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월 25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 2주년 연설을 듣고 있다. | ||
지난 2월3~4일 충북 제천 의원연찬회 이후 친목성격이 강했던 당내 각 모임들이 정치 결사체로의 변신을 선언하고 영향력 확대에 나선 것이다. 당 이념 및 정체성을 둘러싼 이전 논쟁이 ‘입씨름’ 수준이었다면 지금은 세력과 세력이 정면으로 부닥치는 ‘육박전’ 양상으로 전개되는 조짐이다. 이에 따라 의원들의 모임 탈퇴 및 새로운 모임 가입 등 세력 재편 움직임도 분명해지고 있다.
각 모임들은 당 개혁을 화두로 경쟁하는 모습이지만 실제로는 내년 지방선거와 멀리는 2007년 대선을 겨냥한 영향력 확대를 도모하는 권력투쟁 성격이 강하는 점을 감안할 때 “당 해체로 이어지는 게 아니냐”는 성급한 관측마저 제기되고 있다.
또 당 일각에서는 박근혜 대표, 이명박 서울시장, 손학규 경기지사 등 한나라당 예비 대권주자인 이른바 ‘빅3’와의 직간접적인 연계설이 흘러나오고 있어 세력간 대결은 한층 격화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가장 활발한 행보를 보이는 곳은 소장개혁파 그룹인 수요모임이다. 수요모임은 최근 전체 회의를 열어 기존 연구모임에서 정치적 모임으로서의 성격 전환을 선언했다. 이들은 여의도 국회 주변 한 오피스텔에 사무실까지 마련했다.
이 단체 회장인 정병국 의원은 “당 개혁의 기관차 역할을 하기로 결의했다”며 “개개인의 목소리가 아니라 모임 전체의 의견을 개진해 관철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수요모임이 움직임이 주목되는 것은 말만 앞세웠던 이전과 달리 내용을 담보하는 행동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남경필 의원은 “소장파들이 개혁을 외치면서도 어떤 개혁이냐에 대해서는 분명한 청사진을 제시하지 못해 양지만 쫓는 기회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았던 것을 잘 알고 있다”며 “이제부터는 확실한 실행력을 선보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당의 주체세력으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하겠다는 다짐인 셈이다.
이들은 2월 임시국회 ‘쟁점법안 논의 불가’라는 지도부 방침에도 불구하고 국가보안법 법사위 상정, 과거사법 본회의 처리, 개방형 이사제 수용 등 사학법 전향적 대처 등을 주장하며 의원총회 소집을 요구해 놓은 상태다.
남경필 의원은 “2005년 가을 정기국회 시작하기 전까지 당이 환골탈태했다는 이미지를 심어줘야 한다”며 “박근혜 대표가 희망을 제시하지 못하면 그땐 다른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당 일각에서는 지난해 정기국회 폐회 이후 원내수석부대표 사퇴의사를 밝혔던 남 의원이 김덕룡 원내대표에게 사퇴 철회 조건으로 당 개혁 동참을 요구했으며, 당 개혁이 실패했을 때는 모종의 행동을 함께 한다는 조건을 제시했다는 설이 나돌고 있다. 여기서 모종의 결단은 소장파 집단 탈당으로 보는 분석이 적지 않다.
소장파와 가장 대척점에 서 있고, 그간 한나라당 주류세력이었던 보수파의 반격도 만만치 않다. 보수파 모임인 ‘자유포럼’은 20여 명의 소속 의원별로 5백만원씩 갹출해 1억원을 모아 보수이념 재무장을 위한 기금으로 활용할 방침이다. 소장개혁파의 거센 도전에 대비해 보수이념을 재정립하겠다는 것이다.
이 모임의 김재원 의원은 “수구보수 이미지로는 더 이상 당의 주도세력이 될 수 없다”며 “시대 변화를 반영한 합리적인 새로운 보수이념을 정립해 당의 변화를 이끌겠다”고 말했다. 그는 “조성된 기금으로 보수 성향 학자나 전문가에게 의뢰해 진보적인 이슈에 대한 보수적 관점의 정책 매뉴얼을 작성할 계획”이라며 “당 안팎 보수 인사들을 연결하는 일종의 ‘싱크탱크’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의 지역적 토대인 TK(대구·경북) 지역에서 전개되는 신보수 운동도 주목된다. TK지역 교수, 언론인, 시민단체 등 주요인사 1백여 명은 내달 초 구보수탈출을 선언하는 성명서를 발표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 손학규 지사(왼쪽)와 이명박 시장. | ||
중도파 모임인 ‘국민생각’은 지난 17일 정기총회를 갖고 당 중추세력으로 나설 것임을 천명했다. 이들은 이날 ‘2005년 대국민 실천 약속’이라는 선언문을 통해 “‘국민생각’은 한나라당 집권을 위해 어떤 희생과 고통도 마다하지 않겠다”며 “외연확대와 집권기반을 공고히 하는 일에 매진하겠다”고 다짐했다. 국민생각은 나경원 김형오 의원이 새로 회원으로 가입하는 등 몸집불리기를 시도중이다.
이들은 당 지도부에 대한 맹목적이고 정략적인 공격을 단호히 배격하겠다면서도 지도부가 당 운영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는 저항운동의 선봉에 서겠다고 결의했다. 박 대표를 둘러싼 ‘친박’ 대 ‘반박’의 분파적 싸움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경고인 셈이다.
당내 비주류인사인 이재오 홍준표 김문수 의원이 주도하는 ‘국가발전연구회(발전연)’도 18일 모임을 갖고 세결집 및 확산에 나섰다. 발전연은 내달 ‘정치 아카데미’를 개설, 당 안팎의 인사를 대상으로 한국정치사, 정치철학 등 강의하는 등 조직적인 정치학습을 실시한다. 현재 의원 위주의 소모임에서 일반 당원이나 국민과 함께 하는 모임으로 외연확대를 꾀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정치세력화 움직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당 한 중진의원은 “모임을 주도하는 인사들은 오는 5월 원내대표 경선이나 내년 지방선거를 겨냥하는 사람들”이라며 “당이 앞으로 시끄러워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당에서는 내년 서울시장 후보로 원희룡(수요모임), 맹형규(국민생각), 이재오 홍준표(이상 발전연), 박진(푸른모임) 의원 등이, 경기지사 후보로는 남경필(수요모임), 김문수 전재희(발전연), 임태희(푸른모임) 의원 등이 유력하게 언급되고 있다.
당 한 관계자는 “이명박 서울시장, 손학규 경기지사는 각각 이념적 성향이 비슷한 발전연과 수요모임과의 접촉 빈도를 높이고 있다”며 “당내 모임들의 세력 경쟁은 결국 2007년 대선 후보 경쟁과 맞물려 당내 갈등을 더욱 과열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박형준 의원은 “당내 세력간 경쟁을 섣부른 편가르기로 변질시키거나 ‘너는 누구냐’는 식의 저급한 파벌싸움으로 호도해서는 안된다”며 “당이 치열하게 고민하고 선의의 투쟁을 벌일 때 한나라당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남경필 의원도 “당내 세력간 경쟁이 지금은 원심력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에는 구심력으로 선회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영욱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