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삶은 말그대로 밑바닥 인생이었다. 충남의 어느 가난한 소작농 집안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마친 그는 농사를 짓다가 상경, 공장 노동자와 밤무대 가수 생활 등을 했고 1980년부터 성남 지역에서 노점상, 막일, 군밤장수 등을 했다. 그러다 성남 주민교회 이해학 목사를 통해서 사회 문제에 눈을 뜬 이후 운동가로 변신한 그는 80, 90년대 수도권 빈민 운동을 이끌었다. 그와 형동생하던 고 제정구 의원과 함께 당시 그는 ‘빈민들의 대장’이었다.
지난 8월까지 그는 성남시 중원구에 있는 전세 2천5백만원짜리 15평형 연립주택에서 살았다. 91년 초대 성남 시의원으로 공직을 시작한 이래 13년 동안 재산 변동도 없었다. 부인 조수복씨는 27년 결혼생활 중에 가장 가슴 아팠던 기억으로 “고기를 좋아하는 딸에게 어렸을 적 고기 한번 제대로 못 먹인 일”을 꼽을 정도로 생활은 궁핍했다.
지역에서 그는 ‘거지대왕’으로 통했다. 빈민운동을 하면서 주로 같이 생활한 사람들이 ‘거지’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거지들과 함께 살던 당시 고졸이라고 거짓말을 했던 것이 결국에는 그의 발목을 잡는 이유가 됐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우선 그의 풍부한 감수성을 말한다. 6개월여를 함께한 보좌진들은 이 전 의원에 대해 “노래 잘 부르고 분위기를 많이 타는 내성적인 성격을 가진 분”이라고 설명할 정도다. 조씨는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때는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 기타를 치며 아이들과 같이 노래를 부르던 저녁시간과 가끔씩 둘만의 데이트를 즐기던 때”라고 말했다. 그는 구속되기 이틀 전에도 부인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심야데이트를 갔었다. 그가 주로 부르던 애창곡은 ‘제비’ ‘사노라면’이었다고 한다.
그는 내성적인 성격이었지만 어려움을 피해가지 않는 강인함도 함께 가진 사람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남시의원 첫해였던 1991년, 속칭 <말>지 필화사건으로 성남시 비리를 파헤친 것도 그런 그의 강직한 성격 탓이었다. 그 사건으로 당시 그는 성남시의회로부터 제명을 당하기도 했다.
그가 가훈으로 ‘정의’를 택한 것도 이런 그의 성격과 무관하지 않다. ‘정의롭게 살라’는 의미를 담아 아들의 이름도 ‘화랑’으로 지었다.
이 전 의원은 구속되던 지난 11일 가족들과 마지막 점심을 같이했다고 한다. 특별히 준비한 것은 없는 평소와 같은 식사 자리에서 그는 눈물을 보이는 부인에게 “내가 없는 동안 지역에 있는 독거노인들을 위해 일해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독거노인을 돌보는 일은 이 전 의원이 빈민운동을 하던 당시부터 20년이 넘게 해 온 일이었다. 조씨는 “그렇지 않아도 마음의 정리가 좀 되면 지역에서 봉사활동을 다시 시작할 생각이었다. 그렇게라도 해서라도 지역의 많은 분들에게 죄를 갚고 싶다”고 전했다.
이 전 의원과 함께 경기도의회 의원으로 4년을 함께 보낸 이기우 열린우리당 의원은 이 전 의원에 대해 “아주 성실한 사람이었고 배울 점이 많은 선배였다. 용기있는 사람이었고 언제나 진지했다. 법적인 판단을 떠나서 그 분이 살아온 인생이 송두리째 매도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출소 후에도 지역에서 좋은 활동을 많이 하실 것으로 기대한다”며 착잡한 심경을 내비쳤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지난 13일 이 전 의원의 가족돕기에 나섰다. 급작스런 구속으로 인해 당장 생계대책이 막막해진 이 전 의원의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소속의원 전원으로부터 12월 세비에서 10만원씩을 갹출해 성금형식으로 전달하기로 한 것.
이번 일을 주도한 같은 지역출신의 열린우리당 김태년 의원은 동료 의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선배, 동료 의원님들께서도 잘 알고 계시듯 이상락 의원은 평생을 어렵고 힘든 이들의 편에 서서 일해 왔습니다. 배경도 학벌도 없이 시의원, 도의원을 거쳐 국회의원에 당선된 것은 그의 사람과 역사에 대한 사랑과 신념, 거짓없는 실천을 믿고 성원해 준 많은 지지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고 밝혔다.
집안에서 이 전 의원은 부인을 ‘탱순이’라는 별명으로 부른다고 한다. ‘탱글탱글하고 이쁘다’며 불러주는 별명이라는 것이 조씨의 설명. 조씨는 “남편은 제게 항상 미안하다고 해요. 고생 많이 시켰다면서. 애정어린 별명을 불러주는 데에도 저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한 감정이 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고 말한다. “아직 남편 면회를 가지 못했다”는 그녀는 “눈물을 보일까봐 못 가고 있어요. 마음의 정리가 되면 가야죠”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