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야쿠자 조직에 들어가 일하게 된 한국 폭력배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깡패수업>의 한 장면. | ||
지난 12월 21일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와 육군본부 고등감찰부는 일본에서 유흥업소 업주인 한국인을 살해하고 사체를 유기한 혐의로 한국인 야쿠자 김 아무개 씨(22)와 고 아무개 씨(33)를 구속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이들에게 살해를 지시한 혐의로 일본 야쿠자 조직의 간부 이 아무개 씨(40)도 함께 구속했다고 전했다.
김 씨와 고 씨는 2006년 11월 중순 야쿠자 간부 이 씨로부터 “유흥업소 주인 박 아무개 씨(33)를 살해하라”는 지시를 받고 박 씨를 살해한 뒤 인근 강에 사체를 유기한 혐의를 받고 있다. 특히 김 씨의 경우 지난 6월 명품시계 거래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던 시계감정사 A 씨(53)의 ‘실종’ 사건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향후 수사 결과가 주목된다. 일본에서 벌어졌던 한국인 야쿠자들의 잔혹한 동포살인극의 전모를 추적했다.
지난 8월 서울광역수사대(서울광수대)는 B 씨(32)로부터 일본의 한국인 야쿠자들의 범죄에 대한 충격적인 첩보를 입수했다. B 씨에 따르면 사건의 개요는 이러했다.
B 씨는 ‘일본 야쿠자들이 소유한 중고 명품시계 거래를 주선해준다’는 한국인 야쿠자 김 씨의 이야기를 듣고 시계감정사 A 씨 등과 함께 지난 6월 중순 일본으로 입국했다. 하지만 김 씨의 제의는 이들을 유인하기 위한 덫에 불과했다. 김 씨는 현지에서 A 씨와 B 씨 등을 협박해 현금 1억 4000만 원 상당의 금품을 빼앗았다. 이에 피해자 A 씨와 B 씨가 수사기관에 신고하려 하자 김 씨는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아는 야쿠자 간부에게 이들의 입을 막아달라고 청탁한다. 결국 A 씨는 일본 이토시의 한 펜션에서 야쿠자들에 의해 총으로 살해됐다. 현장에 같이 있던 B 씨 역시 총상을 입었으나 2층 창문으로 도주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B 씨는 A 씨의 사체가 아직 발견이 되지 않았지만 일본 경찰에서 더 이상 수사를 하지 않고 있다며 한국 경찰이 사건을 해결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이와 함께 야쿠자 김 씨가 이미 일본에서 유흥업소를 운영하던 한국인 박 씨를 살해해 인근 토네강에 암매장했다는 정보도 제공했다.
첩보는 신빙성이 높아 보였지만 현실적으로 사건 수사에는 걸림돌이 적지 않았다. 일본 경찰과의 공조 문제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울광수대는 타국에서 억울하게 죽은 한국인들을 위해서라도 사건을 미뤄둘 수 없었다. 사건을 담당했던 폭력2팀 윤희정 3반장은 당시 수사팀이 ‘어렵겠지만 타지에서 죽은 사람들의 시신이라도 찾아서 가족들의 한을 풀어주자’는 데 뜻을 같이했다고 전했다.
우선 ‘직접 증거’인 박 씨의 사체를 찾아내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서울광수대는 토네강에 암매장됐다는 박 씨의 사체를 찾는 일에 주력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동안 강 근처에서 발견된 사체들의 지문을 일일이 대조하는 방법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일본 경찰로부터 사체 자료를 넘겨받아 수많은 지문을 대조한 결과 드디어 박 씨의 지문과 일치하는 사체를 찾을 수 있었다. 박 씨 사체의 발견과 함께 수사도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수사 과정에서 파악된 사건의 내막은 충격적이었다. 비극은 현지의 유흥업주 박 씨와 일본 내 한인사회를 주름잡던 한국인 야쿠자 이 씨의 갈등에서 비롯됐다. 일본 야쿠자의 지역조직 간부를 맡고 있던 이 씨는 신주쿠 인근에서 호스트바를 운영하던 박 씨가 평소 인사도 하지 않고 자신의 말을 듣지 않자 눈엣가시처럼 여기게 됐다. 한국에서 한때 폭력조직에 몸담았던 박 씨는 지인의 요청으로 2003년 10월경 일본으로 건너왔는데 호스트바를 운영한 지는 얼마 안 된 상태였다. 두 사람의 신경전이 이어지던 어느 날 결국 이 씨는 부하들을 동원해 ‘왜 나를 무시하느냐’며 박 씨를 감금해 폭행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박 씨는 함께 생활하던 김 씨에게 ‘이 씨를 살해하라’고 지시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김 씨는 이 사실을 당시 이 씨 밑에서 일하던 고 씨에게 알리고 말았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이 씨는 김 씨와 고 씨에게 “신주쿠 일대의 이권을 보장해주겠다”며 반대로 박 씨를 살해하라고 지시하게 된다. 결국 이권에 눈이 먼 김 씨 등은 2006년 11월 30일 새벽 일본 오타시의 집에서 자고 있던 박 씨의 얼굴에 끓는 물을 붓고 발버둥 치던 박 씨의 목을 유도복 띠로 졸라 살해한 다음 사체를 이불에 싸서 강에 던져 버렸다. 사체를 싼 이불이 물을 잔뜩 먹으면 강 위로 쉽게 떠오르지 않는 점을 이용해 치밀하게 시체를 유기한 것이다.
고 씨는 범행 후 이 씨와 함께 그해 12월 5일 한국으로 귀국해 수도권 일대에서 도피 생활을 해왔다. 자신의 주민등록상 주거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제3의 은거지에서 각자 생활했던 것. 이 때문에 피의자 검거를 위해 이 씨와 고 씨의 주소지 위주로 잠복근무를 펼쳤던 형사들은 한동안 아무런 소득도 얻을 수 없었다. 그러다 피의자들의 이메일을 확보해 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애인의 뒤를 추적한 결과 이 씨와 고 씨를 체포할 수 있었다고 한다.
피의자 김 씨의 경우 일본에서 또 다른 범행을 저지른 뒤 지난 6월에 귀국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서울광수대는 김 씨가 지난 9월에 입대해 현역 이병으로 군복무를 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육군본부와 공조수사를 통해 그를 검거할 수 있었다.
경찰 조사과정에서 피의자 김 씨와 고 씨는 박 씨를 살해한 혐의를 인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살인교사 혐의를 받고 있는 야쿠자 간부 이 씨는 살해 지시를 한 적이 없다며 혐의를 부인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서울광수대 관계자에 따르면 수사 초기엔 피의자들의 인적사항을 파악하는 일부터 난관에 봉착했었다고 한다. 제보자가 아는 것은 피의자 김 씨의 이름뿐이었고 나머지 인적사항은 전혀 알지 못했던 것. 서울광수대는 다양한 수사기법을 활용해 김 씨의 인적사항을 확인한 후 공동피의자인 이 씨와 고 씨의 인적사항까지 확보해 이들을 추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한국인 야쿠자’ 사건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피의자 김 씨가 깊숙이 관계돼 있는 것으로 보이는 시계감정사 A 씨 ‘실종’사건이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한국 경찰은 일본 경찰과의 공조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수사에 애를 먹고 있다. 그간 일본 경찰 측에서는 ‘사체가 발견되지도 않았다’는 이유 등으로 수사 협조에 난색을 나타내왔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제보자 B 씨가 A 씨와 함께 총을 맞았다고 진술한 펜션을 예약한 휴대폰 번호가 피의자 김 씨의 것으로 드러나면서 인터폴을 통한 한·일 경찰의 수사공조가 가능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사건을 담당한 윤희정 반장은 “현재 피의자들의 일본 현장검증까지 신청해 놓은 상태지만 일본 경찰은 소극적이다. 아마도 한국 경찰이 사건을 해결한 것에 자존심이 상한 것 같다”며 “박 씨 살인사건이 마무리 되는 대로 A 씨 실종 사건을 일본 경찰과 함께 최대한 빨리 해결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윤구 기자 trus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