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그때 그 사람들> 포스터에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정희와 싸우는 사람들’ 얼굴을 입혔다. 아래 왼쪽부터 유홍준 청장, 한상범 위원장, 임상수 감독, 강만길 위원장. 사진합성=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
하지만 이런 의도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은 부정적이다. 최근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박 전 대통령의 과거사 공개가 정치적 의도가 있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60.6%가 ‘정치적인 의도가 있다’고 답했다. 반면 ‘정치적 의도가 없다’는 27.5%에 그쳤다(리서치 앤 리서치 조사 결과).
현재 여권은 국정원 진실위를 시작으로 검찰 등 다른 국가 기관의 고해성사를 통한 과거사 규명 작업을 계속할 예정이다. 하지만 이와 별도로 문화계 등 다른 분야에서도 과거사 논쟁에 뛰어든 이들이 적지 않다. 그들의 주장과 ‘총대’를 멘 까닭을 짚어봤다.
임상수 감독. 그는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을 통해 박정희 시해 사건에 뜻하지 않게 연루되었던 경호원들과 그 주변 인물들의 갈등을 표현했다. 임 감독은 “박정희씨가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라면서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박정희 죽이기’ 등 정치적 해석을 일축했다.
그런데 정치적인 해석은 다르게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정치권에서는 이미 지난해 여름부터 박 전 대통령과 유신 잔재, 그리고 언론통폐합 등 어두웠던 과거에 대한 재조명 영화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영화계에 있다는 소문들이 떠돌았다. 특히 여기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이자 영화배우인 명계남씨의 이름이 주축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7월경부터 영화계에서는 명계남씨가 여권의 친일 청산 작업과 함께 박 전 대통령을 비하하는 영화를 제작하려 한다는 이야기가 떠돌아 당내에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얘기가 있었다. 당시 명씨가 유신의 과오를 비롯해 박 전 대통령을 비하하는 영화 4~5편을 제작, 추진중이라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또한 여기에는 박 전 대통령이 생전에 일부 여자 연예인과의 부적절한 행각을 흥미 위주로 재편해 그의 부도덕한 면을 부각시키려는 계획도 있었다고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당시 명씨의 한 측근은 이에 대해 “명 대표가 오래 전부터 이런 문제를 거론하며 영화로 풀어낼 방법은 없을지를 고민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로 영화제작에 들어간 것은 아니다. 이야기가 와전된 것 같다”고 설명한 바 있다.
한편 영화잡지의 A기자는 이에 대해 “명씨가 대표로 있는 이스트필름의 회사 규모가 영세하고 자금력도 떨어져 그 같은 소문이 사실이 아닐 것이라는 게 취재 뒤 내린 결론이었다. 평소 명씨가 진보적인 색채가 강해서 그런 이야기가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데 명씨는 지난 2003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반민특위 같은)영화만이 아니라 4·3, 5·18을 본격적으로 다룬 영화, 정치드라마, 언론으로 인해 고통받은 사람들의 얘기도 영화로 만들고 싶다. 재미있는 코미디 영화 만들어서 돈도 벌고 싶지만, 그런 영화 만드는 사람은 더 많으니까 남들이 안하는 것 만들고 싶다”고 밝힌 적이 있기 때문에 앞으로 그의 행보가 주목된다.
한편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을 만든 MK픽처스는 올해 초 명필름과 강제규필름이 합병해 만든 MK버팔로의 영화제작브랜드다. 이 회사의 주요주주는 명필름의 심재명씨와 남편 이은씨, 그리고 강제규필름의 강제규 감독 등인데 명씨는 이들과 영화 작업을 하는 등 친분은 있지만 회사 지분과는 어떤 관계도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유홍준 문화재청장도 박정희 전 대통령과 싸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올해 초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로 쓰여진 광화문 현판을 조선 정조의 글씨로 바꾸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밝혀 지금까지도 그 배경에 대해 많은 논란이 빚어지고 있다.
유 청장은 지난해 10월경 노 대통령과 창덕궁 후원을 거닐며 독대할 당시 정조가 세운 규장각을 안내하며 “정조는 개혁정치를 추진했고 소장학자들을 양성했으며 수원 화성으로 천도하려 했다는 점에서 대통령과 닮은 점이 많다”는 말을 건넸다고 한다. 그 뒤 그는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는 “정조는 수원으로 수도이전을 하려다가 노론세력에 의해 못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보수세력이 반대해 실패했다”고 말해 노 대통령과 정조의 정치적 유사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유 청장이 ‘현판 교체는 정치적 논란과는 전혀 무관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그의 ‘노무현-정조 비교론’은 일각에서 비판의 타깃이 되고 있다. 유 청장 또한 이를 의식했던지 처음 정조의 글자를 모아 현판을 만드는 안을 내놓았다가 이를 철회하고 옛 현판 글씨를 디지털로 복원한다고 방향을 바꾸어 정책이 오락가락 한다는 비난에도 직면해있다.
문화계만이 ‘박정희’와 싸우는 것이 아니다. 진보적 학자 두 사람도 어두운 과거 청산을 외치며 박정희에게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지고 있다. 근현대사 문제나 친일청산, 인권과 민주주의 등의 논란이 불거졌을 때마다 항상 언급되는 강만길 상지대 총장과 한상범 의문사진상규명위원장(동국대 명예교수)가 그들.
국무총리 산하 광복60주년 기념 사업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고 있는 강 총장은 최근 박 전 대통령에 대해 맹 비난을 퍼부어 최근의 과거사 논쟁에 가세했다. 그는 한국의 진보 사학자로서 그 학문적 명성이 드높고 학계로부터 존경받는 대표적 지식인이다. 그런 그가 지난 2월16일 “일본군 장교 출신이 쿠데타를 해서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한일 과거사 청산)문제가 안 풀렸다.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 대통령을 했다면 문제가 빨리 풀렸을 것”이라며 박 전 대통령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이에 대해 야당에서는 강 총장이 정부 산하 광복60주년 위원장을 맡고 있는 공인의 신분으로 이런 발언을 한 데 대해 정치적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광복 6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와 행정자치부가 3·1절 기념행사를 세종문화회관이 아닌 이화여고 내 유관순 기념관에서 치를 예정인 것으로 알려져 그 배경에도 물음표가 던져지고 있다. 세종문화회관은 지난 1978년 4월 개관한 이래 정부의 거의 모든 주요 행사가 이곳에서 열려 박정희 정권의 ‘문화적 상징물’처럼 여겨져 왔다. 이번 기념식장 교체 결정이 강 총장의 직접 지시에 의한 것은 확인되고 있지 않지만 세종문화회관이 박정희 시대의 대표적 문화유산이어서 부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교체했다는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는 지적도 나온다.
한상범 의문사위원장도 최근 “박정희는 간첩 중에 간첩”이라는 발언을 해 과거사 논쟁에 기름을 부었다. 인터넷에서는 보수-진보 누리꾼들이 한 위원장 발언을 두고 뜨거운 찬반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한 위원장은 지난해 7월 자신이 활동했던 제2기 의문사위에서 비전향장기수 3명을 ‘유신정권의 전향공작에 항거한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규정해 사회 각계로부터 거센 논란을 빚은 바 있다.
‘6월 사랑방’ 대표인 오충일 목사도 국정원의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며 과거사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는 황해도 봉산 출신으로 연세대 신학과를 나왔다. 전민련 의장과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 등을 지낸 대표적 시민단체 출신이다. 국정원 과거사위원회는 김대중 납치 사건, 김형욱 실종 사건, KAL 폭파 사건 등 7대 의혹사건을 선정, 앞으로 과거사와 한판 전쟁을 치르게 됐다. 그런데 이 중 5개가 박 전 대통령 재임 때 일어난 사건이라 선정 배경을 두고 박정희 죽이기라는 의혹이 나오기도 했다.
박근혜 대표와 그의 한나라당도 역설적이게도 박 전 대통령과 전쟁중이다. 박 대표는 지난해 총선이 끝난 뒤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에 걸려 있던 부친의 대형 액자사진을 철거한 바 있다. 이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박 대표가 드디어 박정희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인 것이라고 해석했다.
박 대표 자신이 총선 유세 과정에서 부모님의 옛 추억을 떠올리며 그 ‘후광’을 입은 바 있지만 여권의 과거사 논쟁이 촉발되면서 이것이 오히려 부메랑으로 되돌아와 당내 갈등을 부추긴 측면도 있다. 앞으로 박 대표는 정수장학회 이사장직을 사퇴해 명분을 잡은 뒤 과거사 논쟁에서는 무대응으로 일관, 진흙탕에서 한발짝 물러설 태세지만 과연 그렇게 될지는 의문이다.
한나라당도 박정희와 힘겨운 전쟁을 벌이고 있다. 당 소속 의원들은 크게 박정희 ‘계승론’과 ‘단절론’으로 나뉘어 맞서 있다. 대구·경북 출신 의원들은 대부분 ‘박정희 엄호부대’를 자임하고 있다. 여기에 이계진 공성진 등 초선 의원들도 가세하고 있다. 반면 이재오 홍준표 의원 등 수도권 중진들은 단절론을 내세우며 박 대표를 몰아세우고 있는 형국이다. 여기에 남경필 원희룡 등 소장파 의원들도 개혁적 관점에서 박정희의 어두운 그림자를 털어내야 한다고 지적한다.
3년 전 <알몸 박정희>라는 책을 통해 박정희의 친일행적부터 유신독재에 이르기까지 신랄하게 비판했던 최상천 전 대구가톨릭대 교수도 ‘박과의 전쟁’중이다. 그는 박정희를 친일파로 분류하지 않고 ‘일본인 중에서도 가장 극렬한 일본인’이라며 그를 몰아세운다.
이라크 파병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러울 때 홀연히 파병반대를 외쳤던 표명렬 예비역 준장도 박정희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다. 그는 최근 CBS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군인이 쿠데타를 해서 민주 정권을 탈취해 버리는 것, 그리고 정권유지를 위해 수많은 죽음을 만든 이런 군인이 있다면 가장 부끄러운 군인이다. 그런 군인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내가 보기에는 박정희이다”라고 일갈하고 있다.
과거사 논쟁의 배경에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여론이 아직도 60%에 이르는 것을 보면 앞서 열거한 사람들의 무수한 펀치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아직 건재하다고 할 수 있다. 과연 박정희의 ‘향수’가 2007년 대선에서 그들의 공세를 뚫고 청와대 재 입성에 성공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