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안 들어왔군. 이 여자 참…. 도대체 몇 달째야… 온다간다 말도 없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네.”
손 씨네 집 문간방에 세들어 사는 사람은 정윤숙 씨(가명·37)였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정 여인은 몇 개월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자주 방문을 두드려보고 심지어 한밤중에도 찾아가보곤 했지만 정 여인을 만날 수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방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인기척도 없었다.
이번에 김원배 경찰청 수사연구관이 전하는 사건은 19년 전 이맘때 발생한 일명 ‘인천 송림동 여인 토막살인사건’이다.
밀린 월세만 해도 벌써 몇 달치였다. 밀린 월세야 보증금에서 깎아 나간다쳐도 짐도 빼지 않고 잠적해버린 것은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정 여인의 딱한 사정을 알고 참아왔던 집주인 손 씨였지만 인내심이 한계에 달할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안 되겠군! 오늘은 끝장을 봐야겠어!’ 몇 달을 참고 있었던 손 씨는 결국 비상열쇠로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에는 모든 살림살이들이 그대로 있었다. 방안은 가재도구들이 곳곳에 나뒹굴고 있었지만 이렇다 할 특이사항은 없었다. 하지만 방안에는 왠지 모를 음산한 기운이 가득했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지독한 악취….
‘세상에, 이게 무슨 냄새람…. 아무리 사는 게 빠듯해도 그렇지. 쯧쯧.’
손 씨는 혼잣말로 투덜거리며 방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방에는 오랫동안 사람이 드나들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정 여인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하지만 이미 손 씨는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정 여인을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침 방 안에서 정 여인 오빠의 연락처가 적힌 메모를 발견한 손 씨는 정 여인의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정 여인의 조카 정영훈 군(가명·17)이었다.
손 씨는 정 군에게 상황을 설명했고 그날 오후 정 군은 고모의 짐을 빼는 일을 돕기 위해 손 씨네 집에 찾아왔다.
“네 고모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구나. 주인 허락도 안 받고 짐을 빼기가 그래서 몇 달을 기다렸는데 이젠 도저히 안 되겠다. 밀린 월세도 그렇고…. 일단 짐을 빼고 고모랑 연락이 닿으면 알려다오.”
“죄송해요. 안 그래도 저도 요즘 고모를 통 보지 못해서 궁금했어요. 연락오면 바로 알려 드릴게요.”
손 씨는 정 군과 함께 정 여인의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후 방 한켠에서 느닷없이 정 군의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비명을 듣고 손 씨가 달려왔을 때 정 군은 부엌 싱크대 앞에 주저앉아 벌벌 떨고 있었다. 정 군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두 개의 쌀부대였다. 무엇을 봤는지 정 군은 정신이 나간 듯 그저 울먹이기만 했다. 부엌에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심한 악취가 진동했다. 손 씨는 조심스레 쌀부대로 다가갔고 부대 속을 들여다봤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그 순간 손 씨 역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쌀부대 안에는 잘려진 사람의 다리가 들어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옆에 있던 또 하나의 쌀부대안에서 여인의 잘려진 상반신이 발견됐다. 분명 정 여인이었다. 토막난 사체들은 비닐에 싸여 있었는데 형체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부패돼 있었다.”
엽기적인 토막살인사건이었다. 방안에 가득하던 악취도 이 때문이었던 것이다. 행방이 묘연하던 정 여인이 끔찍하게 살해되어 집안에 유기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손 씨는 물론 정 여인의 가족들도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정 여인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심하게 부패되어 있었지만 감식결과 사체에서는 폭행 등 이렇다 할 외상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목 부분의 상처와 정 여인의 혀가 밖으로 나와 있었던 점 등으로 판단컨대 범인은 정 여인을 목졸라 살해한 후 토막낸 것으로 드러났다. 사체의 부패 상태로 볼 때 정 여인은 살해된 지 이미 6개월이 넘은 것으로 추정됐다.
하지만 문제는 정 여인의 근황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가족들도 정 여인이 어떻게 지내는지 자세히 모르고 있었다. 반년이 넘도록 정 여인과 연락이 닿지 않았지만 그녀의 생사를 의심한 사람은 없었다. 또 정 여인은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나 자주 접촉해온 사람도 없어 보였다. 수사는 처음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따지고보니 정 여인이 사라진 것은 벌써 7개월 전이었다. 그런데 현장조사를 실시하던 수사팀은 정 여인의 사체가 들어있던 쌀부대에서 6월 2일자 스포츠신문을 발견했다. 분명 6월 2일 이후 누군가 정 여인의 방에 들어왔다는 증거였다.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범인이 이미 살인을 저지른 후 6월 2일 이후에 사체를 신문지에 싸서 쌀부대에 유기했을 가능성과 6월 2일 이후에 살인이 이뤄졌을 가능성이었다. 하지만 사체 상태로 볼 때 살인은 이미 그 전에 이뤄졌을 가능성이 컸다. 수사팀은 어떤 경우든 범인이 정 여인의 방을 자유자재로 드나든 인물이라고 판단했다. 강제로 침입했을 경우 집주인이 모를 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수사팀은 애초부터 이 사건이 면식범에 의한 원한살인 혹은 치정사건이라고 추정했다. 상식적으로 월세 7만 원짜리 단칸방에 금품을 노리고 침입할 강도가 있을 리 없었다. 또 정 여인에게서는 성폭행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더구나 안면도 없는 인물이 방안에 침입해 사체를 토막까지 내고 달아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범행 후 운반을 쉽게 하기 위해 사체를 훼손했다면 토막난 사체를 집안에 그대로 놔뒀을 리 만무했다.
수사팀은 정 여인의 주변을 조사하던 과정에서 중요한 사실을 포착하게 된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바로 몇 달 전까지 정 여인과 동거하던 남자가 있었다. 집주인 부부에 따르면 정 여인은 지난해 10월 월세방을 얻은 뒤 서른 중반가량의 남자와 줄곧 동거해왔다. 하지만 4월 중순경 동거남이 집을 나갔고 그 후 정 여인 역시 돌연 모습을 감췄다는 것이었다. 동거남이 가장 유력한 살인 용의자로 떠올랐다.”
동거남을 찾아라. 수사팀은 정 여인과 동거했던 연하의 남자를 찾는 데 주력했다. 조사결과 정 여인과 동거했던 남자는 윤동춘 씨(가명·35)로 밝혀졌다. 놀랍게도 윤 씨는 이미 가정이 있는 인물로, 말하자면 두 사람은 내연관계였다.
주변 사람들에 따르면 두 사람은 평소 관계가 그다지 좋지 못했다. 가정이 있는 남자와 내연관계를 유지하다보니 여러 가지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 와중에 수사팀은 또 한 가지 중요한 진술을 확보하게 된다. 기억을 되짚어보던 집주인 손 씨의 부인이 “4월 15일 새벽녘에 두 사람이 심하게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어찌나 심하게 싸우던지 마치 무슨 일이 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고 증언한 것이었다.
특이한 점은 정 여인과 심한 다툼을 하고 난 다음날 윤 씨가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공교롭게도 정 여인이 사라진 것도 그 무렵이었다.
모든 정황으로 볼 때 윤 씨는 정 여인과 가장 가까운 인물로 사건에 연루되어 있을 가능성이 컸다. 수사팀은 즉시 윤 씨에 대한 행적조사에 들어갔다. 우선 정 여인과 윤 씨가 함께 경영했다는 카페를 찾았다. 하지만 카페는 장사가 잘 되지 않아 문을 닫은 상태였으며 윤 씨의 행적 또한 묘연했다.
수사팀은 윤 씨의 연고지를 중심으로 추적에 들어갔고 그 결과 처제의 집에 숨어있는 윤 씨를 검거, 범행일체를 자백받았다. 범행동기는 수사팀의 예상대로 전형적인 치정사건이었다.
조사결과 윤 씨는 지난 4월 15일 새벽 3시 30분께 정 여인과 사생활 문제로 심한 말다툼을 하게 된다. 종종 있는 다툼이었지만 자존심을 건드리며 내연 관계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하는 정 여인에게 윤 씨는 심한 분노를 느끼게 된다. 결국 화를 가라앉히지 못한 윤 씨는 싸우다 지쳐 먼저 잠이 든 정 여인의 목을 졸라 살해하고 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정 여인이 사망한 것을 알게 된 윤 씨는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일단 현장을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한 윤 씨는 서둘러 집을 빠져나왔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하지만 살인을 했다는 생각이 윤 씨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언제 발각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더욱 윤 씨의 숨을 옥죄어왔다. 정 여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누군가 실종신고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골칫거리는 사체처리였다. 곧 있으면 날씨가 더워질 것이고 사체는 빠르게 부패될 게 뻔했다. 사체를 그대로 방치했다가는 썩는 냄새가 진동할 것이고 악취를 의심한 집주인이 방문을 열어보기라도 한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윤 씨는 사체를 처리하기로 마음먹는다.”
범행 사흘 후인 18일 밤 윤 씨는 다시 정 여인의 셋방으로 돌아왔다. 윤 씨는 사체 운반을 쉽게 하기 위해 사체를 토막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준비한 흉기로 사체를 토막내 비닐로 싼 뒤 쌀부대 두 곳에 나눠 담았다. 하지만 사체를 감쪽같이 처리하는 일은 결코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집안의 혈흔 등을 말끔히 지운 윤 씨는 사체를 다른 것으로 옮겨 암매장하려 했지만 이내 난관에 봉착하고 만다. 쌀부대를 옮기는 방법이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느닷없이 차를 몰고 와 쌀부대를 싣고 갈 수도 없었다. 타인의 의심을 살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윤 씨는 사체이동 과정에서 주인집 사람들이나 이웃들과 마주칠 것 등에 부담을 느낀 나머지 포기하고 만다.
이후 윤 씨는 이따금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동네 분위기를 살폈다. 다행히 정 여인과 관련된 이상한 소문은 없는 듯했다. 정 여인이 살던 셋방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있었고 주인집 사람들도 별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했던가. 계속 불안감에 쫓기던 윤 씨는 더위가 시작된 6월 2일에 다시 한 번 정 여인의 셋방을 찾았다. 사체가 부패할 것을 염려한 탓이었다. 적당한 때를 봐서 사체를 옮기려 시도했으나 역시 혼자 힘으로는 무리였다. 결국 윤 씨는 주인집 동향을 살피고 사체 상태를 확인한 후 신문지로 덮어두고 돌아가고 말았다.
한 여인의 억울한 죽음이 밝혀지기까지 무려 7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린 셈이었다.
김원배 연구관의 사건 회고
7개월간 무관심 속 사체 방치
김원배 수사연구관은 모두의 무관심 속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해야 했던 한 여인의 사연을 얘기하면서 유난히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그나마 집 주인의 관심마저 없었더라면 이 사건은 아마 해를 넘겼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변사사건을 처리하다보면 실종신고조차 되지 않은 채 한참 후 주검으로 발견되거나 변사자의 신원조차 확인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평소 가족은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 사건이었습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