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2월23일 열린 4인회담. 천정배 전 대표는 “절벽에 대고 말하는 기분이었다”며 박근혜 대표의 태도를 비난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연말 막바지까지 국가보안법 폐지안 등 4대 입법을 둘러싼 여야 격돌의 결과 여권이 ‘인책론’ 등으로 들끓으면서 본격화되기 시작한 현상이다. 4자 회담 등 막판 여야 협상과정에서 “절벽에 대고 말하는 기분”(천정배 전 열린우리당 원내대표)을 갖게 할 만큼 ‘귀를 막은 채’ 일관한 박 대표를 두고 “이대로는 도저히 안된다”는 인식이 여권 내에서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일종의 ‘박근혜 비토론’이라 할 수 있는 여권 내 이 같은 동향은 직접적으론 당면 현안인 4대 입법에 대한 여야 갈등이 원인이 되고 있지만 조금 더 시야를 넓혀 보면 2007년 대선 구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이다.
열린우리당 한 중진은 “그동안 박 대표를 대하는 당 지도부와 상당수 의원들의 인식에 너무 나이브한 면이 많았다. 이를테면 ‘박 대표는 개혁적인데, 한나라당 내 영남 보수강경파들이 문제다’는 등의 평가가 예다. 그러나 4대 입법 협상 과정을 통해 박 대표야말로 한나라당 내 ‘수구세력의 본산’임이 여실히 드러났다. 이제는 무작정 ‘말이 통할 수 있는 상대’라는 부질없는 기대를 접고 장기적 관점에서 박 대표와의 관계를 설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당내에서 힘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이 중진은 ‘새로운 관계 설정’의 구체적 방향과 관련 “싫든 좋든 대화와 타협으로 향후 국정을 이끌어 나가야 하는 만큼 이제는 보수강경파의 수장이 되어 버린 박 대표와 다른 채널을 마련해야 하는 것 아니냐. 한나라당 내에도 이념-노선 갈등이 있고, 차기 대권주자들간에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는 만큼 이러한 지점들을 여권이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말해 주목을 끌었다.
박 대표와 보수강경파의 당내 입지를 약화시키기 위해 여권에서 모종의 프로그램을 가동시켜야 한다는 주장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4대 입법 막판 협상을 전후해 그동안 박 대표에 대한 비판을 자제해 왔던 여권에선 박 대표로 인해 결렬 기운이 높아지자 “박근혜라는 이름을 가진 부활한 박정희와 대화한 것일 뿐”(유시민 의원), “한치도 물러서지 않는 ‘유신공주’의 모습에서 숨이 답답하다”(김현미 대변인) 등의 독설과 함께 ‘박근혜 비토론’이 점화됐다.
오죽하면 김덕룡 한나라당 원내대표와 함께 마지막까지 ‘대타협’을 추진했던 이부영 열린우리당 전 의장까지 “야당 대표의 ‘동어반복’을 들으며 인내했던 것이 회담 과정에서 가장 힘든 일이었다”고 토로할 정도였다.
한 핵심당직자는 4자 회담 분위기에 대해 “회담에서 열린우리당 대표들이 국가보안법의 문제 조항 삭제를 주장하면 박 대표는 다짜고짜 ‘북한을 이롭게 하려고 하느냐’ ‘그러면 휴전선의 국군은 무엇을 지키나요’는 등의 반론을 펴 협상에 찬물을 끼얹기 일쑤였다”며 ‘꽉 막힌’ 협상태도를 비판했다.
이 당직자는 “박 대표가 회담 기간 자신에 수첩에 적어 온 내용만 ‘책 읽듯’ 반복했다는 얘기는 100% 사실이다. 천정배 전 원내대표가 ‘냉전 수구 원칙만을 낡은 레코드판처럼 돌렸다’고 얘기한 것은 박 대표의 그런 자세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여권 내에선 “박근혜 체제의 한나라당과는 아무 것도 모색할 수 없다”는 이 같은 분위기가 4대 입법 ‘불발’의 후폭풍으로 촉발된 열린우리당의 역학구도 재편과 맞물려 더욱 강화될 것이란 전망이 많다. ‘주화론’(主和論)에 서서 4자 회담을 이끌어 온 천 전 원내대표와 이부영 전 의장이 사퇴한 반면 ‘주전론’(主戰論)을 펴 온 재야파-개혁당 그룹이 4월2일 전당대회에 앞서 일찌감치 당을 장악할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당장 이달 중 치러질 원내대표 경선에서 재야파-개혁당 그룹이 ‘2월 임시국회 국보법 폐지 총력전’을 전면에 내걸고 연대해 승리할 경우 박 대표 체제의 한나라당과 ‘재격돌’이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다. 재야 출신 한 초선 의원은 “원내대표가 새로 선출되면 한나라당, 정확하게 말하면 박 대표와의 일전은 불가피하다. 더 이상 박 대표 한 사람의 고집에 의해 원내 과반 1당이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는 상황은 연출되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고, 개혁당 그룹의 한 의원도 “필요하다면 당이 ‘박근혜 흔들기’가 아니라 ‘박근혜 죽이기’라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 여권 내에선 4대 입법을 둘러싼 여야 대치가 본격화하면서 한동안 수면밑에 잠복해 있던 정수장학회 이사장직 문제 등 박 대표를 겨냥한 공세에 다시 불을 당기려는 기운이 무르익고 있는 상황이다.
정수장학회 문제의 경우 당 차원에서 진상조사단이 구성돼 이미 지난해 7~8월께 종료됐으나 지도부의 만류로 인해 발표가 미뤄지고 있는 형편이다.
조사단 활동에 관여했던 한 의원은 “박 대표가 개혁입법의 최대 걸림돌임이 확인된 이상 더 이상 정수장학회 문제 등에 대해 당이 머뭇거릴 이유가 전혀 없다는 공감대가 확산되어 가고 있다. 특히 국회 행정자치위원회에서 여야가 합의한 과거사 규명법이 박 대표의 반대로 처리가 무산된 것에서 보듯 박 대표의 아킬레스건은 ‘유신의 딸’이란 점이다. 정수장학회 문제는 과거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의 부도덕성을 가장 명확히 입증할 수 있는 사안이란 점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며 차기 대선 때까지 기다릴 것이 아니라 당장 진상을 백일하에 드러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의원은 또 “최근 여권 최고 수뇌부 인사를 만났더니 정수장학회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며 ‘박 대표 본인의 결단에 의해 정수장학회에서 손을 떼게 하는 모양새를 갖추도록 해서는 안되며 비판여론에 의해 내쫓기듯 물러나게 해야 한다’고 말하더라”고 말해 주목을 끌었다. 정수장학회 문제를 고리로 한 여권의 ‘박근혜 때리기’가 조만간 본격화될 것임을 예고하는 지점이다.
한나라당 내 차기 대권주자들간 갈등을 매개로 박 대표의 입지 약화를 모색하려는 움직임도 눈여겨 봐야 할 대목이다. 4자 회담이 사실상 결렬된 상황에서 나온 이해찬 총리의 ‘2007년 대선 여당 승리 낙관’(12월28일) 발언은 앞으로 여권 내에 이 같은 기류가 구체화될 것임을 예고하는 ‘신호탄’이라는 분석이다.
이 총리는 <시사저널> 신년호 인터뷰를 통해 “97년 대선은 정말 어려운 상황에서 간신히 이겼고, 2002년 상황은 굉장히 어려웠지만 97년보다는 좀 나았다. 2007년은 시대흐름으로 보면 2002년보다도 훨씬 좋아지는 상황으로, (여당 후보가) 이길 가능성이 더 높다”며 열린우리당의 잠재적 대권주자로 꼽히는 정동영 통일-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에 대해 “누가 후보가 돼도 결과는 낙관적이라고 본다”고 전망했다.
이 총리의 발언은 차기 대선에 대한 여권 핵심부의 자신감을 드러낸 외형을 띠었지만 실제 의도한 것은 한나라당 내 ‘박근혜 필패론’을 부추기려는 것이란 분석이 많다. 당내 입지 면에서 박 대표가 이명박 서울시장, 손학규 경기지사 등 경쟁자들을 멀찍이 앞서 선두를 유지하고 있는 터에 “차기 대선에서 여당이 낙승할 것”이란 전망은 “박 대표로는 대선에서 못이긴다”는 얘기와 같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나라당 내에선 박 대표의 정치적 자질과 리더십에 대한 회의론이 불거지기 시작한 지난해 9~10월 이후 손 지사 등이 공공연히 “이대로 가면 무조건 진다”는 이른바 ‘2007년 대선 필패론’을 확산시키고 있던 터였다.
여권 최고의 ‘전략-기획통’으로 꼽히는 이 총리의 언급은 그의 정치적 위상과 맞물려 적지않은 파장을 낳았다. 특히 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문 답변 과정에서 ‘차떼기당’ 발언으로 한나라당과 첨예한 갈등을 빚었던 이 총리가 박 대표를 정조준하고 나선 배경을 놓고 다양한 분석이 나오고 있다.
재야 출신 열린우리당 한 의원은 “당 지도부가 박 대표에 밀려 대야 관계에서 진전을 보지 못하자 이 총리가 나름대로 ‘훈수’를 둔 것이다. 메시지는 한나라당엔 ‘박근혜식 정치’로는 정권 탈환을 기대할 수 없음을 상기시키고, 열린우리당엔 종합적인 ‘박근혜 대책’의 수립 필요성을 제기한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한나라당 내에서조차 ‘대선 전 분당’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는 형편인데 여권이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한 불만도 가미됐을 것이다”고 풀이했다.
한 386 의원은 여권 일각에 존재하는 무조건적 ‘포용론’의 문제점을 거론하며, 박 대표와의 관계에서도 ‘분리-견인’을 동시에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 의원은 “17대 국회 첫해 열린우리당이 보여준 가장 큰 한계는 전략적 중심이 없이 청와대만 쳐다보며 우왕좌왕한 것이다. 가령 노무현 대통령이 최근 ‘국민통합’, ‘민생우선’을 강조한다고 한 메시지를 잘못 읽어 앞으로도 박 대표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는 범위에서 정국을 풀어나가려 한다면 또다시 우를 범할 수 있다. 때론 박 대표의 약한 고리를 냉혹하게 타격하는 것도 필요하다. 같은 맥락에서 한나라당 내 개혁적 보수세력들이 박 대표와 등 돌리게 만드는 데 여권이 역할할 것이 있다면 당연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