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여 년간 악역을 맡은 적이 없는 박상원. 그의 선한 이미지 때문일까,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사진=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그런데 박상원과 얘기를 나누면서 그 이유를 조금은 알듯 했다.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지킬 줄 아는 지혜와 어떤 환경에도 굴하지 않는 의지를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이 ‘전성기’라고 표현하는 예전과 지금의 나는 다르지 않아요. 인기란 의식하게 되는 순간 배우에겐 해로 작용하게 되죠”라며 예의 그 부드러운 미소를 전하는 마흔일곱 살의 이 배우. 그에게 제2, 혹은 제3의 전성기란 표현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삶도 연기도 별다른 굴곡 없이 꾸려올 수 있었던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기자는 박상원이 말한 ‘(더 많지도 적지도 않은)세 편의 CF’라는 표현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박상원은 인터뷰 중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난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과거 전성기 때나 지금이나 줄곧 세 편의 CF를 유지하고 있어요. 무엇이든 과한 것은 좋지 않다고 봐요. 그때도 CF 섭외가 더 많이 들어왔지만 딱 그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했고 또 지금도 세 편 정도는 꾸준히 유지해 가고 있어요.”
삶에서도 연기에서도 박상원은 욕심 부리는 것과는 천성적으로 맞지 않다고 한다. 흔히 비슷한 연배의 연기자들이 드라마 서너 편씩을 하고 있는 것과 영화의 조연으로 종종 출연하고 있는 것과 비교해 봐도 박상원의 행보는 분명 남다르다. 돌이켜 보니 그는 드라마도 고작 일 년에 채 한 편도 하지 않았다. 평균 2~3년 걸러 한 편씩, 잊을 만하면 박상원의 드라마 출연 소식이 들려오곤 했다. 과거 화려한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출연했던 ‘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 ‘백야3.98’ 등 모두가 1년 넘는 준비 과정을 거친 뒤 택한 작품이었다.
“제 성격 자체가 여러 편에 겹치기 출연하는 건 어려워요. 한 작품을 해도 나의 색깔과 맞는 캐릭터를 고르고 준비를 하다 보니 그렇게 한 2년 정도에 한 번씩 하게 됐던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결과적으로 큰 작품에 많이 출연한 편이죠.(웃음)”
▲ 부인 김수경씨와 함께. | ||
‘태왕사신기’는 김종학 감독이 사활을 걸고 제작하고 있는 대작이다. 제작 규모나 출연진과 스태프들의 면면을 봐도 해외 시장을 겨냥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익히 알려진 대로 김종학 감독은 해외 90여 개국에 판권 계약을 마친 상태다. 박상원은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역사상’이란 표현이 맞을 것 같다. ‘태왕사신기’는 국내 드라마 사상이라기보다 아마 국내 어느 영화보다도 규모가 큰 작품일 것이다. 범아시아권을 넘는 작품일 텐데 아마 다시 이런 드라마가 나오긴 힘들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박상원에게 함께 출연하게 된 후배 연기자 배용준에 대한 평을 부탁하자 이런 얘기를 들려준다.
“용준이, 아주 대단한 친구예요. 전 원래 ‘자기 관리’라는 말은 좋아하지 않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자기 관리에 아주 철저한 사람이죠. 이번 작품은 김종학 감독님도 ‘내 평생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 같다’는 표현을 하실 정도로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드라마예요. 그만큼 용준이 어깨가 무거울 텐데 분명 잘 해낼 거라고 믿어요.”
박상원은 이어 고현정에 대한 에피소드도 들려주었다. 박상원은 고현정과 무려 세 작품에서 상대역으로 출연했던 인연이 있었다. 아마 고현정과 키스신을 가장 많이 나눈 남자 배우이기도 할 것이다.
“현정이랑은 대단한 인연이죠. 현정이가 작품을 많이 안 했어요. 여섯 작품 했으니까. 그런데 그 중 ‘여명의 눈동자’ ‘여자의 방’ ‘모래시계’ 세 작품에서 내 상대역으로 나왔어요. 요즘엔 통 못 보고 그저 연락만 가끔 해요. 현정이 아주 착해요.(웃음)”
박상원은 고현정이 결혼과 함께 은퇴한 후 활동을 하지 않는 동안에도 1년에 한두 번은 만나는 우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기자가 “말로는 다 할 수 없었던 상황일 것을 안다”며 운을 띄우자 그는 그저 웃음만 보였다.
박상원은 가족이나 사생활에 대해서는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꺼린다. 늦은 나이인 서른다섯 살에 결혼해 아들, 딸을 낳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박상원은 ‘가족의 소중함’에 대해 남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그는 언젠가 절친한 후배 정준호에게 “솔직히 말해 결혼해 보니 대종상에서 연기상 타는 것보다 아이들이 상장 하나 받아오는 게 더 기뻐. 결혼을 하면 일에서의 성공은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어”라는 조언을 건네기도 했단다. 박상원은 “누가 들으면 대종상에서 상 한 번 못 탄 배우가 그런 말 한다고 웃을지 모르지만 그건 일례를 들어 한 말이고 실제로 그렇더라”며 크게 웃었다.
그의 아내 김수경씨와는 소개로 만나 첫눈에 반해 다섯 번째 만남에서 프러포즈를 했다고 한다. 박상원이 평소 원하던 스타일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여성이었지만 첫 만남에서 모든 점이 마음에 들었다고. 서른여덟 살의 나이에 첫 아들 도현이를 얻고 연이어 딸 지윤이를 낳은 박상원은 요즘도 어딜 가나 자식자랑에 열심이다.
▲ 최민수와 열연했던 드라마 ‘모래시계’, 영화 ‘용병 이반’의 한 장면, 뮤지컬 ‘벽을 뚫는 남자’ 제작 발표회.(위에서부터) | ||
알려진 대로 박상원은 절친하게 지내는 멤버들이 몇 명 있다. 야구선수 박찬호를 비롯해 정준호, 차인표, 아나운서 김승현이 그들. 지난해 12월 박찬호 선수의 결혼식 당시엔 국내 피로연장에서 정준호, 차인표와 함께 사회를 맡아 화제를 낳기도 했다. 박상원은 “워낙 뭉치면 재미있게 놀아요. 그나저나 이제 마지막 남은 (정)준호를 빨리 장가보내야 할 텐데 걱정이에요. 누가 그 성격을 맞출까 몰라”하며 웃음을 보였다.
박상원은 요즘 오랜만에 뮤지컬 무대에 올랐다. 국내에는 초연되는 프랑스 작품 ‘벽을 뚫는 남자’의 주연을 맡아 예술의 전당에서 땀을 흘리고 있다. 이미 프랑스와 브로드웨이 무대에서는 열렬한 호평을 받은 작품이지만 국내 공연은 처음이라 기대와 함께 부담도 크다고 한다. ‘벽을 뚫는 남자’는 어느 날 갑자기 벽을 뚫는 능력을 갖게 된 듀티율이 겪게 되는 에피소드와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한 과정이 재미있게 그려진 작품이다. 박상원은 “벽을 뚫는다는 것은 단지 물질적인 의미만은 아니다. 사람과 사람 간의 소통과 교류를 의미하는 것이라 이해하고 연기하고 있다”는 설명을 곁들였다.
탤런트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사실 박상원은 뮤지컬 배우 출신이다.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로 출발해 그동안 ‘한 여름 밤의 꿈’ ‘애니’ ‘갓스펠’ 등 여러 편의 공연에 출연해온 경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그는 춤과 노래에도 꽤 능하다. 이렇듯 드라마, CF, 공연장에서 성공을 거두어온 박상원이지만 영화에선 뼈아픈 기억이 있다고 한다. 그의 프로필을 살펴봐도 영화 작품은 단 한 줄 나와 있지 않았다. 박상원은 “사실 영화 두 편에 출연했다가 모두 망했다. 그 뒤로는 이 길이 내 길이 아닌가보다 싶어 섭외가 들어와도 출연할 엄두가 안 나더라”며 웃음을 보였다.
드라마에서 주로 선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역만을 맡아보니 생각 지도 못한 일을 겪기도 한단다. 보통 악역 배우들이 식당에 갔다가 쫓겨나거나 소금을 맞는 고초를 겪는데 반해 그에게는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는 이들이 수 없이 많았다는 것.
박상원은 “무대 위에서 땀을 흘리는 순간이 바로 배우로서 숨 쉬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며 무대에 대한 애착을 보였다. 배우라고 해서 무대를 즐길 수만은 없다. 그는‘무대에 대한 공포’가 안주하지 않고 노력하게 하는 힘이라며 느닷없이 ‘무대 신(神)’ 얘기를 꺼냈다.
“무대가 두렵지 않는 배우들은 없을 거예요. 저도 공연이 시작되기 전 무대에 올라가 구석구석까지 살펴보고 걸어보고 해요. 그러면서 마음 속으로 바라는 거죠. ‘무대 신님, 제가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지켜보고 계시죠? 오늘 공연도 잘 되도록 보살펴 주세요’라구요.”
[박상원 프로필]
1959년 4월 5일 출생
서울예술대학 연극과 졸업
1979년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로 데뷔. 드라마 ‘인간시장’ ‘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 ‘백야 3.98’ ‘토지’ ‘대망’ ‘그대 그리고 나’ 외 다수.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진행중.
조성아 기자 zzang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