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1주기인 4월 16일 당일 남미 순방을 떠날 예정인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일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대통령의 해외 방문이나 해외 정상급 인사의 한국 방문 등 정상회담 관련 일정은 청와대 출입기자단 내에서 포괄적 엠바고 사안이다. 청와대가 일일이 요청하지 않더라도 공식 발표 전까지는 기사화할 수 없다. 정상회담 일정은 관련국의 조율을 거쳐 거의 동시에 공식 발표하는 외교적 관례에 따른 조치다.
이렇다 보니 유 집행위원장의 회견을 현장에서 취재한 기자들과 청와대 기자들, 청와대 관계자들 사이에 박근혜 대통령의 순방 일정을 기사화할지를 놓고 설왕설래가 이어졌다. “이미 내용이 공개된 이상 엠바고는 무의미해졌다”며 기사를 써야 한다는 의견과 “그럴 경우 앞으로 정상회담 관련 모든 엠바고가 지켜지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맞섰다고 한다. 결국 4월 10일 오전 청와대가 공식 발표할 때까지 엠바고는 지켜졌다.
기자단이 민간인인 유 집행위원장의 귀에도 들어간 정보에 대해 관례적인 엠바고 규정을 들이댄 것도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청와대의 일 처리는 더 심각한 문제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는 왜 청와대가 진작에 발표했어야 할 순방 일정을 공개하지 않아 불필요한 혼선을 유발했느냐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청와대 스스로도 세월호 참사가 난 4월 16일이 정확히 1주기인데, 하필 그날에 박 대통령이 순방을 떠난다는 사실을 선뜻 공개하기 어려웠던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실제로 청와대가 박 대통령의 남미 순방 일정을 4월 16일부터 27일까지로 잡은 것에 대해 청와대 직원들 사이에서도 “이건 아닌데…”라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참사 1년을 맞아 전국민적인 추모 분위기가 절정에 이를 바로 그날에 순방을 떠난다는 것은 세월호 참사 후속조치와 관련한 박 대통령과 청와대의 진정성을 의심케 하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한 청와대 행정관은 “박 대통령이 세월호 선체 인양 방침을 시사하는 등 성의를 다 하는 모습을 보여줬지만 순방 일정 때문에 그 효과가 반감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 청와대 출입기자는 “기자들 사이에서도 ‘순방 일정이 발표되면 청와대가 큰 역풍을 맞을 것’이라는 얘기가 오갔고, 이런 분위기가 청와대 윗선에도 보고가 됐을 것”이라며 “청와대가 이런 역풍까지 감안해 대책을 세우느라 공식 일정 발표를 늦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청와대는 남미 순방 일정을 짜는 과정에서 콜롬비아 방문이 가장 늦게 결정되는 바람에 4월 16일 출국이 불가피하게 됐다는 설명을 내놨다. 애초에는 4월 18~27일 페루, 칠레, 브라질 3국만 방문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정부 당국자도 “우리는 브라질 방문 이후 콜롬비아를 방문하기를 원했지만 콜롬비아 측이 국내 일정을 이유로 난색을 표했다”고 말했다. 콜롬비아 방문을 포기할 수는 없었는지에 대해 이 당국자는 “콜롬비아는 중남미 국가 중 유일하게 6·25에 참전했고, 우리와 자유무역협정(FTA) 협상도 타결한 국가”라며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여당에서도 “도대체 생각이 있는 것이냐”는 거친 비판이 나오고 있다. 새누리당의 한 고참 보좌관은 “1년 전 발생한 세월호 참사는 우리 국민들에게 사실상 ‘국상’처럼 여겨지고 있다”며 “이런 사건의 첫 번째 기제사 날에 대통령이 해외 순방을 떠난다는 발상이 어디서 나왔는지 궁금하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청와대 근무 경험이 있는 또 다른 보좌관은 “대통령의 순방 일정은 상대국과 조율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 마음대로 정할 수 없지만, 콜롬비아가 사정이 있다면 우리에게도 사정이 있다는 점을 설명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보좌관은 “결국 국민들에게는 청와대와 정부가 세월호 참사를 세일즈 외교보다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처럼 비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일부에서는 박 대통령의 이번 남미 순방이 애초부터 무리가 있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세월호 참사 1주기가 들어 있는 4월 셋째주(13~19일)가 사실상 추모주간 성격을 띠고, 이에 맞춰 전국 각지에서 관련 추모 행사들이 이어지는 점을 감안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세월호 피해자가족협의회 등은 4월 11일 범국민 집중행동주간 선포식을 갖고 15일에는 진도 팽목항을 방문한다. 1주기인 16일에는 오후 2시 안산에서 합동분향식, 오후 7시 서울광장에서 범국민추모제가 열린다. 17일에는 서울광장에서 촛불문화제가, 18일에는 광화문 일대에서 ‘진상규명, 안전사회 건설’ 범국민대회가 열린다. 가톨릭계가 4월 2일부터 팽목항에서 성삼일 전례를 열고 전국 교구별 추모행사를 갖는 것을 비롯해 종교별, 지역별 추모행사들도 전국적으로 열린다. 박 대통령이 남미 순방을 4월 16일 떠나든, 18일 떠나든 국민들 눈에 곱게 비칠 리 없다는 얘기다.
새누리당 비박계의 한 전직 의원은 박 대통령의 순방 일정 논란에 대해 “단지 박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들의 정무적 판단력이 부족한 것이라면 불행 중 다행이겠지만, 이번에는 세월호 참사를 대하는 청와대의 이중적인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더 걱정이 된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사실상 세월호 선체 인양을 지시하고 이 총리도 세월호 피해자 가족들을 만나 세월호특별법 시행령 수정 의사를 밝히는 등 다소 파격적이고 전향적인 모습을 보여줬지만, 속으로는 딴 마음을 품고 있는 것 같다는 지적이었다.
그가 말한 ‘딴 마음’이란 일종의 세월호 기피증이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로 인해 집권 2년차 국정운영이 사실상 올 스톱되고 탄탄대로를 탄 듯했던 박 대통령이 정치적 위기국면으로 빠져들었던 안 좋은 기억이 일종의 트라우마로 남아, 세월호 문제를 회피하게 만드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앞서의 전직 의원은 “세월호 선체 인양과 세월호진상조사특위의 조사 활동 모두 1년 이상 긴 시간이 소요되는 힘들고, 때로는 격한 갈등을 수반하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며 “과연 청와대가 인내심을 갖고 성의를 다하면서 국론 분열을 막을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 때부터 이어진 박근혜 대통령의 미온적인, 또는 무시 대응 논란은 1년이 넘은 현재까지도 변한 게 없는 것 같아 씁쓸한 뒷맛을 남기고 있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