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포스터 촬영지로 가고 있는 정 대표. | ||
실제로 지난주 중반부터 정 대표와 노 후보간에 오간 발언들을 종합하면 양자간 선거공조 체제 출범은 초읽기에 들어간 것처럼 보인다. 지난 5일 노 후보가 서울 여의도 유세에서 “정 대표와 내가 단일화에 성공, 하나가 됐다. 함께 책임지고 새로운 정치를 이뤄내겠다”고 말하자 정 대표는 울산지역 기자간담회를 통해 “내 자신은 중도, 노 후보는 중도진보라고 생각하며 노 후보와 같이 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왔다. 노 후보가 앞으로 남은 선거기간 열심히 해 대통령으로 당선되길 바라고 있다”고 화답했다.
정 대표는 또 선거공조 지연에 대해서도 “그런 인상을 줬다면 유감스러운 일이며 민주당과 정책조율이 마무리됐다고 판단되면 빠른 시간 내 노 후보와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노 후보는 같은 날 부산유세에서 “정 대표가 부잣집 도련님이라 잘 모를 줄 알았는데 알 것은 다 알더라. 특히 러시아, 중국, 미국, 일본 등 주변정세에 밝다”고 치켜세웠다.
6일 두 사람이 나눈 교감은 선거공조를 위한 분위기 조성 수준을 넘어 공동정부에 대한 공감대까지 나아갔다. 노 후보는 이날까지 계속된 부산 유세에서 “대통령이 된다면 정 대표와 임기 5년간 ‘국정의 동반자’로서 공동의 책임을 지고 새 정치와 국정개혁을 이루겠다”고 말했다.
전날 정 대표가 “노 후보와 우리가 일을 같이하게 된다면 문자 그대로 국정 5년을 책임진다는 책임감과 자신감을 바탕으로 함께 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발언에 화답한 것으로 정치권에서는 ‘공동정부론’에 대한 합의로 해석됐다. 뿐만 아니라 양측 선거공조체제 출범의 조건으로 정 대표측이 제기한 문제들도 대부분 해소된 상태다. ‘2004년 분권형대통령제 개헌안 발의’는 노 후보측이 수용했고 정 대표를 명예선대위원장으로 추대키로 함으로써 정 대표의 위상을 최대한 배려했다.
최근 협상이 진행중인 정책조율 문제 역시 합의문 작성 단계에 들어갔다. 이제 두 사람이 회동하는 절차만 거치면 양자의 선거공조 체제 출범에 더이상 걸림돌이 없는 셈이다. 그러나 정 대표는 좀처럼 다음 행보를 하지 않고 있고 통합21에서는 오히려 ‘속도조절론’을 제기하고 나섰다.
김행대변인은 8일 “선거에서 최대한 폭발력을 발휘하기 위해 속도조절을 하고 있다”며 “정책공조가 타결되더라도 적당한 공조 방식과 시기를 결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선거일을 겨우 10일 정도 남겨놓은 시점에서 ‘적당한 공조 방식과 시기’를 결정하면서 속도조절까지 할 경우 물리적으로 양당의 공동선거운동 기간은 일주일이 채 안될 수밖에 없다.
특히 정 대표가 후보단일화 이후 2주일 이상 선거공조체제 출범을 차일피일 미뤄온 점까지 감안하면 결국 선거공조는 ‘립 서비스’에 그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사실 이 정도 기간으로는 말만 공동선거운동이지 양측이 홍보전략 한번 논의하기 어렵다. 통합21의 당조직이 선거운동에 투입되는 것도 기대난이다.
기껏해야 정 대표가 지원유세에 나서는 정도인데 그것 역시 몇 차례에 그칠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정 대표가 유세에 참여해서도 노 후보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기보다는 후보단일화라는 자신의 정치적 결단을 집중 부각시키는 등 차차기 후보로서의 이미지 부각에만 몰두할 가능성도 있다. 물론 통합21과 민주당측은 정 대표가 막판 일주일만 열심히 뛰면 후보단일화의 시너지 효과를 충분히 거둘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 후보 단일화 성사 전인 지난달 20일 노무현 후보(왼쪽)와 정몽준 대표가 민주당 후원회에서 손을 맞잡았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그간 정 대표가 분권제 개헌론, 정책조율 등을 선거공조의 조건으로 내세웠지만 내심 차기 정부에서 노 후보에 버금가는 위상을 확보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온 만큼 이 같은 공동정부론에 대한 교감이 구체적인 내용 합의로 이어질 경우 선거공조체제는 즉각 출범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정 대표가 요구하는 것은 과거 DJP연대처럼 단순한 지분이 아니라 노 후보와 자신이 차기정부의 공동주인이라고 인식할 수 있을 정도의 모양새라는 점이다. 사실 한나라당측에서 양당간 밀약설 등을 제기해 왔으나 통합21측은 그간 민주당과 정책조율을 하는 과정에서 공동정부 구성을 공식 당론으로 제기한 적은 없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심지어 정 대표는 당내 지분요구에 대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여왔고 지난 6일 회의에서는 자신이 차기정부 총리로 거명되는 것과 관련,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어린애 장난도 아니고…”라고 말했다. 그러나 비공식적 경로로 통합21측은 민주당측에 수차례 지분요구를 해왔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심지어 통합21측 협상단 일부는 민주당과의 공식 협상테이블에서 ‘이번 후보단일화는 97년 DJP공조보다 더 큰 시너지 효과가 있는 만큼 JP 때보다 더 큰 지분을 보장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요지의 입장을 노골적으로 표명하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따라 민주당측 협상단은 통합21측의 속내가 결국 지분 요구에 있다고 보고 이를 노 후보에게 건의했으며 결국 노 후보가 6일 사실상 이를 수용하는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것이다.
정 대표도 이제 정치권에 뼈를 묻어야 하는 만큼 노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높아질수록 더욱 적극적으로 선거운동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정 대표가 후보단일화를 통해 결과적으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게 치명적 타격을 가한 만큼 이 후보가 당선될 경우 자신의 정치적 입지와 현대중공업 오너 위치는 물론 현대그룹 전체가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치권에서 강력한 야당세력으로 남아있는 것이 자신과 현대그룹을 보호하는데 훨씬 유리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정 대표는 비록 노 후보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유세에 나서고 있지는 않지만 이 후보에 대한 비판을 통해 이미 노 후보를 간접적으로 돕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정 대표는 8일 이 후보가 긴급기자회견을 갖고 8대 정치개혁 공약을 제시한데 대해 “이 후보가 정치보복 하지 않는다고 자꾸 강조할수록 더 안믿게 된다”며 “내가 노 후보를 150% 돕고 있는 것 아니냐”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이 정도의 효과조차 기대할 수 없으리라는 비관적 전망도 여전히 제기되고 있다.
정 대표의 한 핵심측근은 최근까지 “정 대표에게 노 후보의 선거운동 지원에 적극 나서라는 요구는 인간적 한계를 뛰어넘으라는 것과 같다”고 말해왔다. 또다른 측근은 “정 대표가 아침 회의에서는 노 후보를 적극 지원하라고 했다가 오후에는 후보단일화 여론조사의 문제점을 강도높게 지적하는 등 아직도 후보단일화 실패에 따른 상실감을 정리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정 대표는 공동선대위 구성을 앞두고 선대위원장을 맡지 않는 방안을 심각하게 고려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결국 정 대표가 이성적으로는 노 후보를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심정적으로는 노 후보를 돕겠다는 의욕을 느끼지 못하는 모순된 상황에 빠져 있으며 이런 상황이 2주일 넘게 지속된 것이 정 대표 안개행보의 가장 중요한 이유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 통합21의 한 인사는 “정치권 일각에서 제기돼온 차기 정부에서의 지분 보장, 즉 ‘공동정부론’에 대해서 지난 6일 양자가 사실상 교감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정 대표측에서 다시 ‘속도조절론’을 요구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전제한 뒤 “정 대표가 노 후보 선거 지원을 계속 지연시킨 것은 지분보장이 아니라 심리적 이유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 대표의 정치적 중립을 요구하는 보이지 않는 압력도 상당한 수준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정 대표의 친인척 등 현대관계자와 재계 인사들은 물론 정 대표와 개인적 인연이 있는 상당수 인사들이 꾸준히 대선 중립을 권유하고 있다는 것.
한나라당 역시 인맥을 총동원, 정 대표에 대한 압력에 나서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행 대변인이 8일 “여러 경로를 통해 ‘대선에서 중립을 지키라’는 요구가 많다”며 “정 대표가 외부 인사 만나기를 꺼릴 정도”라고 말한 것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필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