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사람이 그럴 줄은 몰랐다.”
안 씨에게 3억 원가량을 맡겼다가 모두 날린 피해자 A 씨의 하소연이다. A 씨는 “호감 가는 외모에 말도 잘했다. 거기다가 회사 보험왕 출신이라 안 씨를 믿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는 안 씨로부터 속은 피해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온 진술이란 게 경찰의 설명이다.
1999년 보험업계에 뛰어든 안 씨는 이처럼 특유의 말솜씨와 뛰어난 외모로 보험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2004년과 2005년엔 회사에서 가장 많은 보험을 판매한 직원에게 수여하는 상을 받았다. LIG손해보험 관계자는 “보험왕이란 것이 공식적으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많은 판매를 기록해 두 번 상을 받은 것은 맞다”고 밝혔다.
잘나가던 안 씨에게 위기가 닥친 것은 지난 2006년경. 실적이 급격히 나빠진 것이다. 경찰 관계자는 “이때부터 안 씨의 사기가 시작된 것 같다”고 전했다. 안 씨는 자신에게 보험을 가입했던 고객들을 찾아가 “시골에 돼지 농장이 있는데 그곳에 투자하면 월 2부로 수익금을 받게 해 주겠다”며 투자를 권유했다. 믿음직한 안 씨가 고수익까지 보장해준다니 사람들은 거액을 맡겼다. 경찰에 따르면 이렇게 해서 안 씨가 모은 돈이 23억 원에 달했다.
안 씨는 받은 돈을 고객의 밀린 보험료를 대납하거나 타인 명의로 새로운 보험을 가입하는 데 사용했다고 한다. 또한 투자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수익금 분배에도 쓰였다. 경찰은 이 과정에 대한 보다 정확한 사실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현재 보강 수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보험업계에서는 안 씨가 자신의 실적을 유지하기 위해 ‘돌려막기’를 했을 것이라고 관측하고 있다.
투자금 유치만으로는 실적 올리기에 한계를 느꼈던 안 씨는 지난해 4월부터 다른 수법으로 돈을 빼돌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고객이 보험에 가입할 때 제출했던 신분증 사본과 관계 서류에 기재돼 있는 서명을 위조하는 방법 등으로 해당 계약을 다른 사람 명의로 바꾼 후 새로운 계약자가 보험을 적법하게 해약하는 것처럼 꾸며 해약 환급금을 챙긴 것이다. 또한 안 씨는 위조한 서류로 대출까지 받았다. 가입자의 공인인증서만 있으면 납입 보험료를 담보로 보험사로부터 쉽게 대출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악용한 것이다.
3년이 넘게 계속되던 안 씨의 사기 행각은 결국 지난달 꼬리가 잡혔다. 2003년부터 매달 보험료를 납부해왔던 B 씨가 자신도 모르게 지난해 하반기에 보험이 해약됐을 뿐 아니라 누군가 자신의 이름으로 대출까지 받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지난 2월 경찰에 수사를 의뢰한 것이다. 경찰에 따르면 동대문시장에서 일하는 B 씨는 2억 원이 넘는 돈을 날렸다고 한다. B 씨를 비롯해 이런 식으로 사기를 당한 피해자들이 10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B 씨의 신고를 받은 경찰은 지난 3월 3일 안 씨를 긴급체포해 이틀 뒤 구속했다. 경찰 관계자는 “안 씨가 순순히 자신의 혐의를 인정했다. 하지만 아직 사기를 당한 것조차 모르는 피해자들이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추가 범행 여부를 추궁하고 있어 피해 규모는 더욱 늘어날 것 같다”고 전했다.
안 씨가 구속된 후 LIG에서는 긴급 대책반을 꾸려 진상조사에 나서는 등 조기진화에 힘쓰는 모습이었다. 간판 보험설계사가 불미스런 일에 연루될 경우 영업에 차질을 빚을 수 있기 때문인 듯하다. 회사 관계자는 “경찰과는 별도로 다른 고객들의 피해가 없었는지 확인 중이있다. 이번 일로 회사 이미지도 손상됐고 보험설계사들의 사기도 많이 떨어졌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이 터지고 나서 LIG를 비난하는 목소리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다. 3년이 넘도록 안 씨가 고객들을 속일 수 있었던 것은 ‘내부 감시 시스템이 전혀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계약자 명의가 변경될 경우 본인이 반드시 출석해서 신분 확인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보험설계사의 서류 제출만으로 허용해준 것도 회사 측의 관리 소홀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경찰에서도 안 씨의 여죄를 파악하는 것과는 별도로 회사 측의 과실 유무에 대해서도 수사를 진행 중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LIG 측은 “경찰에서도 회사는 법적으로 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고 있다. 안 씨가 제출했던 서류 역시 아무런 하자가 없어 돈을 지급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피해자 A 씨는 “안 씨 개인도 문제지만 LIG라는 회사를 믿고 보험에 가입하는 고객들에게 이제 와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경찰에 따르면 이번에 안 씨로부터 사기를 당한 피해자들 상당수가 재래시장의 영세상인들이라고 한다. 경찰의 한 관계자는 “그렇지 않아도 불황인 상황에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거액의 사기까지 당한 상인들을 보면서 너무 안타까웠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회사가 보험설계사들을 철저하게 관리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보험사기는 무엇보다 본인의 주의가 필요하다. 가입할 때 꼼꼼히 살펴보고 정기적으로 체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