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드뱅크 정당론이란 ‘영남지역당’ ‘수구꼴통당’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떨쳐 내기 위해 당내 수구 보수파 의원들이 자진 탈당해 신당을 창당하는 시나리오다. 즉 금융계가 배드뱅크를 통해 부실채권을 처리하듯이 한나라당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최근 TK(대구경북)에다 6공 민정당 출신인 강재섭 의원이 원내대표로 선출되면서 과거사 및 영남지역과의 단절을 위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배드뱅크 정당론은 설득력을 더 해가고 있다. 이는 강 원내대표 선출로 당의 안정은 기했지만 차기 대권 전략에는 마이너스가 됐다는 지적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당 대표(박근혜)―원내대표(강재섭) 투톱 라인 모두가 TK 출신이고,여권으로부터 박 대표가 3공 유신의 딸이라는 맹공을 받는 상황에서 6공 출신이 원내대표를 맡은 현 상황을 탈출하는 방식으로 원조 보수 세력들이 신당을 만들어 한나라당의 부정자산을 승계해 당을 떠난다는 전략인 것이다.
TK를 기반으로 한 원조 보수신당이 창당될 경우 현재의 한나라당 이념적 좌표는 자연스럽게 중도 쪽으로 ‘좌 클릭’하게 되고, 호남과 충청 등 지역연대를 통한 외연확대도 한결 수월해진다는 논리다. 한마디로 현재 한나라당이 갖고 있는 지방색과 과거사를 겨냥한 여권의 뭇매를 대신 맞아줄 진짜 `TK 수구꼴통당’을 만든다는 핵심이다.
이는 일단 한나라당이 `보수신당’과 잔류 한나라당으로 갈라선 뒤 보수신당은 TK를 중심으로 전통 지지층을 책임지고, 잔류 한나라당은 외연확대를 추진한 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두 당이 다시 결합한다는 것으로, 일종의 `위장 이혼’인 셈이다. 여권의 공격은 분산시키되, 지지세력은 불리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리는 전법이다.
한나라당에서 이 같은 주장은 간혹 흘러 나왔지만 총대를 메줄 적합한 인물이 없었던 데다 분당을 부추긴다는 비판 여론 때문에 실현가능성이 없는 구두선 전략에 그쳐 왔다. 그러나 최근 행정도시법 국회통과의 후폭풍으로 당이 극심한 내홍에 시달리고, TK 출신의 강 원내대표가 선출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이래서는 도저히 안되겠다’는 당내 위기의식이 최고조에 달한 것이다.
이런 위기의식을 절감한 한 수도권 출신 의원이 악역을 맡겠다고 자원한 것이 배드뱅크 정당론의 기폭제가 됐다. 영남 출신 한 의원은 “수도권 의원 한 분으로부터 `TK당에다 과거당이라는 이미지를 갖고는 차기 대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제로’라며 `이른바 수구꼴통 의원들과 함께 당을 위해 나갈 수 있다’는 얘기를 직접 들었다”고 말했다.
이 수도권 의원은 당을 떠났다가 다시 결합한다는 분명한 약속과 재결합 이후의 확실한 신원(伸寃·억울하게 뒤집어쓴 죄를 씻음) 보증을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의원은 함께 거사를 할 의원으로 영남의 K, L, 또 다른 L 의원 등 서너 명과 수도권 지역의 5~6공 출신 의원 일부 등 10여 명을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영남 및 수도권 소장파들이 당내 민정계 출신과 보수파 의원의 의중을 은근히 떠 보며 실현 가능성을 점검하는 등 ‘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한 당직자는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거들떠 보지 않았던 의원들의 분위기가 많이 누그러졌다”며 “2007년 대선에서 또 다시 정권 탈환에 실패하면 나라와 당이 망한다는 생각을 가진 의원들이 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배드뱅크 정당론에 공감하고 있는 한 의원은 “10년 야당생활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방안이 있다면 이 한 몸 기꺼이 희생할 각오가 돼 있다”며 “금배지 한 번 더 다는 것보다 정권을 되찾아 국가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간절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의원들은 대선 직전 배드뱅크 정당과의 합당, 탈당한 의원들의 복당 및 명예회복 보장, 그리고 적절한 보상책 등을 준비한 뒤 배드뱅크 정당 참여 의원들과 논의해 절충안을 마련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은 보수파 의원들과 협상이 진척되면 박 대표 등 당 지도부는 물론 차기 대권 주자인 이명박 서울시장, 손학규 경기지사 등 이른바 `빅3’의 보증도 받아내겠다는 복안이다. 누가 대권 후보가 되든 확실한 보증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는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소장파 한 의원은 “한나라당이 아무리 정책과 감정적 접근법으로 호남을 끌어안고, 충청을 공략한다 해도 현재의 인적 구조로는 정권 창출은 백년하청”이라며 “차떼기당, 수구보수당, 과거 회귀당 등 부정적 이미지를 털어내는 수단은 인적 분산을 통한 재창당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부산 출신 한 의원은 “오죽하면 이런 시나리오까지 나왔겠느냐”면서도 “당내 보수파 의원들이 어느 정도 이해하고, 동참할지 의문”이라며 부정적인 의견을 밝혔다. 실제로 보수파 의원 사이에선 자신들을 쫓아내려고 소장파 의원들이 만들어 낸 술책으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한 보수파 의원은 “특단의 위기 극복방안이 필요하다면 보수파들이 당에 남고, 개혁파들이 나가는 역 배드뱅크 정당으로 해도 되는 것 아니냐”며 “배드뱅크 정당론은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보수파를 고사시키려는 전략으로밖에 볼 수 없다”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또 이 같은 프로젝트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비밀보장이 우선 돼야 하는데 프로젝트가 무르익기도 전에 공개된 것 자체가 성사 가능성을 떨어뜨렸다는 분석이다.
소장개혁파 한 의원은 “정치인들이 밀실에 모여 주고받기 식으로 흥정하던 시대는 끝났다”며 “국민을 중심에 놓지 않는 한 어떤 대권 전략도 백전백패”라고 지적했다. 그는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으려면 꼼수를 부릴 것이 아니라 이념과 가치에 따라 의원들이 이합집산을 하든지, 아니면 다른 정당과 합종연횡을 하든지 정정당당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영욱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