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부터) 9일 검찰 출두하는 이학수 부회장, 홍석현 주미대사, 김영삼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 | ||
정계와 학계 일각에서는 “그냥 덮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국민들은 “어디 얼마나 추악한지 한번 까뒤집어 보자”고 목소리를 높인다. 여야 정치권은 불법 도청 테이프인 이른바 도청 X파일 수사를 둘러싸고 특별법과 특검법으로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그러나 결국 어떤 법안이 채택되더라도 도청 X파일은 상당부분 그 실체를 드러낼 수밖에 없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한 유력 대선주자는 도청 X파일 내용에 대해 ‘판도라 상자 속의 괴물’로 비유했다. 도청 파문의 장본인인 전 안기부 미림팀장 공운영씨도 자신이 “괴물을 가지고 나왔다”며 진저리를 쳤다. 이 ‘괴물’이 그 실체를 드러낼 경우, 올 하반기는 물론 내년 정국까지 파장은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될 대선구도에도 상당한 변화를 몰고올 것은 자명하다. 또한 그 파장은 정계와 재계의 질서 개편에까지 미칠 수도 있다는 예상이 적지 않다.
1. 대선구도 뒤흔든다
미림팀의 불법 도청 자료가 수집된 시기는 지난 YS 정권 시절인 94년 6월부터 97년 11월 대선 직전까지였다. 2백74개의 테이프 가운데 단 한 개의 내용만으로도 이미 잠재적 대권주자로 거론되던 2명의 유력 인사(이회창 전 총재, 홍석현 주미대사)가 속된 표현으로 사실상 날아갔다.
그렇다면 현재 거론되는 나머지 잠재적 대권주자들, 이른바 잠룡들은 과연 이 시기에 도청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정치권의 한 인사는 “현재 대권주자로 거론되는 인사들 가운데 강금실 전 장관이나 예외 대상일까, 나머지는 단 한 명도 (도청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실제 현재 유력한 대권후보로 부각되는 ‘잠룡 7인방’의 전력을 살펴보면 이들 역시 YS 정권 당시 안기부의 감시 대상 레이더망에 포함됐을 가능성이 무척 짙다. YS 정권의 최대 정적이었던 DJ와 그 측근들이 우선적인 감시 대상이 되었을 것은 상식이기 때문. 따라서 현재 여권의 유력 대선주자로 거론되는 ‘3인방’은 모두 그 사정거리 안에 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과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95년과 96년 당시 재야와 방송계에서 최고의 유명세를 안고 DJ의 신당에 전격 입당했다. 당시 이들의 거취는 정계에서 초미의 관심사였다. 이들의 입당이 당시 ‘정계은퇴 선언’ 번복으로 명분을 잃고 있었던 DJ에게 상당한 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해찬 국무총리는 당시 이미 3선급 중진의원으로 95년 서울시장 선거대책본부장, 96년 총선기획단장, 97년 대선 기획본부 부본부장 등을 잇달아 맡을 만큼 야당 선거 캠프의 브레인 역할을 도맡았다. 그에 대해 안기부가 상당히 ‘눈독’을 들였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들에 비해 YS 정권 당시 여당 의원이었던 이명박 서울시장과 손학규 경기도지사는 집중적인 감시 대상은 아니었을 것이란 의견이 상대적으로 많다. 하지만 당시 미림팀의 도청 행위가 오히려 야당에 대한 공작보다는 여권 인사들에 대한 자체 사정 및 감시 역할에 더 높은 비중을 뒀다는 점을 들어 당시 여권 인사들도 자유롭지 않았을 것이란 반론도 만만치 않다.
특히 14대 총선(92년)과 보궐선거(93년)를 통해 각각 원내에 진출한 이 시장과 손 지사는 97년 대선 정국에서 각각 이회창 후보와 이수성 후보 진영에서 뛴 전력이 있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97년 초 현철씨측은 ‘여권 9룡’ 가운데 총리 출신의 L후보를 노골적으로 밀지 않았나. 따라서 다른 캠프에서 뛰는 의원들은 당시 안기부 도청팀의 집중 감시 대상이 됐다는 얘기가 파다했다”고 전했다.
여기에 비하면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고건 전 총리는 상대적으로 미림팀의 감시 대상에서 벗어나 있었을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이다.
박 대표는 당시 정치권 밖에 있다가 이회창 후보측의 끈질긴 제의로 대선직전인 97년 12월 초 전격적으로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미림팀의 집중 도청 활동이 끝난 뒤였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박정희 향수’가 주요 변수로 등장하던 당시 대선 정국에서 그의 중요성이 한껏 부각됐고, 과거 3공 시절의 여파 등으로 박 대표가 제3자에 의해 간접적인 구설수의 대상으로 오르내렸을 가능성은 전혀 배제할 수 없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정치권에서는 이번 도청 파문에서 상대적으로 가장 득을 볼 대선주자로 ‘청렴성’을 강점으로 내세우는 고 전 총리를 꼽고 있다. 그는 명지대 총장을 지내다가 97년 3월 국무총리로 입각했지만, 당시 중립 내각의 성격이 짙었던 만큼 미림팀의 감시 대상이 되었을 가능성은 비교적 적다는 것이 중론이다.
하지만 당시 현철씨 사건 등으로 궁지에 몰린 YS가 ‘하야설’에 시달렸고, 야당에서 “고 총리가 대통령권한대행을 맡아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왔을 정도로 고 전 총리가 당시 대선 정국에서 중요한 위치에 서 있었다는 점도 무시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2. 정계 지각 대변동 부른다
최근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은 “아직 우리 정치사에서 ‘3김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서일까.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 후반기를 맞아 ‘3김 시대와의 완전한 단절’을 꾀하려 한다는 징후는 곳곳에서 노출되고 있다.
도청 정국의 등장은 때마침 노 대통령이 제기한 연정론과 맞물려서 정치권을 혼란에 빠트리고 있다. ‘비밀’을 먹고자란 도청 X파일이란 ‘괴물’의 실체와 파장에 따라 향후 급속한 정계개편의 가능성 또한 불거지고 있다.
미림팀 불법도청 대상이 당시 정국에서 3당 체제를 유지하던 신한국당과 국민회의, 자민련 등의 정치권 인사들에 집중되고, 또 그들의 입을 통해 ‘보스’인 3김씨의 밀실 야합과 정경유착 등의 어두운 면이 집중적으로 드러날 가능성이 농후한 까닭이다.
한 친여권 인사는 노 대통령의 연정론 역시 결국은 ‘3김 시대를 청산하자’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그는 “노 대통령은 비록 자신이 지역주의 타파를 주장했지만 결국 그 스스로도 지역주의에 편승해서 대통령이 된 것을 알고 있다. 그 때문에 특정 지역의 여론에 눈치를 봐야 한다는 점도 알고 있다. 그래서 더 더욱 자신의 임기 내에 지역구도만큼은 꼭 허물고 싶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인사는 현 정권이 지금의 상태로라면 과연 호남권과 각을 세울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그는 “결국 3김 시대를 어떤 식으로든 ‘정리’하지 않으면 ‘고착적 지역구도’라는 그 시대의 그림자를 지우기도 어렵다”면서 “지금의 도청 정국의 향방에 주목하는 것도 그런 배경 때문”이라고 밝혔다. 도청 정국의 파장이 결국 YS·DJ시대의 도덕성에까지 파고들 수밖에 없을 것이란 예상인 셈이다.
‘괴물’의 실체를 어디까지 덮고 어디서부터 공개하느냐 하는 기준 설정이 결국 정계 개편의 바로미터가 될 것이란 얘기도 그래서 나온다. 특검법이든 특별법이든 결국 웬만한 내용이 모두 공개되게 되면, 엄청난 후폭풍이 불어올 것이란 전망은 지배적이다.
우선 부도덕성의 범위가 3김씨나 그 측근 주변으로 한정된다면, 3김 시대를 구시대 정치로 몰아서 ‘단절론’을 꾀할 것이란 주장이 일각에서 제기된다. 그렇게 되면 노 대통령의 새 판짜기 구상인 ‘연정론’은 자연스럽게 힘을 받을 것이란 전망이다.
현재 여권이 바라는 최상의 시나리오는 한나라당의 개혁 세력과 손을 잡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정계는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개혁파의 이른바 개혁 세력 대 민주당과 자민련, 그리고 한나라당 기존 세력을 아우르는 보수 세력으로 양분되어서 재편될 것이라는 예상이다. 노 대통령으로서는 과거 3김 시대와의 단절도 이룰 수 있고, 지역구도도 허물 수 있으며, 정권 재창출도 꾀할 수 있는 일거삼득이 되는 셈이다.
도덕성의 타깃이 3김씨로 머물지 않고 그 계파는 물론 현 집권세력까지 포함된 정치권 전체로 번진다면 정치권에 대한 총체적 불신 사태과 함께 오히려 현 도청 정국의 책임을 물어 불똥이 집권 여당에 튈 것이란 전망도 일부 나오고 있다.
이럴 경우 열린우리당은 물론 한나라당도 엄청난 내분에 휩싸인 채 분당이나 집단 탈당 사태로까지 번질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범상도동계와 범동교동계가 현재 양당에 상당한 세력으로 존재하는 까닭이다.
이미 한나라당 내에서는 DJ정권의 불법 도청을 둘러싸고 두 개의 확연히 다른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박 대표를 비롯한 한나라당 지도부가 ‘호남 민심’을 의식, 도청과 DJ를 분리하고 있는 데 반해, 소위 이명박 계열로 불리는 김문수 이재오 의원 등은 ‘DJ의 도덕성’을 집중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마치 갈 길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예고하는 듯하다.
이런 헤쳐모여 식의 혼란이 초래된다면 그 와중에 한나라당 일부 세력과 민주당이 전격적으로 손을 잡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는 지난해 탄핵 정국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고, 호남 민심도 상당한 변화 조짐이 일고 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벌써부터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야 4당 협상에서도 서로의 입장을 배려하고 지나친 자극을 삼가는 등 어느 정도 우호적인 분위기를 연출해내고 있다.
3. 재계 지도 확 바뀐다
재계의 긴장감은 자못 심각하다. 일각에서는 “X파일의 내용이 결국 정경 유착에 집중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재계의 한 인사는 “96년과 97년은 그야말로 처음 경험하는 안개 정국이었다. 과연 정권교체가 정말 이뤄지는지 반신반의하는 심정으로 만나면 항상 대선 얘기뿐이었다”고 회고했다. 도청에 걸려들 소지의 대화가 다분해서 찜찜하다는 것이다.
실제 이번 ‘삼성 파문’을 바라보는 재계에서는 “삼성이니까 이 정도로 버텼지, 웬만한 기업이라면 버틸 수 있었겠나”라며 파장이 다른 대기업으로 튀는 것을 우려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재계에서 가장 걱정하는 것은 ‘괴물’의 파장이 비단 비자금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재계에서 끊임없이 떠돌고 있는 추악한 스캔들과 루머들이 여과없이 관계자의 입을 통해 마구 쏟아질 것이란 우려가 그것. 도청 녹취라는 특성상 사석에서 별 거리낌없이 마음껏 쓰는 부적절한 용어들도 쏟아질 것으로 보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삼성측이 사석에서 DJ를 ‘늙은이’로 호칭한 점이 시중에 유출된 것을 들고 있다.
재계 일각에서는 ‘괴물’의 실체와 그 파장에 따라서 경영자의 퇴진과 교체는 물론 재계 서열까지 변화할 수도 있다는 점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실제 이번 도청 파문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는 삼성은 당장 재계 1위의 위상까지 흔들리진 않겠지만 기업 이미지에 상당한 타격을 입은 것으로 보고 있다. 문제는 지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향후 그 파장이 더 커질 경우 정말 걷잡을 수 없는 여론의 악화를 두려워하고 있다.
삼성측은 벌써부터 일부 언론에서 기아차 몰락의 배후에 삼성이 있었다는 기사 등을 거론하자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며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일각에서는 97년 외환위기(IMF) 사태에 삼성의 책임론을 들먹이는 목소리도 나와서 삼성측을 더욱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한 전직 대통령은 정보 보고를 받을 당시 유명 인사의 연애 스캔들 같은 뒷이야기를 은근히 즐겼으며, 특히 재벌들의 여성 편력에 대해서 흥미 있어 했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특히 미림팀의 도청이 집중되었던 94~97년 당시에는 대우 사태에서 유추해볼 수 있듯이 정치권을 향한 로비 등이 상당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미림팀의 도청 내용은 아니지만 한나라당의 정형근 의원이 지난 2002년 9월 폭로한 DJ 정권의 도청 자료 내용 역시 구체적으로 밝혀질 경우 재계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도 있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여기에는 한화의 대한생명 인수 로비에 관한 내용과 현대의 4천억원 대북지원설에 대한 내용 등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원로 정객은 X파일이 공개될 경우 재계가 입게 될 ‘내상’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도청? 그 시대에 정치권에 몸담고 있던 사람들은 이미 도청당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움직였다. 요릿집 같은 곳에 가서도 농담은 입으로 건네지만 중대사는 따로 필담을 나눌 정도였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요정 등에서 정작 위태로운 대화를 나눈 인사들은 정가보다 재계에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이번 삼성 파문만 봐도 기업인과 언론사주 간의 대화에서 비롯된 것 아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