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차 요구 거부한 술집 종업원들을 무참히 살해한 룸살롱 내부의 모습. 연합뉴스 | ||
이번에 강서경찰서 교통시설계 오병산 반장이 전하는 사건은 바로 18년 전 우리 사회를 발칵 뒤집어놨던 일명 ‘샛별룸살롱 살인사건’이다. 당시 이 사건은 범인을 검거하기 위해 출동한 경찰들끼리 총격전이 벌어지는 아찔한 상황도 있었고, 사건의 여파로 여러 명의 경찰 책임자들이 옷을 벗기도 했다. 또 막판엔 범인의 언론플레이로 엉뚱한 긴장감이 조성되기도 했다. 경찰을 가장 곤혹스럽게 했던 사건 중의 하나로 꼽히는 ‘샛별룸살롱 살인사건’의 수사백서 속으로 들어가봤다.
피해자는 총 4명. 10대 남녀 두 쌍이었다. 조사결과 피해여성은 샛별룸살롱 종업원으로 일하던 강지은 양(가명·15)과 김아름 양(가명·18)으로 판명됐는데 옷이 모두 벗겨져 있었다. 피해남성은 당구장 종업원과 웨이터로 일하고 있던 사람들로 모두 16세로 강 양과 김 양과는 애인 사이였다. 수사팀이 경악한 이유는 피해자 4명을 살해한 범인의 수법이 너무도 잔인했기 때문. 실제로 당시 현장을 발견한 업소 사장은 “바닥에 낭자한 피 때문에 슬리퍼가 떨어지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진술했다. 이어지는 오 반장의 얘기.
“가게 내부부터 출입구까지 벽면에는 온통 사람의 피묻은 손바닥 자국이 찍혀 있었는데 피해자들이 흉기에 찔린 상태에서 얼마나 필사적으로 도망 가려했는지를 짐작케했다. 현장 상황과 피해자들의 상태를 종합해볼 때 범인은 가게 밖으로 나와 계단을 타고 필사적으로 도망가는 피해자들을 다시 가게 안으로 끌고 들어가 살해한 셈이었다.”
수사팀은 지문과 족적, 머리카락 등 현장에 남겨져 있는 범인의 흔적들을 수집하는 동시에 그 일대 동종전과범들을 상대로 일일이 탐문수사를 실시했다. 그 와중에 수사팀은 업소 사장으로부터 짐작이 가는 인물이 있다는 중요한 얘기를 듣게 된다. 사건 당일 밤 가게에 왔던 20대 초반의 청년 두 명이 있었는데 교도소에서 출소한 사실을 얘기했으며 호남지방 사투리를 썼다는 것이었다. 다음은 오 반장의 얘기.
“문제의 청년들은 강 양과 김 양을 옆에 앉혀놓고 같이 술을 마셨는데 종업원들에게 ‘2차’를 요구했다고 한다. 강 양 등이 거절하자 이들은 온갖 행패를 부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다못한 사장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까부느냐’며 잔뜩 겁을 줬고 이들은 결국 쫓겨나다시피 가게문을 나섰는데 나가면서 목을 칼로 긋는 시늉을 하더라는 것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구로동에서 ‘물장사’를 해오며 온갖 못볼 꼴을 다 봐온 사장에게 이들의 행동은 그저 풋내기 양아치들의 객기 정도로밖엔 여겨지지 않았다. 상황이 정리되자 사장은 강 양 등에게 ‘가게 정리하고 일찍 들어가라’고 당부한 뒤 퇴근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이 극도로 위험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동종전과범들을 상대로 끈질긴 탐문수사를 진행하던 수사팀의 레이다에 수상한 인물들이 걸렸다. 그해 1월 4일 전라남도 광주의 한 술집에서 종업원을 살해하고 달아난 혐의로 전국에 지명수배령이 내려져 있는 청년들이었다. 바로 조동필(가명·24)과 김재석(가명·22)이었다. 경찰은 곧 이들의 수배전단지를 업소 사장에게 보여주었고 업소 사장은 ‘저녁에 행패를 부렸던 청년들이 맞다’고 확인해 주었다.
이들이 사건 직전까지 머물고 있던 가리봉동의 벌집촌은 샛별룸살롱과 1km 남짓한 거리에 있었고 사건 직후 이들이 행적을 감춘 사실까지 확인됐다. 이들을 룸살롱 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본 수사팀은 둘의 동선을 추적해나가는 동시에 이들의 주변인물들을 상대로 탐문수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조동필이 수원의 뉴아리랑 호텔 인근 공중전화에서 친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에 이른다. 또 조동필의 애인으로부터 “2월 28일 이들과 함께 대전에 갔다가 평택 부근에서 내렸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다음은 오 반장의 얘기.
“하지만 정작 평택에 가보니 범인들이 숨을 만한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이들이 은신할 만한 곳에 대해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샛별룸살롱 살인사건이 발생할 당시 조동필과 김재석은 ‘벌집’이라 불리는 가리봉동의 다세대주택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당시 벌집촌은 극빈층의 사람들과 공장 노동자들을 포함해 신원이 불확실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으로 옆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몰랐다. 신원을 숨기고 살기에 안성맞춤이었던 곳이다. 여러 가지 상황들을 종합한 결과 우리는 이들이 평택인근의 수원에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수원시 권선구 세류동에는 가리봉동 벌집과 비슷한 셋방들이 밀집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조동필이 도피 도중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던 뉴아리랑 호텔 역시 세류동에 위치해 있었다.”
살인혐의로 수배를 받고 있는 이들이 쉽게 이 일대를 빠져나갔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수사팀은 세류동 일대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이들의 행적을 추적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를 찾아내기에 이른다. 다음은 오 반장의 얘기.
“탐문조사 결과 김재석이 평소 ‘정주연’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김재석은 만화나 비디오테이프를 빌릴 때도 자신의 본명 대신 ‘정주연’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더라. 이들이 세류동의 벌집촌에 은신해 있다고 확신한 나는 그 일대의 부동산 중개업소를 일일이 찾아다녔다. 그리고 최근 계약한 사람 중 ‘정주연’이라는 인물이 있었는지에 대해 조사했다. 아니나다를까 ‘정주연’으로 계약된 건이 나왔다. 중개업자에게 김재석의 사진을 보여주자 그는 ‘틀림없다’고 대답했다.”
마침내 3월 5일. 수사팀이 세류동의 셋방을 덮쳤다. 하지만 그곳에는 조동필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고 잠시 외출했다 돌아오던 김재석은 조동필이 검거되는 장면을 보고 그 길로 잠적해버렸다.
▲ 당시 범인들의 지명수배 전단지. | ||
심지어 김재석은 당시 서울지방경찰청 형사과장으로 수사 총지휘를 맡고 있던 최중락 전 총경과도 직접 통화를 하는 돌출행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도 그는 ‘자수’ 권유를 뿌리치고 끝까지 모든 원인을 사회 탓으로 돌리는 발언을 했다. 김재석은 결국 소재를 파악하고 급습한 경찰에 의해 검거됐다. 경찰의 조사 결과 드러난 이들의 삶은 한마디로 범죄의 연속이었다. 전남 나주 출신인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고향 선후배로 친하게 지내온 사이였다. 그러나 가정과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이들은 10대 후반의 나이에 특수강도 혐의로 구속, 3년을 복역하고 1989년 12월 한날 한시에 출소하게 된다.
출소 후 이들은 처음엔 ‘각자의 길’을 가다가 ‘3000만 원을 모아서 술집을 차리자’며 또다시 뭉치게 된다.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3000만 원만 모으자’는 계획 아래 과감한 강도행각을 벌이던 두 사람은 단순히 돈을 뺏는 것을 넘어 사람의 목숨까지 앗아가는 지경에 이른다.
첫 번째 살인이 일어난 날은 90년 1월 2일이었다. 야심한 새벽 광주의 한 술집에서 술을 마시던 두 사람은 동석한 여종업원이 말이 너무 많은 데다가 ‘범죄형으로 생겼다’ ‘마음에 안든다’는 등 모욕적인 발언을 하는 것에 격분, 옷을 모두 벗기고 흉기로 가슴 부위를 수차례 찔러 살해하고 만다. 또 종업원의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온 술집 여사장에게도 흉기를 휘둘러 중상을 입히고 달아났다.
1월 19일 살인혐의로 전국에 지명수배령이 떨어지자 경찰의 눈을 피해 서울로 올라온 두 사람은 당분간 몸을 사리기로 합의하고 가리봉동에서 은신생활에 들어갔다. 다음은 오 반장의 얘기.
“하지만 이들의 ‘휴식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준수한 외모를 지니고 애인까지 있었던 조동필과 달리 김재석은 상당히 거칠고 날카로운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 조동필이 동생 김재석의 외로운 처지를 모를리 없었다. 결국 1월 28일 밤 두 사람은 집 인근에 위치한 샛별룸살롱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각자 한 명씩 종업원을 끼고 앉아서 술을 마셨다. 그리고 얼마 후 애인이 없던 김재석이 종업원에게 ‘2차’를 요구했다. 그런데 종업원이 완강히 거절하는 게 아닌가. 술집 종업원에게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두 사람은 속된 말로 ‘꼭지’가 돌았다고 했다. 이들은 ‘2차 안나가는 술집X이 어디 있냐. 접대부 주제에 왜 비싼 척하냐’며 행패를 부렸다. 한동안 소란을 피우고 종업원들이 울고불고 하니까 룸살롱 사장이 달려왔다. 결국 사장의 기세에 눌린 두 사람은 붉으락푸르락해서 업소를 나왔다.”
씩씩거리며 룸살롱을 나온 두 사람은 화를 삭이지 못한 채 길거리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화는 가라앉지 않았다. 술집 사장의 으름장과 여종업원들이 비웃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결국 택시를 타고 가리봉동의 월셋방으로 간 이들은 회칼을 준비해서 샛별룸살롱으로 향했다.
새벽 1시 30분경. 한편 룸살롱 안에서는 종업원과 그들의 남자친구 총 4명이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때 가게 문이 벌컥 열렸다. 회칼을 들고 들어온 사내들은 바로 몇 시간 전 행패를 부리다 쫓겨나갔던 조동필과 김재석이었다. 이들은 룸 안의 피해자들을 한 방에 몰아넣고 피의 향연을 벌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범행은 4명을 무참히 살해한 것이 다가 아니었다. 이들은 룸살롱 살인사건 전후에도 여성 손님들만 있는 고급 미용실을 습격해 옷을 모두 벗기고 돈을 강탈하는 강도행각을 벌여온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은 서울 강남을 포함해 경기도 일대의 미용실에서도 강도행각을 벌여왔는데 도주를 수월하게 하기 위해 전철역과 10분거리 내에 있는 미용실들을 타깃으로 삼았다는 것이 오 반장의 얘기다.
또 이들은 경찰에게 거짓제보를 해서 아찔한 상황을 연출하기도 했다. 이들이 ‘새벽 3시 영등포경찰서 뒤편에 있는 중앙로에서 접선하기로 되어 있으니 이때 체포하라’는 가짜 제보를 흘려 출동한 구로서와 남부서 관할 경찰들이 서로 상대를 오인, 경찰끼리 총격전을 벌인 것.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이들의 농간에 당한 경찰로서는 분통이 터질 노릇.
또 이들의 미용실 강도사건을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책임자들도 줄줄이 옷을 벗어야 했다. 당시 김태호 전 내무부 장관이 이 사건과 관련, 직위해제시킨 사람만도 서울 중부서장과 형사과장을 포함해 관악서장과 형사과장, 부천서 형사과장 등 여러 명이었다. 5명을 살해하고 37건에 달하는 특수강도 행각을 벌인 이들은 사형을 확정받고 91년 겨울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