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대통령과 여권의 ‘과거사 드라이브’가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를 겨냥하고 있다. 당내에서도 수도권과 소장파 의원들이 ‘과거와의 단절’을 요구하며 박 대표를 압박하고 나섰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안기부-국정원 불법도청 파문에 이어 ‘국가권력 범죄에 대한 시효 배제’를 뼈대로 하는 노무현 대통령의 ‘8·15 발언’으로 과거사 정국이 본격 전개되고, 이 과정에서 여권의 공세가 박 대표를 ‘정조준’하는 듯한 흐름이 조성되면서다. 이미 지난해 과거사법 제정을 둘러싼 논란에다 올 들어 국가정보원 과거사진실규명위원회의 김형욱 납치사건 조사 발표(5월26일) 및 부일장학회 강제헌납 경위 발표(7월22일) 등으로 유·무형의 데미지를 입은 박 대표에게 또다시 ‘시련의 계절’이 찾아들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유신정권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박 대표로선 거머리처럼 질기게 달라붙어 자신을 괴롭히는 과거사 문제가 대권가도의 최대 장애물. 그만큼 노 대통령 등 여권 핵심부의 ‘과거사 드라이브’는 추후 상황 전개에 따라 4·30 재·보선 이후 당 내외 입지를 넓혀 온 박 대표에 심대한 타격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이 정치권의 일반적인 분석이다. 박 대표가 갖는 대중적 인기의 원천이 선친(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광이란 점을 감안할 때 유신시절의 ‘그늘’이 속속 드러날 경우 정치적 기반이 근저에서부터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하한정국’ 돌입 이후 정치권 안팎의 상황을 보면 위와 같은 ‘최악의 시나리오’가 박 대표측에 현실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박 대표를 직·간접으로 겨냥한 여권의 과거사 공세가 심상찮다. ‘소급입법’, ‘위헌’ 논란에도 불구하고 여권이 노 대통령이 8·15 경축사를 통해 던진 과거사 정리에 총력을 경주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여권의 ‘과거사 드라이브’가 박 대표를 겨냥하고 있음은 정수장학회 문제에 대한 노 대통령의 발언 내용이 알려지면서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정수장학회를 둘러싼 논란은 7월 하순 국정원측이 지난 1962년 정수장학회의 전신인 부일장학회 헌납이 박 전 대통령의 언론 장악 의도에 의해 이뤄졌고, 당시 중앙정보부의 조직적-강압적 개입이 있었다고 발표하면서 이미 박 대표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바 있다. 그런 터에 노 대통령이 최근 몇몇 여권인사들에게 “정수장학회는 성격상 국가권력이 강탈한 ‘장물’로 볼 수 있다”고 말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박 대표측의 긴장감은 더욱 높아지게 됐다.
98년부터 올해 2월 말까지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맡아온 박 대표로서는 여권이 장학회 탄생의 도덕적 정당성을 집요하게 문제 삼고 늘어지는 데 대해 불쾌감과 곤혹감을 동시에 느낄 수밖에 없는 처지다. 공식적으론 박 대표가 ‘타의(他意)에 의해’ 이사장직을 사퇴하면서 정수장학회와의 관계가 단절됐지만 ‘비공식적 영향력’이 엄존하고 있는 터에, ‘정수장학회=장물’이란 노 대통령의 성격 규정은 향후 여권 핵심부가 이 문제를 과거사 공세의 핵심 메뉴로 삼을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이 5·16 쿠데타 이전 부일장학회의 ‘은덕’을 입었던 경력을 갖고 있는 데다 장학회 설립자인 고 김지태씨와 동문(부산상고) 선후배지간으로, 오랜기간 정수장학회 환원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가져왔다는 점도 박 대표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대목이다.
▲ 박근혜 대표가 박정희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함께한 사진. | ||
이 당직자는 그러나 “정수장학회를 둘러싼 논란은 외형상 박 대표의 개인 문제이긴 하지만 부정적 영향이 당 전반에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추가로 논란사항에 대해 깨끗이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이렇다 할 묘수가 없어 답답한 상황이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박 대표측의 고민은 과거사와 관련한 ‘뇌관’이 비단 정수장학회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당장 여권은 노 대통령의 8·15 제안이 나온 직후 “박정희 정권하에서 인혁당, 민청학련 사건 등의 인권유린 행위가 있었다”(열린우리당 장영달 상임중앙위원)는 점을 부각시키고 나섰다. 역시 유신정권 아래서 일어났던 동백림 사건도 국가권력의 범죄행위에 당연히 포함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들 사건들은 이미 확정판결이 난 터라 지난 5월 통과된 과거사법에서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민·형사상 재심사유가 있을 경우에만 위원회 의결을 통해 재심을 제한적으로 허용’하도록 했지만, 여권은 이번에 공소시효를 아예 없애 재심과 그에 따른 민·형사상 처벌 및 배상을 허용하자고 주장하고 나선 상황이다.
여권의 과거사 공세에 박 대표측은 일단 ‘위헌 소지’를 들어 방어벽을 치고 나섰지만 국면 반전을 꾀할 만한 묘수가 마땅찮아 고민이다. 한 당직자는 “박 대표로서는 여권이 부친의 재임 시절 ‘어두운 과거’를 하나하나 들고 나올 때마다 사과를 할 수도, 그렇다고 ‘뭐가 잘못됐느냐’고 적극 반박할 수도 없는 난감한 처지 아니겠느냐”며 “지금 여권의 움직임으로 봐선 다음 대선 때까지 박 대표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과거사 문제를 끝까지 물고 늘어질 것 같은데 이렇다 할 대책이 없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박 대표측을 더욱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여권의 공세가 집중되면서 한때 ‘박근혜 대세론’이 확산되던 한나라당 내에서도 입지가 눈에 띄게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당장 ‘빅3’ 중 이명박 서울시장(MB), 손학규 경기지사 등은 박정희 정권 시절인 63년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 반대 시위를 주도했던 ‘6·3 세대’의 핵심인물들로, 박 대표와 달리 지금의 과거사 정국에 전혀 정치적 부담이 없다는 점이 당내에서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상황이다.
▲ 노무현 대통령은 시효 없는 과거사 청산을 주장하고 나섰다(왼쪽). 한나라당 소장파는 이명박 서울시장과 연대를 모색하고 있다. | ||
소장파 중심의 수요모임과 이재오 김문수 홍준표 의원 등 친(親)MB 인사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국가발전전략연구회(발전연)가 8월18일 연석회의를 가져 ‘당권·대권 조기 분리’를 핵심으로 하는 혁신안 통과에 공동보조를 취하기로 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양측은 8월29일 다시 한번 연석회의를 가질 예정인데, 당내에서는 당권-대권 조기 분리가 ‘박 대표의 임기 단축-MB의 한나라당 입성’과 직결된 문제란 점에서 사실상 MB를 지원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란 분석이 나오고 있다.
당내 소장·개혁세력들이 보다 확고한 ‘과거와의 단절’을 요구하며 박 대표를 압박하고 나선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소장파의 리더인 원희룡 최고위원은 지난 18일 “한나라당이 더 이상 과거의 책임 때문에 과거 권력의 행태를 변명하거나 감싸는 행태를 보여서는 야당으로서의 자격이 없다. 과거에 대한 분명한 자기책임과 그것을 극복하겠다는 자기 의지의 정립을 통해 과거사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주장해 과거사 문제로 고민이 많은 박 대표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노 대통령의 집요한 ‘대연정 제안’, ‘X파일 정국’이 파상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박 대표에게는 또 하나의 난관인 ‘과거사 터널’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