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날씨 때문인지 발견 당시 김 씨의 사체는 한창 부패가 진행 중이었다. 얼굴과 목 부위에 심한 상처가 있고 쇄골이 완전히 뭉개져 있는 것으로 보아 타살된 것으로 추정됐다. 별다른 단서도 없이 답보 상태에 머물던 수사는 한 젊은이의 우연한 제보로 실마리가 풀리게 된다. 수사 결과 범인은 김 씨를 우연히 만나 하룻밤을 즐긴 20대 청년으로 밝혀졌는데 ‘성’의 대가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던 중 살인까지 저지른 것이었다.
이번에 도봉경찰서 청문감사실 박상춘 팀장이 전하는 이야기는 바로 이 여인의 미스터리한 죽음과 소설 같은 수사과정에 얽힌 것이다. 도봉경찰서 강력반 근무 당시 이 사건을 담당했던 박 팀장은 다음과 같은 소회를 밝혔다.
“하마터면 미제로 남을 뻔한 사건이었다. 우연히 재회한 친구에게 건넨 명함이 사건을 푸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 만에 하나 친구 아들의 얘기를 가볍게 흘려들었더라면 여인의 죽음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었을지도 모른다. 형사란 항시 어떤 사소한 정보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고 작은 가능성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준 사건이었다.”
김숙희 씨의 사체가 발견되자 화성경찰서에는 비상이 걸렸다. 안 그래도 한 해 전 화성에서 사체로 발견된 여대생 사건이 미제로 남아 있는 상황에서 또 한 건의 여성 변사사건이 벌어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타지에 살다가 화성으로 이주했던 김 씨가 처참한 주검으로 발견된 까닭은 대체 무엇일까. 특히 사체가 발견된 지역은 인근에 사는 주민들도 거의 알지 못하는 외진 길이었다. 경찰은 화성 연쇄살인사건과의 연관성에도 무게를 두고 수사를 진행했으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수사는 제자리에 머물렀다.
경찰은 김 씨의 남편을 포함한 주변인물을 상대로 일차적인 탐문수사에 들어갔다. 동시에 김 씨의 휴대폰에 저장된 번호들을 토대로 평소 김 씨와 자주 접촉한 인물들의 행적을 추적했다. 수사 결과 한 가지 의외의 사실이 파악됐다. 피해여성 김 씨가 채팅에서 알게 된 남성들로부터 돈을 받고 하룻밤을 같이 보내는 일명 ‘조건만남’을 자주해온 인물이라는 점이었다. 이는 수사에 매우 중요한 단서였다. 김 씨의 특이한 라이프스타일로 미루어보아 김 씨가 신원이 불확실한 남성들과 자주 접촉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변을 당했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경찰은 김 씨와 만남을 가졌던 남성들을 용의선상에 올리고 탐문수사를 진행했는데 그들의 수만도 무려 30~40명에 달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녀와 조건만남을 가졌던 남성들에게서는 아무런 혐의점도 발견되지 않았다. 사체는 있는데 용의자는 없는 미스터리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생각지도 못했던 일로 실마리가 풀리게 된다. 다음은 박 팀장의 얘기.
“7월 중순경 한 20년 만에 우연히 고향친구를 만나게 됐다. 어찌나 반갑던지 명함을 주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뒤 헤어졌다. 며칠 후 주말에 모처럼 집에서 쉬고 있는데 그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친구의 얘기인즉슨 이랬다. 나를 만나고 집에 돌아가서 내 명함을 거실에 놔뒀는데 아들이 그걸 보더니 흠칫하더라는 거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아버지 친구 중에 강력반 형사도 있어요?’라고 묻더란다. 그래서 친구가 자랑스럽게 ‘그럼!~ 강력반 팀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고향친구가 있지’라고 말해줬다고 한다. 그러니까 아들이 안절부절못하며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망설이더라는 거다. ‘아버지하고 친한 사람이에요? 믿을 만한 분이에요? 상담 좀 해도 돼요?’라고 몇 번씩이나 묻는 등 아들의 태도가 영 석연치 않았다고 한다. 친구가 아무래도 아들한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으니 한번 만나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보더라.”
박 팀장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곧바로 친구의 아들인 김동현 씨(가명·24)를 만났다고 한다. ‘아버지와 절친한 친구니 뭐든 거리낌 없이 말해보라’는 박 팀장의 설득에 김 씨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고 한다. 이어지는 박 팀장의 얘기.
“7월 6일 새벽 3시경 (김)동현이에게 단짝 친구인 정원석(가명·24)으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고 한다. 정원석은 무척 당황한 목소리로 ‘차 사고가 났다’며 도움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원석이 동현이를 부른 이유는 단지 차 사고 때문만은 아니었다고 한다. ‘사실은 내가 어떤 여자를 죽였다’고 털어놓았다는 거다. 우연히 만난 여자와 다툼 끝에 우발적으로 여자를 살해하고 겁이 나 현장을 빠져나왔다는 거였다. 정원석은 동현이에게 조금 전에 있었던 정황을 털어놓으며 아무래도 찜찜하니 여자를 버려두고 온 장소에 다시 한 번 같이 가보자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둘은 오전 5시경 정원석이 얘기한 장소에 같이 같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여자가 보이지 않더란다. 불과 몇 시간 만에 사체가 사라지니 정원석으로는 정말 환장할 노릇이 아니었겠나. 둘은 근방을 샅샅이 뒤졌으나 끝내 여자를 찾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고 한다.”
김 씨의 얘기를 들은 박 팀장은 한동안 깊은 생각에 빠졌다. 사체가 발견되지 않은 이상 섣불리 살인사건으로 단정 지을 수도 없는 노릇. 또 이렇다 할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정 씨가 순순히 범행을 인정할 리도 만무했다.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박 팀장은 그 무렵 경기도 일대에서 발생한 변사사건들을 취합해 일일이 분석하는 작업을 벌였다. 다음은 박 팀장의 얘기.
“아무리 젊은 애들 얘기라지만 그냥 흘려들을 수 없었다. 술김이었다 해도 빈말로 ‘사람을 죽였다’고 할 리가 있겠나. 변사사건들을 뒤적이던 중 화성에서 한 여성의 변사체가 발견된 사건을 찾아냈다. 피해자가 30대 여성이란 점도 그랬고 사체가 발견된 장소와 날짜가 정원석이 얘기한 것과 얼추 비슷했다. 수사보고서에도 ‘타살 혐의점이 있다’고 나와 있었지만 수사에 별다른 진척이 없던 상황이었다. 당시 화성경찰서에서는 이 여성과 채팅으로 만난 남성들을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수사를 진행 중이었던 것이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나는 이 사건이 정원석과 분명 연관이 있다고 판단했다.”
박 팀장이 조사한 결과 회사원이었던 정 씨는 평소 생활이 성실해 상사나 동료들로부터 평이 좋았다. 당시 정 씨는 시골에서 상경한 여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전과 하나 없는 착실한 청년이었다는 것. 적어도 사람을 죽이고 태연히 생활할 수 있는 파렴치한으로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박 팀장의 얘기다.
하지만 박 팀장이 수집한 여러 정황증거상 정 씨는 유력한 살인용의자였다. 특히 박 팀장은 회사 뒤뜰에 세워둔 정 씨의 흰색 승용차를 보고 정 씨가 범인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고 한다. 이어지는 박 팀장의 설명.
“사건 당일 의문의 흰색 차량을 목격한 사람이 있었다. 사체가 발견된 장소 맞은편에는 콩나물공장이 있었는데 공장 사장이 우연히 정 씨의 흰색 차량을 본 것이었다. 감식반을 동원해 정원석의 차량을 수색하자 조수석 의자 밑에서 김숙희 씨의 슬리퍼 한 짝이 발견됐다. 미제로 남아 있던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운명의 그날 밤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빼도 박도 못할 결정적인 증거 앞에서 정 씨가 눈물을 흘리며 털어놓은 얘기는 이랬다.
7월 6일 자정이 지난 시각 정 씨는 회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날따라 술을 많이 마신 정 씨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서둘러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정 씨 앞에 한 여성이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 걸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바로 김숙희 씨였다. 김 씨는 채팅으로 만난 남성과 사귀다가 들통 나 가출한 뒤 화성의 원룸에서 살던 처지였는데 그날 밤도 채팅을 통해 한 남성과 ‘조건만남’을 갖고 나오던 길이었다. 그런데 ‘관계’를 갖던 중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 등으로 상대 남성과 싸우게 됐고 결국 모텔에서 나와 울면서 집으로 가던 중이었다고 한다. 다음은 박 팀장의 얘기.
“야심한 밤 조용한 골목길을 두 남녀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가고 있었던 거다. 만취상태였던 정원석은 그날따라 무슨 용기였던지 ‘아줌마’ 하며 김숙희 씨를 불러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웬일인지 김 씨가 정원석을 순순히 따라오더라는 거다. 정원석은 한번 즐길 생각으로 김 씨를 집으로 데려갔는데 다 큰 여동생이 있는 것을 보고 김 씨가 기겁을 하며 뛰쳐나왔다고 한다. 할 수 없이 정원석은 차에 김 씨를 태우고 2㎞ 정도 떨어진 공원으로 가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고 한다. 그리고 여관비도 없던 차에 즉흥적으로 차 안에서 관계를 가졌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고분고분하던 김 씨의 태도가 ‘관계’ 후 돌변한 것이었다. 이어지는 박 팀장의 얘기.
“집으로 가려는데 김 씨가 갑자기 돈을 요구했다고 한다. 놀란 정원석이 ‘무슨 돈을 달라고 하느냐’고 따지자 김 씨가 ‘당신, 지금 나 강간했어. 게다가 음주운전까지 했잖아. 당장 150만 원 내놔’라고 했다는 거다. 정원석이 돈이 없다고 하자 김 씨는 ‘그럼 100만 원만 내놔라. 그것도 싫으면 당장 경찰서로 가든지’라며 막무가내였다고 한다. 정원석은 졸지에 강간범으로 몰리는 상황에 처하게 됐던 거다. 돈은 없고 경찰서에 갈 생각을 하니 두렵고 정원석으로선 미칠 노릇이었을 거다.”
당시 김 씨는 정 씨가 도망칠 것에 대비해 반강제로 휴대폰 번호를 물었다고 한다. 정 씨는 ‘잘못 걸렸다’는 생각에 휴대폰 번호 끝자리를 거짓으로 알려줬다고 한다. 그런데 김 씨가 그 자리에서 전화를 걸어보면서 싸움이 더 커졌다. 다음은 박 팀장의 얘기.
“정원석은 어떻게 해서든 그 자리에서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김 씨가 정원석을 붙잡고 놔주질 않았던가보다. 이에 격분한 정원석은 그곳에서 7㎞ 떨어진 한적한 농로로 차를 몰았다고 한다. 그 길은 과거 정원석이 대리운전을 하면서 익혀뒀던 곳으로 일반인들은 알지 못하는 외진 길이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 차를 세워놓고도 둘은 계속 실랑이를 했다고 한다. 정원석이 ‘서로 합의하에 즐긴 것 아니냐’고 하면 김 씨는 ‘엄연한 강간이니 고소하겠다’고 맞섰다는 것이다. 한참을 다투던 중 정원석은 김 씨의 휴대폰을 빼앗아 땅에 내팽개치고 몸싸움을 벌였다고 한다. 김 씨의 반항이 점점 거세지자 결국 분을 삭이지 못한 정원석이 김 씨의 목을 졸라 살해하고 말았던 것이다.”
정 씨는 김 씨를 살해한 후 인근 농로에 사체를 유기했다. 그리곤 무조건 현장을 빨리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급하게 차를 몰다가 차가 전복되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정 씨가 친구 김 씨에게 차 사고를 당했다고 얘기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하룻밤의 실수로 인해 평범한 회사원에서 흉악한 살인범이 돼버린 정 씨. 경찰 조사과정에서 정 씨는 ‘당시 상황이 너무 당황스러웠다. 나를 강간범으로 몰아세우며 돈을 내놓지 않으면 감방 가야 된다고 하는데 무서웠다. 당시에는 무조건 그 여자로부터 벗어나야 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정말 죽일 생각은 없었다’며 통곡했다고 한다. 살인 혐의 등으로 기소된 정 씨는 법원으로부터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