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일 열린우리당 전당대회에서 유시민 후보가 연설하고 있다. 이종현 기자jhlee@ilyo.co.kr | ||
특히 경선 중반에 돌출된 유시민 후보의 ‘반 정동영, 친 김근태 발언’으로 빚어진 당내 계파 간 신경전이 한동안 지속될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정가에선 유 후보의 발언을 정동영 통일부 장관에 대한 선전포고로 해석했다. 유 후보의 선공에 정 장관은 ‘침묵’으로 대응했다. 대신 총대를 멘 실용 노선의 정동영 계파가 유 후보를 겨냥해 십자포화를 쏟아 부었다.
경선 결과를 놓고 봤을 때, 유 후보의 정 장관 비난 전술은 실패했다는 게 여권의 대체적 분석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2·3위권을 차지했던 개혁당 출신의 김두관·유시민 후보가 정작 본선에선 맥없이 쓰러졌다는 얘기. 김두관 전 행자부 장관의 낙마는 이번 경선의 최대 이변으로 꼽혔고, 유 후보 역시 4위에 그쳤다. 선출 상임중앙위원 4명 가운데 염동연 장영달 후보에 이어 겨우 턱걸이한 신세가 됐다.
이 같은 결과에 대해 다양한 정치 해석이 잇따르고 있는 가운데 “유 의원의 ‘반 정동영-친 김근태 발언’이 오히려 역풍을 맞은 꼴”이라는 견해가 적지 않다. 일각에선 ‘정동영-유시민 전쟁’ 초반전이라 할 수 있는 예비경선 전후부터 ‘정동영 승리’는 감지됐다고 지적했다.
지난달 10일 치러진 전당대회 예비경선 결과, 실용주의자인 정 장관의 노선과 성향이 비슷한 문희상 송영길 염동연 후보 등이 선두권을 형성했다. 이들 ‘문-송-염’ 진영에는 정 장관 계보로 분류되는 김재홍 박영선 전병헌 의원 등(이상 문희상 진영)과 김현미 이종걸 의원 등(송영길 진영)이 포진했다. 특히 송영길 후보는 예비경선 주자 10명 가운데 하위권으로 분류돼 전당대회 출마가 불가능했으나, 막판에 정동영 계파 의원들의 조직적인 지원으로 기사회생했다는 후문이다.
반면 김근태 보건복지부장관이 물밑 지원한 것으로 알려진 장영달 후보는 고전을 면치 못했던 것. 특히 신기남 전 의장이 예비경선조차 통과하지 못한 것도 정 장관의 출마 만류를 거부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이에 당 안팎에서는 “정동영 장관이 김근태 장관에 판정승했다”는 얘기가 나왔다.
이와 달리 개혁당 출신인 김두관-김원웅-유시민 후보가 예선을 ‘무사히’ 통과하면서, 본선 결과는 쉽게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그러면서 경선 구도는 ‘문희상-송영길-염동연’ 등 범 실용주의 진영과 ‘김원웅-김두관-유시민-장영달’ 등 범 개혁주의 진영의 대결로 압축됐다.
그런데 범 개혁주의 진영은 경선 초반부터 불기 시작한 ‘문희상 대세론’을 잠재울 묘안을 필요로 했다. 문 의장이 지난 2일 ‘경선 과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처음부터 ‘대세론’이 퍼지면서 다른 후보들의 공격을 받았던 점”이라고 밝혔듯이, 개혁 진영에선 초반부터 ‘문희상 대세론’을 꺾어야 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유시민 발언’이 터져 나오면서 당권경쟁은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유 후보는 지난 3월22일 발매된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DY(정동영 장관의 영문 이니셜)계는 지극히 폐쇄적이고 퇴행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우리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총선 이후 다수당을 차지한 그 좋던 초창기 4개월을 기간당원제를 폐지하기 위해 허송세월했다는 것이다. (중략) 지금은 당을 바르게 건설하는데 그들과 연대할 수 없는 적대적 관계로 변했다”고 말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가 그는 “기간당원제를 근간으로 한 정당 민주화에서 이렇게 퇴행적인 모습을 보이는 정동영 장관쪽과 타협은 불가능하다”며 반 정동영 선언을 했다.
그러면서 김근태 장관 쪽과의 연대 의사를 피력했다. 유 의원은 “지금 우리가 지향하는 정당 개혁을 위해 연대할 수 있는 세력은 GT(김근태 장관의 영문 이니셜)계밖에 없다. 손잡고 함께 갈 수밖에 없다”고 밝혔던 것이다. 다시 말해 재야파 창구로 김 장관의 계파인 ‘국민정치연구회’ 장영달 후보와의 연대 의사를 피력한 것이다.
한편으론 유 후보가 같은 개혁당 출신인 김두관 후보와 경쟁을 염두에 둔 포석이었다는 지적이다. 열린우리당의 핵심 인사는 “재야파(장영달)는 영남권에서 지지를 받고 있던 김두관 전 장관과의 연대를 모색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에 유 의원이 선수를 치고 나온 것 같다. 장영달 후보와의 연대 의사를 천명함으로써 경선에서 2등을 차지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유 후보가 재야파의 적극적 지지를 받지 못한다 해도 최소한 재야파와 김 전 장관의 연대전선을 이완시킬 수 있는 효과를 노렸다는 얘기다. 당시 각종 여론조사에서 1위는 문희상으로 나왔고, 2위와 3위는 김두관-유시민 후보가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유 후보가 재야파와의 연대를 통해 ‘2위 굳히기’를 시도했다는 해석이다.
일각에선 유시민 발언에 대해 ‘전통적’ 정치 법칙의 답습이라고 지적했다. 여권의 한 인사는 “자신의 힘이 떨어졌다고 판단할 때 정치 강자를 공격함으로써 정치적 이득을 꾀하는 전형적인 정치법칙을 유 의원이 그대로 답습했다”고 관측했다. 차기 여권의 유력한 대권 주자인 정 장관을 공격함으로써 유 후보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정 장관과 같은 반열에 오르게 하려는 전략이었다는 설명이다.
▲ 유시민 의원의 ‘반 정동영’ 발언에 대해 정 장관은 직접 나서지 않고도 이겼다는 평이다. | ||
하지만 유 후보의 발언은 만만치 않은 역풍을 맞았다. 정동영계 의원 등 구 당권파에서 유 후보를 겨냥해 집중포화를 날렸던 것이다.
유 후보의 ‘반정동영 발언’에 정면 반박하고 나선 이는 바로 송영길 후보였다. 송 후보는 “유시민 후보는 치밀한 정치공학, 게임의 법칙 달인”이라며 “분열주의적 개혁행태를 즉각 중단하라”고 맞받아쳤다. 그러면서 유 의원을 ‘노풍 바람에 편승해 개혁당 장사로 소득을 올린 인물’ ‘완장 찬 골목대장’ 으로 비꼬았다.
실용 노선을 표방한 ‘국민참여연대’(국참연)의 이기명 상임고문은 “왜 정동영 김근태를 자꾸만 들먹여서 편을 가르느냐”고 유 후보를 공격했다. 그는 “말 좀 잘한다고 판 휘젓고 다니면 말 못하는 사람 서럽다”며 “자멸은 저 혼자 죽은 것이지만 공멸은 다 죽는 것이다. 죽으려면 혼자 죽어라. 사퇴하면 된다”고 힐난했다.
정 장관이 속한 ‘바른정치모임’ 회장인 이강래 의원도 “유신시대식 이분법이며 분파주의다. 그의 행동하는 경박성을 경고한다”며 강한 어조로 유 의원을 비난했다. 김영춘 의원도 “전당대회를 대선의 전초전으로 만들었다. 유 의원이 그토록 싫어했던 궁중정치, 음모적 권력정치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화살을 날렸고 김현미 임종석 등 386 의원들의 비난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문희상 후보도 “정동영 장관을 비난한 유시민 후보의 발언은 선거전략 차원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꼼수는 이제 효과가 없을 것이다”며 “유 후보의 오류”라고 대놓고 비판했다.
이처럼 유 의원은 벌집을 쑤셔놓은 셈이 됐다. 유 의원은 사면초가였으며, 그나마 그를 지지하고 나선 것은 김두관 후보였다. 이에 유 의원은 29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김두관 후보님, 고맙습니다’란 제목의 글을 통해 “김두관 후보는 저에 대한 인신공격이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유시민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며 당 지도부에 들어가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며 “경쟁후보가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손을 내미는 행위,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김두관-유시민의 연대는 지난 2일 전당대회장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전당대회장 안팎에서 일부 대의원 사이에는 “1·7”이라는 짧은 대화가 오갔다. ‘1·7’은 다름 아닌 1인2투표제에 따라 기호1번인 김두관과 기호7번인 유시민에게 동시 투표하라는 은밀한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다. 심지어 양 진영 운동원들은 한 곳에 모여 ‘김두관’과 ‘유시민’을 연호하며 공동 선거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김두관이나 유시민 지지 피켓을 들고서, 두 후보를 연호하며 분위기를 띄웠던 것.
그럼에도 유 후보는 4등(2천8백38표)으로 ‘간신히’ 상임중앙위원에 선출됐으며, ‘일하고 싶습니다’란 캐츠프레이즈로 한 표를 호소했던 김 후보는 유 후보와 불과 1백51표 차이로 5등(2천6백87표)에 머물러 또한번 좌절의 고배를 마셨다.
이에 대해 정치권에선 유시민 발언의 역풍으로 김 후보가 지도부 입성에 실패했다고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열린우리당의 핵심 관계자는 “유 의원이 정동영 계열 등으로부터 집중으로 공격 받으면서, 개혁진영이 ‘유 의원이 탈락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퍼졌던 것으로 알고 있다.
반면에 김두관 전 장관은 막판까지 당선안정권이라고 봤다. 그러자 개혁 진영 대의원들이 유시민-장영달 후보에게 한 표씩 몰아주자는 전략투표가 이루어진 것 같다”고 분석했다.
여당 관계자들은 당권 경쟁이 한창이었던 지난 3월에 치러진 16개 시·도당 위원장과 중앙위원회 위원 경선에서도 정동영계 후보들이 각각 50% 이상을 장악, 전당대회 결과가 어느 정도 예측됐다고 말한다.
정치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고 흔히 말한다. 지난 2003년 4·24 재보선 당시 민주당과 개혁당의 선거 공조지역이었던 경기 고양 덕양갑에 출마했던 유시민 후보의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았던 정동영 장관.
그리고 지난해 총선 당시 당 의장이었던 정 장관이 ‘노인 폄훼 발언’으로 궁지에 몰려 선대위원장직 사퇴 주장이 당 안팎에서 일고 있을 때 “고의적으로 한 말도 아니고, 그것으로 인해 선대위원장을 교체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며 정 장관을 엄호했던 유시민 의원. 두 사람은 이번에 ‘동지’에서 ‘적’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유 의원의 선공에 정 장관 계열의 반격으로 일단 정 장관이 ‘선승’했다. 여기서 ‘선승’이라 표현한 것은 당 안팎에선 정 장관과 유 의원의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동영-유시민 2라운드’는 언제, 어떤 방식으로 벌어질 것인지 자못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