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8일 제2회 대학혁신포럼에 참석한 노무현 대통령(왼쪽)이 정운찬 서울대 총장과 악수하고 있다. 정 총장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고만 짧게 인사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노 대통령은 지난 7월4일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서울대가 학력차가 반영되지 않는 내신 대신 논술 비중을 강화한 내용을 골자로 하는 2008년도 입시 기본 계획을 발표한 것을 두고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노 대통령은 취임 이후 서울대에 대해 ‘대학평준화’라는 대전제로 서울대의 현실 인식 변화와 근본적인 체질 개선을 요구해왔다. 그 밑바닥에는 적어도 이제 교육에서 ‘성적지상주의’와 ‘학벌 특권의식’은 사라져야 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노 대통령은 서울대의 ‘얼굴’ 정 총장에게 우호적이었다. 정 총장이 정부의 교육 정책에 대해 특유의 쓴소리를 토해낼 때도 노 대통령은 ‘나도 소신주의자’라며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정 총장과 단단히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작정을 한 듯 공개 석상에서 “서울대가 논술을 본고사처럼 출제하겠다는 뉴스가 나에게는 가장 배드 뉴스였다”, “서울대 문제는 적당히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는 등 ‘서울대 그룹’과 정 총장을 겨냥한 듯한 초강경 발언을 연이어 쏟아냈다.
여기에 맞서 정 총장도 “자리에 연연하지 않겠다”며 노 대통령과 당정의 압박에 굴복할 뜻이 없음을 내비쳐 ‘대충돌’ 양상으로까지 치닫고 있다.
물론 겉보기에는 입시안 파문 이후 청와대와 정부, 그리고 서울대측이 공식적인 맞대응을 자제하면서 사태는 차츰 수습국면에 접어드는 듯한 모습이다. 그러나 서울대교수협의회가 “대학의 자율권을 침해하는 처사”라며 정부에 대한 비판 성명을 발표하고, 여당 인사들이 공교육 황폐화에 대한 ‘서울대 책임론’을 제기하는 등 양측의 갈등의 골은 여전히 깊은 상태다.
여권 일각에서는 이번 파문을 노 대통령-정 총장 대결 구도로 몰아가는 것을 애써 경계하면서도 “통치자이자 임면권자로서 이 정도의 문제 제기와 개선 요구는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서울대와 정 총장측의 완강한 태도에 비판의 화살을 돌리고 있다.
이번 파문의 양 대척점에 섰던 노 대통령과 정 총장은 지난 8일 한양대 안산캠퍼스에서 열린 ‘대학혁신포럼’에서 잠시 조우했다. 이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특정 대학에 유감은 없다”면서도 “교육에 관한 한 정부가 별로 설 땅이 없다. 대통령도 별로 설 땅이 없다. 체면이 영 서질 않는다”고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대통령이 정리 발언을 끝낸 뒤 참석한 대학총장들과 악수를 나누는 자리에서 정 총장은 “말씀 잘 들었다”는 간단한 인사말만을 건넸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냉기류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와 관련, 정가에서는 노 대통령과 정 총장의 과거사와 인연까지 들춰내며 이번 파문의 배경을 놓고 갖가지 해석을 내놓고 있다. 물론 이번 입시안 파문은 입시제도에 대한 두 사람의 근본적인 인식차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 하지만 그외에도 서로에 대한 개인적 감정이나 과거의 편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갈등의 촉매제 역할을 한 것이 아니냐는 시각도 없지 않다.
사실 인생의 출발점에서 노 대통령과 정 총장은 닮은 꼴이었다. 두 사람 모두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자라났고, 각각 사법시험과 서울대라는 두 채널을 통해 ‘주류 사회’에 편입했다. 그 이후 개혁적인 성향을 보여온 점이나 자신의 생각을 좀처럼 접지 않은 ‘소신파’라는 점도 흡사하다.
그래서였을까. 대선후보자 시절 노 대통령과 정 총장은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정 총장은 대선 직전 노무현 후보의 경제정책 조언자 역할을 하기도 했고 대선 이후에는 노 대통령으로부터 여러 차례 ‘러브콜’을 받기도 했다. 현 정부 출범을 앞두고는 경제 수장 후보군에서 그의 이름이 빠진 적이 거의 없었을 정도다.
그러나 정 총장이 노 대통령의 입각 제의를 번번이 거절하면서 현 여권 핵심부와 정 총장의 관계는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한 여권 핵심 인사는 정 총장의 입각 불발과 관련해 “정 총장이 김종인 전 경제수석과의 동반 입각을 고집했기 때문에 일이 성사될 수 없었다”면서 “이때부터 정 총장에 대한 여권의 평가가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특히 정 총장이 현 정권 출범 이후 끊임없이 특유의 소신 발언을 쏟아낸 점도 여권 핵심부에는 부담으로 작용한 듯하다. 실제 그간 정 총장은 ‘본고사 부활’, ‘고교 입시제도 부활’ 등 노 대통령의 교육관과 첨예하게 대립되는 소신 발언을 계속 내놓았다. 또한 지난해 중순부터는 정부의 경제 문제에 대해서도 “정부의 시장 원칙이 사라졌다”, “게임 룰이 과도하게 왜곡됐다”면서 현저한 시각차를 드러내기도 했다.
여권 핵심부 일각에서는 ‘우호적 조언자’ 역할을 바랐던 정 총장의 이 같은 행보에 대해 비판적인 내부 기류가 형성됐던 것으로 전해진다. 반면 정 총장 역시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여당 의원들의 집중 성토를 받은 이후 현 여권에 대한 실망감을 주변에 토로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양측 모두 서로에 대한 서운함이 쌓일 수밖에 없던 상황이 이어졌던 셈이다.
이러던 차에 최근 서울대 입시안이 발표되면서 세간에 논란이 일자 노 대통령을 위시한 여권이나 정 총장 모두 과격 발언이 오갈 정도의 과잉 반응을 나타내게 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다.
익명을 요구한 정부 관계자는 이와 관련, “청와대와 일부 여당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더 이상 정 총장에게 희망이 없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고 심지어 정 총장이 야당을 대변하는 인사가 아니냐는 얘기도 들린다”며 “이번 청와대와 여당의 강경한 행보가 현 정부와 정 총장과는 더 이상 코드가 일치될 수 없다는 여권 핵심부의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해석도 어찌 보면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고 전했다.
이런 시각과는 달리 야당가에서는 여권이 최근 부동산 문제 등과 관련한 불리한 여론 흐름을 다른 쪽으로 돌리기 위해 서울대 입시안을 의도적으로 도마 위에 올려놓은 것이 아니냐는 목소리도 흘러나오고 있다.
서울대의 한 관계자도 “이번 입시안 발표는 사전에 교육부와 협의를 거친 사안이며 일부 다른 사립학교도 교육부가 정한 입시안 제출 시기인 6월30일에 맞춰 통합 논술고사를 시행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면서 “그런데도 유독 서울대만을 타깃으로 삼아 매도하려는 것은 정부가 여타 정책에 대한 비판 여론을 유리한 쪽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의도로밖에 이해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비록 가능성이 희박하기는 하지만, 항간에는 일부 정치권 내에서 일고 있는 이른바 ‘정운찬 대망론’에서 이번 파문이 확산된 또 하나의 배경을 찾는 시각도 있다.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정 총장이 야당 일각에서 ‘대안 정치인’으로 거론되는 데 대해 미리 제동을 걸기 위해 여권이 과잉 대응에 나섰고, 정 총장 지지 그룹이 이에 대해 맞불을 지피면서 입시안 논란이 정치적 파문으로까지 확산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다.
여의도의 한 정치 컨설팅그룹 관계자는 “여권 내에서는 정부의 정책 기조와 배치되는 소신을 가진 데다 나름의 영향력까지 지닌 정 총장이 야권의 대선 후보군의 일원으로 평가 받는 점에 대해 상당히 부담을 느끼고 있을 것”이라며 “이번 파문과 정 총장의 정치적 잠재력을 연관 짓는 것이 현재로서는 과잉 해석으로 보이지만 여권 내에서도 야권의 정운찬 카드에 대비한 구상 정도는 이미 마련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이번 입시안 파문의 숨은 배경을 두고 이처럼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하고 있지만 노 대통령을 비롯한 여권과 정 총장으로 대변되는 서울대 사이의 갈등이 향후 재현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선 이견이 없는 듯하다.입시제도와 대학의 역할에 대한 양측의 시각이 여전히 평행선을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과 정 총장의 충돌을 빚어낸 이번 사태가 과연 어떻게 마무리될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