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X파일 정국은 도청이라는 불법적인 수단에 대해 먼저 법적인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주장과 비록 도청이 불법이지만 국민의 알 권리와 구태 정치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녹취록 내용에 대한 전면적인 수사를 실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극히 일부만 드러난 미림팀 도청 관련 문건이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있는 셈이다.
그간 공운영 전 미림팀장이나 국정원 관계자들은 “모두 폐기처분해 더 이상의 도청 테이프와 녹취록은 없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그러나 이 같은 도청 테이프와 녹취록이 적어도 수백 건 이상 존재하고, 아직도 누군가 이를 은밀히 숨겨놓고 있다면 과연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검찰은 최근 전 미림팀장 공운영씨의 집을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이미 반납돼 폐기처분됐다던 도청테이프와 녹취문건을 ‘무더기’로 발견했다. ‘또 다른 누군가가 도청테이프와 문건을 은닉하고 있을 가능성’을 충분히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일요신문> 취재 결과 역시 ‘또 다른 도청 테이프들이, 적어도 수백 개 이상 존재한다’는 쪽으로 나타났다. 아직 모 방송국측에서 20여 개의 도청 테이프를 가지고 있고, 테이프 유출 핵심 인물로 지목되는 박인회씨(윌리엄 박)도 미국에 2백여 개의 테이프를 숨겨놓고 있다는 진술도 나오고 있다. 또한 테이프가 특정 세력을 음해하기 위해 조작됐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그리고 당시 안기부가 테이프 회수를 미끼로 미림팀장 공운영씨와 빅딜을 시도했다는 의혹도 나오고 있다. X파일 사건에 난마처럼 얽혀 있는 미스터리를 추적했다.
“(도청 테이프가 담긴) 박스 개봉 순간 소름이 끼치며 ‘차라리 이런 내용이 이렇게 많을 줄 알았으면 회수하는 척만 하고 말 걸’ 하는 등 만감이 교차했다. ‘마지막엔 죽기뿐 더하겠나’ 결심하고 자료를 정리하고 분석에 착수했다. 본 도청자료는 결코 세상에 태어나서는 안될, 당장 없어져야 할 불법의 산물이며 대 악재다. 공개된다면 상상을 초월한 대혼란을 야기할 것이다.”
최근 전 국정원 감찰실장 이건모씨(60)는 충격적인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이씨는 “옛 안기부 도청팀인 ‘미림’ 팀장 공운영씨가 1999년 국정원에 반납했다는 2백여 개의 녹음테이프와 녹취록을 당시 고위 관계자들에게도 내용을 일절 보고하지 않고 테이프를 전량 소각했다”고 밝혔다. 검찰이 테이프 조작 여부를 가리기 위해 원본도 찾아서 수사할 예정이라고 했지만 만약 전량 소각됐다면 검찰 수사도 난관에 봉착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씨는 왜 공운영씨가 구속 직전에 있는 등 미묘한 상황에서 이런 성명을 발표했던 것일까. 이와 관련해 국정원의 한 전직 간부는 “만약 정치권이나 검찰에서 잔존 테이프의 실재 가능성을 계속 제기하면서 국정원을 몰아세울 경우 상당히 부담스러울 것이다. 그래서 그 뿌리부터 차단하기 위해 서둘러 전량 폐기 자술서를 배포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히면서 “이씨는 또한 현재 미림의 테이프를 보관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종의 ‘휴전’을 선포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테이프는 2백여 개 정도 있는데 전량 폐기했으니 앞으로 국가에 더 불행한 사태가 오지 않도록 더 이상 테이프를 공개하는 일은 없도록 하자’는 일종의 호소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씨 바람대로 이번 사건의 파문이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는 않다. 먼저 또 다른 테이프의 존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씨는 자술서에서 “국정원 회수 분량 전량을 소각 조치했다. 다만 외부 상황에 대해서는 장담 못한다. 설령 외부에 잔존한다고 해도 이번 일로 세상에 나타나기는 불가할 것이라고 본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검찰이 공운영씨 자택에서 불법 도청과 관련된 듯한 녹음테이프 2백74개와 13권 분량의 녹취 보고서를 확보함에 따라 안기부 불법 도청 파문은 앞으로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될 전망이다.
그리고 공씨 외에 또 다른 인물도 테이프나 녹취록을 보관하고 있을 가능성도 크다. 이와 관련해 이번 사건의 당사자격인 MBC 이상호 기자와 상당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A씨의 증언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 천용택 전 국정원장. | ||
박씨가 또 다른 테이프를 가지고 있을 개연성은 또 있다. 공운영씨로부터 테이프를 넘겨받은 박씨가 지난 99년 삼성측에 최초로 제시했던 녹취록이 지금까지 공개된 내용과 전혀 다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박씨가 제2, 제3의, 또 다른 문건을 갖고 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한 전직 정보 관계자는 이에 대해 “박씨로부터 제시받은 테이프와 녹취록은 지금까지 공개된 녹취록과 내용이 전혀 다르다. 녹취록의 내용에는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은 유력 인사들이 등장하며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삼성그룹측이 “박씨가 언론에 공개한 녹취록 내용은 지난 99년 우리에게 보여줬던 내용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밝히고 있는 점도 이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제기되는 의혹이 일부 언론에 공개된 ‘X파일’ 테이프와 녹취록이 조작되었다는 주장이다. 국정원 인사 B씨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MBC와 일부 언론에 공개된 ‘X파일 문건’에는 1999년 압수됐던 문건에 나오지 않은 내용까지 있고, 안기부 내부 문건 양식과도 다르다”고 밝혔다. B씨는 또한 “이번에 공개된 문건은 당시 압수됐던 문건보다 도청테이프를 더 세세하게 풀어 외부자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밖에서 새로 작성한 것 같다”고 밝혔다.
국정원의 한 전직 관계자는 이에 대해 “특정 세력을 음해하기 위해 테이프 내용 중 일부만을 따로 편집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번에 유출된 문건이 전체 내용을 정리한 것이 아니고 요약본이란 점도 주목해야 한다. 녹취를 하는 과정에서 편집자가 자신의 입맛대로 정보를 가공했을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아직까지 삼성과 구 여권 인사들의 이름만 오르내리고 있고, 김대중 정권 사람들은 전혀 언급이 없는 부분도 테이프가 특정 세력을 죽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편집되었을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이번 사건에서 다른 특정 재벌 그룹이 빠진 것은 삼성의 파괴력 때문 아니겠는가. 재계에서 가장 돈이 많고 파급 효과도 클 것으로 보고 삼성에 베팅을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테이프의 유출 경위도 미스터리다. 이번 사건에 연루된 공운영씨와 그에게 박씨를 소개시켜 준 국정원 동료 임아무개씨, 그리고 삼성측과 협상을 벌였던 박인회씨의 진술이 서로 엇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공씨는 지난 7월27일 언론에 공개한 자술서에서 평소 자신과 잘 알고 지내던 임씨가 “재미교포 박씨가 삼성그룹 핵심인사는 물론 박지원 당시 문화부 장관과 돈독한 사이인데 삼성측에 사업을 협조 받을 일이 있다더라”며 테이프를 빌려갔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임씨는 ‘삼성 직원을 많이 아는 사람을 소개해 달라’는 공씨의 부탁에 따라 박씨를 소개해 준 것 외에 한 일이 없고, 이번 사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고 항변했다.
한편 박씨측은 이에 대해 “국정원 복직운동을 하던 임씨가 박씨를 찾아와 ‘삼성측을 아느냐’고 물었고 ‘안다’고 대답하자 공씨를 소개해줬다”며 “공씨는 박씨에게 ‘삼성에 좋은 재료가 있으니 당신이 중개인이 돼 우리를 도울 수 있겠느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세 사람의 증언이 엇갈리고 있는 것에 대해 “이는 파문이 커지면서 서로 책임을 떠넘기고 있는, 대형 사건의 전형적 모습이다. 지금까지의 진술을 보면 공씨와 박씨는 테이프를 통해 이익을 보려 했다는 점에서 공범 관계로 보는 게 적절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박씨가 미국으로 급히 출국하는 과정에서 MBC에서 회사 법인 카드로 박씨의 항공료 2백여만원을 지급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양측의 관계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박씨는 녹취록을 MBC 이상호 기자에게 넘긴 것과 관련, “진실을 세상에 알리겠다는 정의감에서 지난해 이 기자에게 녹취록 등을 넘겼고 녹취록을 넘겨주는 과정에서 금품 수수는 전혀 없었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박씨가 MBC의 금전적 도움으로 미국으로 출국하려 했던 것이 확인되면서 양측이 그 전에도 금전적 ‘거래’를 했을 개연성도 거론되고 있다. 한편 박씨측은 이에 대해 “박씨가 갖고 있던 8월14일자 왕복 티켓으로는 출국 일자를 앞당길 수 없어서 MBC가 부담한 것으로 들었다”며 금전적 거래 가능성을 부인했다.
이와 함께 X파일 사건에서 가장 의혹이 제기되는 부분은 천용택 전 국정원장의 석연치 않은 테이프 처리 과정이다.
우선 천 전 원장이 비밀을 목숨처럼 여기는 국정원의 제1원칙을 깨뜨리고 도청 테이프 2백여 개를 유출한 공운영씨를 처벌하지 않았다는 점이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더욱이 국정원이 공씨의 개인사업체(정보통신업체) 설립을 도와주었다는 주장도 나온다. 천 전 원장이 도청 자료를 개인적으로 활용했다는 증언들도 있다. 공씨가 언론 인터뷰에서 “천 전 원장이 테이프 잘 써먹었다”고 언급한 것도 이런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천 전 원장이 공씨를 처벌하지도 않고 오히려 그의 사업을 도와주는 등 ‘은혜’를 베풀었을까. 국정원 퇴직 직원 모임 ‘국사모’(국가를 사랑하는 모임) 회장 송영인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이미 밝혔듯이 공씨가 반납한 도청 테이프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천 전 원장 등의 비리도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도 자신들의 허물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그냥 덮어두고 넘어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정치권 일각에서는 “주로 과거 정권 인사들을 모두 겨냥한 X파일과 대규모 정계개편이 전제된 연정 구상이 동시에 터져 나온 건 의미심장한 일”이라며 X파일 정국의 후폭풍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최근 “X파일을 놓고 ‘정치적 음모’라고 얘기하는데 어떤 방식으로 정치적 음모를 한다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동기나 방법이 추론되지 않는다”며 일각의 의혹을 일축한 바 있다.
그럼에도 X파일 정국을 통해 정치권에 정치문화 개혁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면 정치권에서 자연스런 정계개편 움직임이 일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야당의 한 의원도 “한나라당이 이번 사건을 통해 수구적인 이미지를 벗어나야 한다. 도청과 관련돼 이름이 나오는 구시대적 인물을 이번 기회에 솎아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밝혀 향후 파장이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