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는 점은 김 씨가 철저하게 ‘이중생활’을 하며 지내왔다는 사실이다. 김 씨는 평소 온 몸을 명품으로 도배하고 고급차량을 타고 다녔는가 하면 해외골프여행도 즐기는 등 ‘재벌’처럼 행세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경찰은 그를 유력한 용의자로 압축해 놓고서도 ‘과연 이런 사람이 범인이 맞을까’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범행 현장에는 김 씨가 범인임을 확실히 말해주는 ‘결정적 증거’가 있었다고 한다. 낮에는 ‘재벌’ 밤에는 ‘도둑’으로 살아왔던 기막힌 절도범의 이중생활을 들여다봤다.
김 씨(48)가 서울 강남, 서초 지역의 절도행각을 시작한 것은 지난 2006년 초부터다. 경찰에 따르면 절도전과 7범인 김 씨가 처음 절도로 경찰에 검거된 것은 그의 나이 15세 때. 이때부터 절도를 평생의 ‘업’으로 살아온 셈이다.
김 씨는 지난해 10월 부산에서 절도혐의로 체포됐지만 고액의 수수료로 변호사를 선임해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난 적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김 씨의 물건을 사들였던 ‘장물아비’ 황 아무개 씨는 당시 구속돼 현재까지 수감돼 있다.
조사결과 김 씨는 주로 낮은 층의 사무실을 골라 외벽을 타고 올라가 사무실 창문을 뜯고 침입한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에 따르면 김 씨는 171cm 정도의 키에 상당히 날렵한 체구의 소유자로 2~3층 정도의 벽은 손쉽게 타고 올라간다고 한다.
경찰은 또한 김씨가 범행현장에서도 여유를 보이며 매우 대담한 행동을 보였다고 전했다. 절도범들은 금품을 훔친 뒤 서둘러 현장을 벗어나는 것이 보통인데 김 씨는 범행현장에서 커피도 타 마시고 음식을 먹는 등 여유를 부렸다는 것.
현장에서 주로 발견된 것은 초콜릿과 영양갱 껍질 등 열량이 높은 음식물이었다. 경찰은 “산을 오르다 힘들 때 당도가 높은 음식을 먹는 것처럼 배관 등을 통해 건물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김 씨도 고열량 음식을 현장에서 먹는 것이 버릇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특이한 행동 탓에 김 씨가 강남지역에서 범행을 한 것으로 알려진 26곳의 절도현장 중 무려 19곳에서 그의 DNA가 나왔다.
그러나 결정적 단서인 DNA가 발견됐음에도 불구하고 수사는 한동안 난항을 겪었다고 한다. DNA만 갖고 범인을 추적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 사건의 실마리를 제공한 것은 김 씨가 훔친 장물이었다. 김 씨가 다녀간 이후 사라진 물건은 대부분 노트북이었다. 경찰은 이 같은 사실을 토대로 용산 전자상가, 테크노마트 등에 중고 노트북을 판매하러 자주 오는 고객들에 대해 탐문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김 씨가 경찰의 수사 선상에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 것은 지난 8월. 김 씨가 중고 매매상에 주기적으로 중고 노트북을 판매하러 온다는 첩보를 입수한 경찰은 그의 전과기록을 파악하고 그가 이미 1월 부산에서 똑같은 혐의로 재판을 받은 적이 있다는 사실까지 알아냈다.
그러나 김 씨가 평소 온몸을 명품으로 치장하고 고급 대형차를 타고 다니는 등 재벌과 다름없는 생활을 해왔기 대문에 ‘과연 이 사람이 노트북을 훔쳐파는 좀도둑이 맞을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고 한다.
이때 결정적 증거가 된 것이 바로 사건현장에 남아있던 DNA. 경찰은 한 상인에게 김 씨가 판매했다는 노트북을 입수해 그곳에 남아있던 김 씨의 DNA와 현장에서 발견된 범인의 DNA를 대조해달라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의뢰했다. 얼마 후 국과수에서 나온 검사 결과는 ‘일치’였다. 결국 지난 22일 김 씨는 상습절도혐의로 경찰에 긴급 체포됐고 그의 이중생활도 막을 내리고 말았다.
경찰조사가 시작되면서 김 씨의 재벌행세도 ‘속빈 강정’이었다는 사실도 곧 밝혀졌다. 김 씨는 지난 2004년 이혼했고 그의 아들(15)은 지방의 한 특수학교에서 혼자 지내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김 씨는 행색과 달리 강남의 한 지하 쪽방에서 혼자 생활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김 씨가 훔쳤던 물건은 약 1억 180만 원어치가 된다고 한다. 하지만 피해를 당한 기업들에서는 “노트북에 담겨있던 내부 정보를 어떻게 했느냐가 문제다. 외부로 빼돌렸을 경우 수백억 원에 달하는 피해를 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경찰은 현장에서 좀처럼 검출되지 않는 DNA가 무려 19곳에서 검출된 것으로 볼 때 알려지지 않은 김 씨의 범행이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 경찰은 “드러난 것보다 드러나지 않은 것이 더 많을 것”이라며 “다 합치면 수백 건이 될 것”이라는 분석까지 내놓았다. 이번 사건으로 발생한 실제 피해 규모는 수사가 좀더 진행돼봐야 알 수 있을 전망이다.
김장환 기자 hwan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