 것 같더라. 당시 투숙객이 30명 정도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열심히 사는 젊은이들의 피해가 컸다. 우리도 처음에는 젊은이들이 집 놔두고 모텔에 투숙한다는 게 이해가 안 됐는데 모두들 그럴 사정이 있었더라. 특히 사망한 여대생은 그날따라 아르바이트가 너무 늦게 끝나서 귀가를 못한 것이었다. 착하고 성실한 외동딸을 잃었다며 그 학생 아버지가 어찌나 서럽게 울던지….”
한순간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평범한 회사원에서 방화범으로 전락하고 만 최 씨. 그는 수사 과정에서 자신이 홧김에 한 행동으로 4명이나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방화치사상 혐의로 기소돼 현재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는 그는 피해자들에 대한 속죄의 심정으로 장기기증 서약까지 하는 등 참회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