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주인공은 D 사 창업주의 손자 양 아무개 씨. 양 씨는 지난달 20일 저녁 경기도 용인에서 경찰에 의해 긴급체포됐다. 경찰은 사기혐의로 고소된 양 씨에게 수차례 소환을 통보했으나 양 씨가 이에 불응, 부득이 수배자 명단에 올린 것으로 전해졌다. 양 씨는 다음날 본인의 주소지인 혜화경찰서로 이송돼 조사를 받고 현재 유치소에 수감 중이다. 사건은 중앙지검으로 송치된 상태다.
경찰에 따르면 양 씨는 친구인 이 아무개 씨와 자신의 운전기사 등으로부터 총 6억 원가량을 빌려 이를 갚지 않았으며 돈을 빌리는 과정에서 ‘회사 비자금을 세탁해야 한다’는 핑계를 댔던 것으로 알려졌다. 재벌기업 창업주의 손자가 도대체 어떤 일로 몇 억 원의 돈을 갚지 못해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됐을까. 그 내막을 취재했다.
사건의 발단은 지난해 1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번 사건의 고소인인 이 아무개 씨는 양 씨와 H 초등학교 동창이다. 이 씨의 기억 속에 양 씨는 서울의 유력인사 자제들이 많이 다녔다는 H 초등학교에서도 내로라하는 부잣집 아들이었다. 자신들이 다니던 초등학교보다 더 큰 집, 고급 승용차, 비슷한 부모님을 가진 친구들. 이 씨는 양 씨를 기억할 때마다 항상 이런 이미지들을 떠올리고는 했다.
이 씨는 유학을 가고 양 씨는 경영 수업을 받으며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렇지 지낸 게 15년. 둘은 우연히 서울의 한 호텔에서 조우했다. 그리고 그 만남은 자연스럽게 술자리로 이어졌다. 술자리가 무르익었을 때였다. 양 씨가 이 씨에게 대뜸 ‘돈이 필요하니 2억 원만 빌려달라’는 부탁을 했다. 이 씨는 본인의 귀를 의심했다.
‘남부러울 것 없는 재벌가 자제가 불과 2억 원이 없어서 자신에게 손을 내밀다니….’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아 그 이유를 물었다. 양 씨의 입에서는 뜻밖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D 사에서 발행한 무기명 채권 72억 원을 해외에서 세탁하기 위해 비용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 씨는 양 씨가 술자리에서 농담 삼아 던진 얘기라고 생각하며 흘려 넘겼다.
그러나 다음날 양 씨에게 전화가 왔다. 어제와 같은 얘기를 했으나 내용이 보다 구체적이었다. 이 씨는 양 씨의 말을 반신반의했지만 변호사 비용이나 채권의 일련 번호 등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얘기하는 바람에 그의 말을 믿었고 결국 2억 원을 양 씨에게 빌려줬다. 이 씨는 채권 세탁이 끝나는 2월 10일까지 돈을 상환하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일이 잘 되면 원금과 이자를 상환하는 것은 물론이고 세탁한 돈의 일부를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사업에 투자하겠다는 약속까지 받았다. 이후 양 씨는 이 씨에게 ‘이런 저런 이유로 비용이 더 필요하다’고 말해 돈을 더 빌렸고 이 씨는 총 7회에 걸쳐 4억 5000만 원을 빌려줬다. 여기에는 이 씨 형제들의 돈도 포함돼 있었다.
상환 약속일이 됐으나 양 씨는 돈을 갚지 않았고 이후에 갚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양 씨가 계속해서 약속을 지키지 않자 이 씨는 양 씨에게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느냐, 탁 터놓고 얘기해봐라’고 추궁했다. 이에 양 씨는 “사실 D 사 비자금과 관련한 내용이 들어있는 CD가 있다. 해외에 있는 계열사를 통해 조성했고 총 720억 원 정도된다. 현재 내용을 확인 중이다.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애초에 말했던 무기명 채권 72억 원보다 비교가 되지 않은 큰 금액의 비자금 720억 원을 거론하며 상황을 연기해달라고 했던 것.
이 씨는 한 번만 더 그의 말을 믿기로 하고 상환을 3월 10일까지 연기해줬다. 그러나 양 씨는 한 달이 지나서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 씨가 다시 양 씨를 찾아가자 그는 집으로 가서 돈을 주겠다고 하며 ‘초등학교보다 더 큰 집’으로 이 씨를 인도했다. 어머니에게 돈을 받아서 주겠다며 집으로 들어간 양 씨는 몇 분 뒤 자신의 집 담을 넘어 도주하다 이 씨 동생에게 발각됐다.
참다못한 이 씨는 3월 13일경 결국 양 씨를 경찰에 고소했고 경찰은 양 씨를 여러 차례에 걸쳐 소환했으나 그는 여기에 불응했다. 경찰은 양 씨를 기소중지했고 3개월이 지난 후 그는 경기도 수지에 있는 모처에서 경찰에 의해 긴급 체포됐다. 경찰 조사 결과 양 씨는 이 씨 이외에도 다른 친구들과 심지어는 자신의 운전기사에게도 몇 천만 원을 빌려 갚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국내 부호 중에서도 손꼽히던 재벌가의 자제가 어떻게 운전기사에게까지 손을 내밀 만큼 몰락한 것일까.
여기에는 양 씨의 가족사가 깊이 얽혀있다. 양 씨의 아버지는 D 사 창업주의 장남으로 회사를 이어받았다. 이 회사는 관련 업계에선 첫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재무상태가 탄탄했다. 때문에 회사 내부에서는 ‘굳이 상장할 필요없다’는 말이 들릴 정도였다. 아버지가 회사를 계속해서 경영했다면 아들인 양 씨도 회사 경영에 한 축을 맡아 일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양 씨도 차근차근 경영수업을 받았고 국내 유력정치인의 딸과 결혼하는 등 재벌가 자제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나 양 씨가 26세가 되던 해 아버지가 지병으로 사망하면서 그의 인생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회사는 작은아버지 손에 넘어가게 됐고 형제들은 사업에서 조금씩 밀려나기 시작했다. 양 씨의 큰형과 작은형은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회사에 발을 담그고 있었으나 양 씨 본인은 빗나가기 시작했다. 주식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이후 주가조작, 사기 등의 혐의로 몇 번에 걸쳐 감옥을 오갔던 것. 한때는 여자 연예인과 함께 마약에 연루돼 경찰 조사를 받기도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혼까지 했다. 한 번 삐끗하기 시작한 삶은 바로잡기 어려웠다. 양 씨는 정신을 차리고 조그만 미디어 회사를 운영하는 등 재기하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이번에 이 씨에게 빌린 돈도 주식을 샀다가 탕진한 것으로 전해졌다.
양 씨는 이미 집에서도 내놓은 자식이었다. 형들은 주가조작과 사기로 전과자가 된 동생을 조금씩 멀리하기 시작했다. 양 씨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양 씨를 충분히 도울 만한 재력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양 씨를 돕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아버지를 잃은 충격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돈의 유혹 때문이었을까.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환경에서 태어나 성장한 그는 그렇게 몰락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한편 경찰은 양 씨가 말한 D 사의 무기명 채권과 비자금의 진위에 대해서도 수사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까지 파악한 걸로는 무기명 채권은 허위일 가능성이 높고 비자금은 더 확인해봐야 할 부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양 씨와 어울렸던 재벌가 자제 중에서도 이번 사건과 비슷한 수법으로 양 씨에게 물린 이들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