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얘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시간이 몇 신데 연락도 없고….”
김 씨의 부모는 5분 간격으로 김 씨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벌써 수십 차례였다. 하지만 도통 연락이 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불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김 씨의 부모는 초조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딸의 귀가를 기다렸다.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나…’하는 심정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김 씨는 평소 착실한 딸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김원배 경찰청 수사연구관이 전하는 사건은 11년 전 우리 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여직원 토막살인사건’이다.
우선 당시 상황에 대한 김 연구관의 얘기를 들어보자.
“김 씨는 한 유통회사에서 경리사원으로 근무하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특이한 점은 김 씨가 입사한 지 며칠밖에 안 되는 신입사원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때문에 김 씨의 부모로서는 늦게까지 회사업무를 익히거나 신입사원 환영회를 하다가 귀가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날이 밝았음에도 김 씨는 귀가하지 않았고 아무 연락도 없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불안해진 김 씨의 부모는 경찰에 실종신고를 하려했다. 하지만 이 와중에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경찰로부터 뜻밖의 신고가 들어온 것이었다. 김 씨가 회사 돈을 갖고 도망갔다는 내용이었다.
경찰에 김 씨를 신고한 사람은 다름아닌 김 씨가 근무하는 회사의 사장 최형만 씨(가명·43)였다. 이어지는 김 연구관의 얘기.
“사장 최 씨는 경찰에서 ‘얼마 전 경리사원으로 고용한 김 씨가 책상 서랍에 넣어둔 회사공금 2150만 원을 갖고 사라졌다’고 진술했다. 최 씨는 ‘기껏 믿고 고용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김 씨의 부모는 큰 충격에 빠졌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김 씨가 사라진 마당에 최 씨의 신고는 상당히 중요했다. 실종이냐 가출이냐를 판단할 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최 씨에 따르면 김 씨가 거액의 회사공금을 갖고 사라진 것은 10일 오후. 김 씨가 모습을 감춘 날과 정확히 일치했다. 최 씨의 진술이 사실이라면 김 씨는 정상적으로 출근했다가 그날 오후 회사공금을 훔친 뒤 잠적했을 가능성이 높아지는 셈이었다. 딸의 실종에 전전긍긍하던 김 씨의 부모는 졸지에 딸이 횡령범으로 몰리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할 말을 잃었다.
‘설마 우리 딸이…?’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여지껏 사고 한 번 치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온 딸이었다. 실제로 김 씨는 성인이 된 후 부모에게 용돈을 탈 수는 없다며 구직을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녔다. 그리고 몇 번의 고배 끝에 얼마 전 이 회사에 경리직원으로 채용됐다. 박봉이지만 용돈벌이는 충분하다며 성실하게 근무하겠다는 열의를 불태우던 딸이었다. 그런 딸이 입사한 지 일주일도 안 되서 이 같은 대형 사고를 칠 리가 만무했다. 더구나 김 씨는 목돈이 필요한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이런 사정을 사장 최 씨가 알 리 없었다. 최 씨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최 씨는 김 씨의 부모에게 ‘당장 돈 2000만 원을 물어내라’고 요구했다. 김 씨의 부모로서는 막막한 상황이었다.
“사장님, 우리 딸이 그런 엄청난 사고를 쳤을 리가 없어요. 분명 무슨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겁니다. 절대로 남의 돈에 손을 댈 아이가 아니에요.”
“이것 보세요. 당신 딸이 그날 출근해서 서랍에 있는 돈을 훔쳐서 사라졌다니까요. 회사 운영자금이니 당장 물어내세요!”
경찰에서는 최 씨와 김 씨 부모 간에 실랑이가 이어졌다. 하지만 최 씨의 태도는 완강했다. 믿고 고용한 직원에게 불과 일주일도 안 돼서 배신을 당했다는 최 씨의 분노는 쉽사리 가라앉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특히 최 씨가 이처럼 김 씨의 부모에게 큰소리를 칠 수 있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최 씨가 김 씨를 채용할 당시 작성한 각서 때문이었다. 조사결과 최 씨는 “유통업이라 거금이 오갈 뿐 아니라 현금을 취급하는 일이 잦기 때문에 보증인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고, 이에 김 씨 부모가 ‘(딸로 인해서) 금전 사고가 발생할 경우 책임을 진다’는 2000만 원의 재정보증을 섰던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김 씨의 부모의 머릿속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최 사장의 말은 진실일까. 보배가 설마? 사실이라면 왜 그랬을까. 그나저나 이 아이는 어디로 간 것일까.’
김 씨 부모로서는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딸의 행방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수사팀으로서도 마찬가지였다.
최 씨의 말대로라면 김 씨는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회사 공금을 갖고 잠적한 것이다. 직장인들이 명품 구입이나 유흥비 마련 등 카드빚으로 인해 자신이 근무하는 회사의 금고에 손을 대는 사건을 종종 다뤄봤던 터라 수사팀으로서도 김 씨의 범행 가능성을 아주 배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수사팀은 일단 최 씨의 진술을 토대로 수사에 착수했다.
그런데 수사과정에서 뭔가 석연찮은 점들이 하나 둘 발견되기 시작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이상한 점은 최 씨가 운영한다던 유통회사의 실체였다. 그 회사는 생긴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회사였다. 최 씨는 10월 22일부터 동대문구 용두동의 한 허름한 건물 한 켠에 OO유통이라는 상호를 걸어놓고 사무실을 운영해온 것으로 밝혀졌는데 정확한 업종조차 확인하기 힘들었고, 더군다나 무허가 업체였다. 정밀 조사결과 더 이상한 사실이 드러났다. OO유통은 말로만 유통업일 뿐 사업내용과 거래처, 장부내역 등 그동안 회사를 운영해온 흔적이 전혀 없었다. 당연히 매출실적 같은 것이 있을 리 만무했다. 또 직원도 경리직원으로 있던 김 씨 한 명뿐이었다. 더구나 경력조회 결과 최 씨는 유통업을 운영하거나 그 계통에 근무한 경험조차 전무한 사람이었다.”
최 씨의 진술을 반복해 듣던 수사팀은 점차 최 씨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느끼기 시작했다. 최 씨는 회사를 설립하게 된 과정 등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으며 사무실 운영 방법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전무했다. 회사가 설립된 지 한 달도 안돼 체계가 잡히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감안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 업무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상황에서 직원을 채용하면서 부모로부터 2000만 원이라는 재정보증금 각서를 받은 것도 납득하기 힘든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자의든 타의든 직원이 모습을 감춘 마당에 직원을 찾아달라는 요청은 아예 하지도 않고 직원의 부모를 상대로 재정보증금만 요구하는 모습도 왠지 어색했다.
하지만 정작 결정적인 단서는 따로 있었다. 이어지는 김 연구관의 얘기.
“바로 최 씨가 책상서랍에 보관해뒀다는 회사공금이었다. 매출실적도 전혀 없는 회사에서 2000만 원이 넘는 현금을 갖고 있었다는 게 이상했다. 또 주거래 은행조차 없이 거금을 사무실 책상서랍에 넣어뒀다는 것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예상대로 최 씨는 공금 2000만 원의 출처나 용도에 대해 횡설수설하며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갈수록 수상했다. 수사팀은 직원에게 공금을 도난당했다는 신고가 애초부터 최 씨의 자작극이었을 가능성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수사팀의 마음은 다급해졌다. 자작극이라면 김 씨는 최 씨에 의해 희생됐을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이었다.”
다급한 것은 김 씨의 소재를 파악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수사팀은 이미 김 씨가 생존해 있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했다. 최 씨의 주머니에서 발견된 고속도로 통행 영수증 때문이었다. 김 씨가 실종된 날 오후 줄곧 회사에 있었다는 진술과 달리 최 씨는 경상북도 김천에 다녀온 것이 확인됐다. 최 씨의 주머니에서 발견된 김천에서 동서울영업소까지 운행한 영수증 기록은 빼도 박도 못할 증거였다. 불길한 예감이 수사팀 전체를 휩싸고 있었다.
이미 수사팀의 머릿속에서는 최 씨의 범행 시나리오가 그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급히 최 씨의 차량을 살펴보던 수사팀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피묻은 쇠톱이 발견된 것. 그리고 차량 트렁크에서는 피투성이 상태로 처참히 잘려진 여성의 몸통 부분이 발견됐다. 경리직원 김 씨였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조사결과 드러난 사건 전말은 이렇다.
최 씨는 전직 버스기사였다. 그해 5월까지만 해도 버스회사에서 운전기사로 근무했던 최 씨는 100만 원 남짓한 박봉을 견디지 못해 직장을 그만두게 된다. 하지만 막상 직장을 그만둔 후 살아갈 길이 막막했다. 모아놓은 돈도 없는 데다가 그나마 고정적으로 들어오던 수입마저 끊기니 생활이 곤란했던 것이다.
5개월 이상을 무직 상태로 지내던 최 씨는 돈이 될 만한 일들을 구상하던 중 우연히 TV에서 사람을 죽이고 보험금을 타내는 사건을 접하게 된다. 범행을 저질러 한몫 챙기려고 마음먹은 최 씨는 고심 끝에 획기적이고도 무서운 범행을 고안해내게 된다. 바로 재정보증금을 가로챌 속셈이었다. 용두동에 값싼 사무실 한 칸을 빌려 간판만 있는 유령회사를 세운 최 씨는 생활정보지에 경리직원을 구한다는 광고를 냈다. 그리고 11월 3일 광고를 보고 찾아온 김 씨를 고용한 뒤 ‘거액의 현금을 다루는 일’이라는 명목으로 김 씨의 부모에게 재정보증을 서게 했다.
그러나 이런 최 씨의 실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주일 후 최 씨는 김 씨에게 ‘지방에 수금하러 같이 가자’고 속인 뒤 경북 김천의 한 야산으로 데려했다. 뒤늦게 수상한 낌새를 눈치 챈 김 씨가 달아나려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최 씨는 계획대로 김 씨를 목졸라 살해한 뒤 미리 준비한 쇠톱으로 사체를 토막냈다. 그리고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목과 양 손은 야산에 묻고 몸통부분을 다른 곳에 유기하기 위해 자신의 트렁크에 싣고 다닌 것이었다.
살인·사체손괴 및 유기혐의로 기소,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최 씨는 항소심에서도 사형을 선고받았다. “피고인이 어떻게든 생활을 해나가기 위해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노력을 한 점은 인정되지만 실직 후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치밀한 범행계획을 세워 피고인을 신뢰하는 피해자를 살해한 뒤 사체를 절단한 점에 비춰볼 때 법정 최고형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재판부의 의견이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