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에 따르면 임 씨는 2001년 자신이 30여 년간 몸담아온 경찰직에서 물러난 후 아내가 해오던 사채업에 뛰어들었다. 집을 판 돈과 자신의 퇴직금 등을 사업에 쏟아 부을 정도로 임 씨는 의욕이 넘쳤다고 한다. 하지만 채무자들로부터 돈을 회수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임 씨 가족은 지독한 생활고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사채업을 하면서 주변에서 거액의 돈을 끌어다 쓴 터라 임 씨 자신도 이자를 감당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실제 임 씨는 검거 당시 5억여 원의 빚을 지고 있었다고 경찰은 밝혔다.
경제사정이 악화되자 임 씨의 아내는 식당일 등을 하면서 가정을 지키려 했다. 하지만 허리띠를 졸라매는 것만으로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다. 임 씨 부부는 점차 싸우는 일이 잦아졌고 끝내 지난 4월 이혼하고 말았다. 임 씨는 이 모든 불행이 빚을 갚지 않는 채무자들 탓이라고 여기게 됐고 결국 채무자들에 대한 깊은 원한이 끔찍한 살인극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지난 7월 8일 임 씨는 자신으로부터 4000만 원(피해자는 1000만 원 주장)을 빌린 채무자 A 씨의 사위 최 아무개 씨(39)가 살고 있는 경기도 광명의 한 아파트로 찾아갔다. A 씨의 딸이 A 씨를 숨겨주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집에는 A 씨의 딸이 혼자 있었다. A 씨가 없는 것을 확인한 임 씨는 그의 딸에게 폭언을 퍼부은 후 돌아갔다.
임 씨는 이틀 후인 10일 오후 다시 최 씨의 집으로 찾아간다. 마침 집에는 A 씨의 딸과 그의 남편인 최 씨가 함께 있었다. A 씨의 딸은 자신의 집안일을 남편에게 감추려 밖에서 문을 두들기는 임 씨에게 ‘다음에 얘기하자’며 가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임 씨는 가지 않고 밖에서 소란을 피웠고 이 소리를 들은 남편 최 씨는 임 씨에게 집으로 들어오라고 권했다.
집 안으로 들어온 임 씨는 최 씨에게 신세한탄을 하기 시작했다. A 씨의 딸이 임 씨에게 음료수를 대접할 정도로 비교적 분위기는 좋았다. 하지만 임 씨가 돌변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잠시 방으로 들어간 A 씨의 딸이 남편의 비명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나와 보니 임 씨가 남편에게 흉기를 휘두르고 있었던 것.
A 씨의 딸은 임 씨를 말리려 그의 팔을 붙잡았지만 오히려 자신의 팔을 흉기에 찔리고 만다. 희미하게 정신이 있던 남편 최 씨는 아내에게 ‘어서 도망치라’고 소리친 후 임 씨의 다리를 붙잡았다. 최 씨에게 다시 몇 차례 흉기를 휘두른 임 씨는 도망간 A 씨의 딸을 찾아 아파트 1층으로 내려왔다. A 씨의 딸은 맞은편 아파트에 몸을 숨겼고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임 씨는 택시를 타고 사라졌다. A 씨의 딸은 남편 최 씨에게 황급히 달려갔지만 이미 최 씨는 숨을 거둔 상태였다.
그로부터 약 4시간 후 임 씨는 서울 방배동의 한 주택가에 나타났다. 또 다른 채무자인 유 아무개 씨(46·회사원)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한 번 역류하기 시작한 임 씨의 분노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이날 유 씨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퇴근 뒤에 집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자신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데 집 안에서 담배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도둑이 든 줄 알고 깜짝 놀라 불을 킨 유 씨는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임 씨를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주인도 없는 집에 어떻게 들어왔느냐’며 소리를 질렀지만 임 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임 씨는 검거된 후 경찰 조사에서 ‘현관문이 열려 있었다’고 진술했다.
이상한 느낌이 든 유 씨는 ‘밖에 나가서 얘기하자’며 임 씨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려 했다. 임 씨도 순순히 따라나서는 듯했다. 하지만 유 씨가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있을 때 뒤에 있던 임 씨가 갑자기 유 씨의 옆구리를 칼로 찔렀다. 놀란 유 씨는 황급히 도망쳤다.
유 씨의 갑작스러운 도주에 당황했던지 임 씨는 유 씨가 밖으로 나간 지 몇 분 후에야 집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하지만 이미 유 씨는 집 근처 주차장에 숨어 경찰에 신고까지 해놓은 상태였다. 임 씨는 유 씨를 발견하지 못하자 이내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행히 유 씨는 심각한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고 경찰은 밝혔다.
경찰은 피해자들의 진술 등을 토대로 임 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공개수배에 나섰다. 하지만 임 씨의 행방은 쉽게 드러나지 않았다. 한 경찰 관계자는 임 씨가 전직 경찰임을 상기시키며 경찰의 수사 방식이나 추적 방법 등을 잘 알고 있어서 수사에 애를 먹는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경찰은 수사과정에서 임 씨가 혼자 살고 있던 양천구 목동 집에서 그에게 살해당한 최 씨의 장모를 포함한 13명의 이름이 적혀 있는 쪽지를 발견했다. 채무자들의 인적사항이 적혀 있는 메모였다. 추가 범행이 이뤄질 것을 우려한 경찰은 이들 채무자들의 신변을 보호하는 한편 임 씨의 뒤를 계속 추적했다. 그러던 중 지난 8월 3일 의정부의 한 숙박업소에 묵고 있던 임 씨를 찾아내 검거할 수 있었다. 그가 살인극을 저지른 지 24일 만이었다.
경찰에 따르면 임 씨는 그동안 서울 청량리, 영등포 등지의 숙박업소를 전전하며 도피행각을 벌였다고 한다.
비록 범인은 검거됐지만 수사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우선 채무자도 아닌 채무자의 사위를 잔인하게 열한 차례나 흉기로 찌른 동기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최 씨의 아내에 따르면 남편과 임 씨는 비교적 차분한 분위기에서 대화를 했는데 갑자기 임 씨가 돌변했다고 한다. 과연 임 씨의 이 같은 돌발적인 행동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별도의 조사와 분석이 필요한 부분이다.
경찰에 따르면 임 씨가 범행 전에 미리 흉기를 준비했다고 하는데 10일 현재 그 흉기를 아직 발견하지 못한 상태다. 임 씨는 흉기를 범죄에 사용한 후 버렸는데 버린 장소에 대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진술하고 있다.
또한 임 씨가 경찰을 그만두기 전인 2001년 이전에도 부인의 사채업을 도와 수금 등의 일을 했는지도 의문으로 남아 있다. 만약 경찰 신분으로 사채업을 했다면 법적인 문제를 떠나 도덕적으로도 비난을 면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한편 기자가 광명경찰서를 찾은 8월 7일 피의자 임 씨의 전 부인이 경찰서에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참고인 자격으로 조사를 받고 나오는 그에게 심경을 묻자 “그럴 경황이 아니다. 나랑 무슨 상관이냐. 우린 사채 같은 것은 안했다”며 황급히 자리를 떴다.
수십 년간 자신이 몸담아온 경찰에 피의자 신분으로 수감된 임 씨. 지난날에 대한 회한이 사무쳤기 때문일까. 그는 경찰 조사에서 “채무자들로 인해 가정이 파탄 났다고 생각했다. 이들을 살해하고 자살하거나 자수할 생각이었다. 피해자들에게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