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희 대통령 | ||
그런 가운데 5공 탄생의 주역인 전두환 전 대통령이 70년대 후반 권력의 핵심인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와 보안사령관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에 얽힌 비화들이 최근 밝혀졌다.
비화의 핵심은 당시로서는 극히 이례적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사인 인사 서류와 이세호 육군참모총장의 탄원서. 한국 현대사에 적잖은 영향을 끼친 이 두 장의 문건은 현재 역사의 뒤안길에 감춰져 있지만 당시 관련자들의 기억과 증언은 지금도 또렷하다.
결과적으로 경호실 차장보와 보안사령관이라는 두 요직은 전씨가 당시 격동기 한가운데서 사조직을 관리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데 결정적 디딤돌로 작용했다. 한 나라의 운명이 친필 사인 한 개와 탄원서 한 장으로 일거에 뒤바뀔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당시의 비화를 <일요신문>이 최초 공개한다.
1976년 초.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인참부) 사무실에 청와대 결재 서류 한 장이 되돌아왔다. 참모부 관계자들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군 인사 스타일로 볼 때 어지간해서는 육군참모총장이 올린 인사안에 대해서 정정을 하지 않았기 때문. 특히 75년 2월 취임한 이세호 육참총장은 박 대통령의 육사 2기 동기로서 가히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 한 장의 서류는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 인사에 관한 것이었다. 인사안에서 원래의 인사 대상자인 A준장 이름 위에 선명한 두 개의 줄이 그어졌고, 그 위에 박 대통령의 친필 사인과 함께 ‘전두환’이란 이름이 새로 적혀 있었다. 이 총장이 올린 인사안 가운데 유독 경호실 작전차장보에 한해서만 박 대통령이 직접 인사안을 바꾼 것이다.
당시 전두환 준장의 보직은 1공수여단장. 5·16쿠데타 직후 최고회의의장실 민원비서관(61년), 중앙정보부 인사과장(63년) 등을 지내며 한때 권력 주변에 머물렀던 전씨는 이후 70년대 들어 9사단 29연대장과 1공수 특전단장 등 6년째 ‘야전’에서 맴돌았다. 그러던 전씨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발탁 인사’로 다시 권력의 최정점인 청와대에 입성했던 것.
원래 전씨에게 호감을 지녔던 것으로 알려진 박 전 대통령이었지만 당시 이 인사를 계기로 전씨는 군부 내에서 ‘박 대통령의 양아들’로 소문나기도 했다. 이 같은 소문이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이끌던 전씨에게 또 하나의 ‘든든한 언덕’ 구실을 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 보직 인사에 박 전 대통령이 직접 간여했다는 결정적 증언이 나온 셈이다.
당시 육본 인참부에 근무했던 홍인호 예비역 중령은 “당시 너무나도 이례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나뿐만 아니라 다른 근무자들도 당시 박 대통령의 친필 사인을 똑똑히 기억한다”고 밝혔다. 그런데 현재 이 서류의 원본은 전씨가 직접 지니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홍 예비역 중령은 “12·12쿠데타가 성공하고 전씨의 신군부가 완전히 세력을 장악하고 난 뒤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전씨가 직접 인사참모부에 찾아왔다. 그러고는 무슨 이유에선지 그 서류의 원본을 달라고 요구해 가져갔다. 그것은 엄연한 국가 문서이기 때문에 잠시 가져갔다 다시 반환할 줄 알았는데 이후 반환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개인의 운명은 물론 훗날 역사의 명암에 영향을 끼친 이 인사 문서의 원본은 현재 육본에 없는 셈이다.
그러나 홍 예비역 중령은 “사반세기가 훌쩍 지났지만 그 문서는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며 필사본을 그려냈다(그는 이 같은 내용을 포함, 격동의 80년을 전후해서 자신이 약 8년간 몸담았던 육본 인참부에서의 체험과 군 인사 관련 비화들을 최근 책으로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당시 인사안을 올렸던 이세호 전 육참총장은 기자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워낙 오랜된 일이라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겠다”며 문건의 실체에 대해서는 유보적 입장을 밝혔지만 그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증언을 했다.
그는 “장군에 대한 인사는 전적으로 내 소관이기 때문에 내가 직접 했을 것”이라며 자신이 전씨를 직접 천거한 사실이 없음을 밝혔다. 이 전 총장은 “전씨야 워낙 권력 주변에서만 맴돌던 정치 군인 아니었나. 그에 비하면 A씨는 월남전 참전만 5년 이상을 했고, 또 태권도도 아주 잘했던 참군인이었다”는 말로 전씨보다는 원래 인사자 명단에 올랐던 A씨를 더 평가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과 막역한 친구 사이였던 이 전 총장은 당시 임기를 넘겨 75년 2월부터 79년 2월까지 만 4년 동안 참모총장을 맡는 등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 있었다. 그의 총장 재임 기간은 역대 최장 기간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전 총장이 올린 인사안은 단 한 번도 박 대통령에 의해 거부된 적이 없을 정도였다고. 그런데 단 한 번의 예외가 전씨 임명 건이었다. 특히 훗날 전씨가 12·12 직후 문제의 인사 문서를 따로 챙겨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 79년 11월6일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전모를 발표하고 있다. [80년 보도사진연감] | ||
전씨의 위세가 얼마나 급격히 상승했는지는 이 전 총장이 전하는 일화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전 총장은 “78년인가 어느 날 차 실장이 나를 부르더니 ‘전두환을 내보내야겠다’고 말하더라. 그래서 전두환이 1사단장으로 나가게 됐다”고 전했다. 당시 권력의 2인자로 불리던 차지철 실장도 전씨의 위세에 위협을 느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전씨 역시 어느 자리에서 밝힌 자신의 회고담에서 “경호실 차장보로 있을 때 차 실장이 자기 자리를 내게 뺏길까봐 계속 신경을 쓰는 등 사이가 아주 나빴다. 그래서 내가 내보내달라고 했다”고 말한 바 있다. 당시 전씨는 1사단장으로 나가면서 후임으로 친구인 노태우 전 대통령을 불러 앉히기도 했다.
한편 이 전 총장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신참 소장이었던 전씨가 일약 보안사령관에 전격 임명된 데 얽힌 비화를 처음으로 공개했다.
그는 “육참총장 시절 여러 가지 문제로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진종채 중장과 마찰을 빚으면서 보안사의 권력 남용과 폐단에 대한 문제점을 인식하게 됐다. 그런데 내가 총장직을 물러나자마자 보안사에서 사령관을 기존의 중장에서 대장급으로 올리려 한다는 얘기가 들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대통령에게 충정의 마음에서 탄원서를 올렸다. ‘4년간 군 수장을 맡다가 이제 야인이 되어 한 점 욕심도 없다’고 밝히고, 저간의 사정을 들며 ‘군 수사기관 같은 권력 기관은 계급을 오히려 지금의 중장급보다 소장급으로 낮춰야 탈이 없다’고. 당시 청와대에서 바로 쫓아와서 내 탄원서 내용을 확인하고 내 뜻을 다시 한번 확인해 갔다”고 전했다.
실제 이 전 총장의 탄원서가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진 사령관은 전격 경질됐다. 그리고 그 후임에 전격적으로 소장인 전씨가 임명됐다. 이때가 79년 3월, 12·12가 일어나기 불과 9개월 전의 일이었다.
당시 전씨는 사단장으로 나간 지 불과 1년도 안된 신참 소장이었던 만큼 그의 발탁은 상당히 파격적인 인사였다. 군 내부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당시 군 내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가진 이 전 총장의 (보안사 관련) 건의가 없었다면 박 대통령이 아무리 전씨를 총애했다 하더라도 그때 바로 보안사령관에 임명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이 전 총장 역시 이 같은 인사를 접하고는 “박 대통령이 내 충정을 받아줘서 고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전 소장이 임명된 것을 염려하기도 하고 그런 심정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그 일이 있고 나서 곧바로 전 소장이 술 한 병을 들고 내게 뛰어와서는 ‘총장님 앞으로 잘 좀 지도해주십시오’라고 인사를 하더라”고 덧붙였다.
이 전 총장은 “어쨌든 그 후 갑자기 10·26이 터지면서 보안사령관이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대통령까지 되는 것을 보면서, 참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꼈다. 내 충정은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본의 아니게 내 탄원서가 전두환의 권력 만들기에 일조를 해버린 셈이 되고 말았다”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 후 이 전 총장은 5·18 광주민주화항쟁이 일어나기 바로 전날 구(舊)군부의 핵심인물로 지목되어 신군부에 의해 서빙고로 연행되는 아픔도 맛봤던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