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대통령. 청와대사진기자단(왼쪽),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사진=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이번 회담은 노 대통령의 전격적인 제의에 박 대표 역시 예측을 뒤엎고 ‘즉각 수용’ 입장을 밝히면서 성사된 것. ‘집착’에 가까울 만큼 거센 노 대통령의 연정 드라이브에 “대꾸할 가치도 없다”며 ‘무시 전략’으로 일관했던 박 대표였기에 두 사람의 만남은 교착상태에 빠진 정국의 향방을 결정짓는 데 일대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에서는 일종의 ‘돌발상황’인 두 사람간 영수회담을 두고 갖가지 분석과 전망을 내놓고 있는 상태. 외형상으론 대연정론과 개헌, 불법도청 파문을 불러온 ‘X파일’의 처리 방향 등을 놓고 서로간 이견이 커 회담 전망은 그다지 밝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노 대통령과 박 대표가 이제까지 정치역정에서 고비마다 ‘승부사’적 기질을 다분히 발휘하며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던 공통점을 갖고 있는 터라 일반인의 예상을 뛰어넘는 결과물을 만들 수도 있으리란 시각도 적지 않다.
우선 노 대통령과 박 대표는 여야 정치인 중 ‘고집’과 ‘과단성’에 있어선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노 대통령은 88년 12대 총선에서 당선된 이래 대부분의 기간을 ‘아웃사이더’로 지내다 ‘노풍’(盧風)이라 불리는 폭발적인 대중적 지지를 등에 업고 대권을 잡았다. 이 과정에서 지역구도의 틀에 막혀 총선과 지방선거에선 낙선의 고배를 수차례 마셨지만 결국 가장 큰 관문인 대선에선 후보 단일화란 드라마틱한 과정을 거치며 승자가 됐다.
박 대표 역시 17대 총선 직전 ‘탄핵 후폭풍’에 빠져 궤멸 위기를 맞은 한나라당에 ‘구원투수’로 등장하기까지는 비주류의 길을 걸어왔다. 당의 중추였던 이회창 전 총재와는 대부분의 기간에 거리를 두고 지냈고, 2002년에는 이 전 총재의 ‘제왕적’ 당 운영을 비판하며 아예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이라는 신당을 만든 바 있다. 대선 직전 박 대표가 미래연합을 해체하고 한나라당에 복귀하면서 그녀의 정치 실험은 ‘실패’로 돌아갔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박 대표는 당내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결국 한나라당의 당권을 거머쥐었고, 가장 강력한 대권후보로 우뚝 서는 저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처럼 ‘미운 오리새끼’로 치부될 때가 있을 만큼 오랜 기간 비주류의 길을 걸었던 두 사람은 한때 ‘한배’를 탔을 수도 있는 시기가 있었다. 박 대표가 2002년 한나라당을 탈당해 미래연합에서 별도 살림을 차렸을 때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였던 노 대통령측에서 연대론이 제기되면서다.
양측의 연대 논의는 박 대표가 “노 후보와는 이념과 노선이 다르다. 정당은 정체성이 맞는 사람끼리 하는 것이다”며 선을 그으면서 불발로 그쳤지만 노 대통령은 당시 박 대표에 대해 “인격적으로 훌륭한 분이다”며 여러 번 호감을 표시해 눈길을 끈 바 있다.
실제 노 대통령은 대연정 구상을 가다듬는 과정에서도 측근들에게 박 대표의 정치스타일을 높이 평가하는 내용의 얘기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핵심인사들 입에선 “노 대통령이 박 대표가 야당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대연정을 제안했다”는 설명이 나올 정도. 노 대통령으로선 정치적 노선과 이념, 성장배경 등이 판이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자신과 ‘닮은 꼴’인 면도 적지 않은 박 대표와 직접 담판을 통해 정국 현안을 해결하고 싶어 했으리란 해석을 가능케 하는 대목이다.
청와대와 한나라당 주변에선 6일 회담에서 노 대통령과 박 대표 모두 상대방이 “허(虛)를 찔렸다”고 할 만큼 전격적인 제안과 대응이 오갈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특히 대연정 성사를 위해 “임기를 단축할 수도 있다”고 밝히는 등 그야말로 ‘올인’의 자세를 보이고 있는 노 대통령이 어떤 카드를 던질지가 관심사다.
한나라당 내에선 “노 대통령이 박 대표의 면전에서 총리직을 맡아달라고 제안할 것이다”, “노 대통령이 자신의 대연정 제안의 진정성을 보여주기 위해 열린우리당 탈당·거국중립내각 구성을 제시하며 박 대표의 협조를 요청할 것이다”는 등의 다양한 예측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반면 박 대표는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대연정 논의는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지역구도 해소를 위한 나름대로의 방책을 제시하는 것으로 맞대응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당내 일각에서는 지역구도 타파를 내세운 노 대통령의 연정 제안에 수세적으로 대응할 것이 아니라 개헌이나 선거구제 개편에 대한 나름대로의 복안을 박 대표가 제시하며 국면 전환을 꾀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의제와 대화내용에 못지않게 두 사람의 어떤 논리와 화법으로 ‘기(氣) 싸움’을 전개할지도 정치권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사안이다. 우선 노 대통령은 ‘다변’(多辯)에 자신의 생각과 구상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스타일. 적절한 비유와 파격적인 언어구사로 대화를 이끌어가는 노 대통령의 말솜씨는 대연정론 논란에서도 이미 빛을 발하고 있다.
▲ 지난 1일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멕시코 소녀의 집 합창단’초청 공연에 앞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반면 박 대표는 전후좌우를 예측할 수 없어 때로는 산만하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노 대통령의 대화 스타일에 비해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절제된 자세로 자신의 의사를 또박또박 밝히는 편이다. 어떤 때는 너무 원칙과 정해놓은 기준에 연연하는 바람에 ‘유연성 부족’이라는 비판을 들을 정도다.
지난해 연말 국가보안법 문제 등을 놓고 여야 대표·원내대표 4인이 협상을 벌일 당시 천정배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는 “박 대표가 자신의 수첩에 적어온 대로만 얘기하더라. 절벽에다 대고 얘기하는 것 같다”고 토로한 바 있고, 이 무렵부터 박 대표에겐 ‘수첩 공주’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청와대와 한나라당 주변에서는 노 대통령-박 대표 간 회담에서 주요 메뉴인 대연정 제안에 대해 어떤 ‘극적인’ 합의가 이뤄지기는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많다. 그러나 구체적인 합의 여부를 떠나 이번 회담이 향후 정국의 향배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전환점이 되리라는 데는 별로 이견이 없다. 노 대통령과 박 대표가 영수회담이라는 장(場)을 그저 ‘얼굴 한번 마주하는’ 계기로 흘려보낼 리가 없다는 분석에서다.
노 대통령으로선 자신이 전력투구하고 있는 대연정 제안이 이번 박 대표와의 회담을 고비로 ‘꺼진 불’이 될지, 아니면 ‘활화산’이 될지가 가려질 가능성이 큰 만큼 ‘통째로 권력이양’, ‘임기 단축 용의’ 등을 뛰어넘는 새로운 카드를 제시할 가능성도 예상된다. 여권 일각에서는 이제까지 대연정과 관련해 노 대통령이 쏟아낸 제안이 야당측에 의해 진정성을 의심받고 있는 만큼 이를 해소할 보다 구체적이고 고강도의 처방이 제시될 것이란 견해도 나온다.
박 대표 입장에서도 이번 영수회담이 부담이 크긴 하지만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향후 당내외 입지를 튼실하게 다질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전력투구해야 하는 상황이다. 최근 당내에서 비주류를 중심으로 당 혁신안 수용에 대한 압박이 거세지고 있고, 경쟁관계에 있는 이명박 서울시장의 대중적 인기가 자신을 추월하고 있는 터에 이번 회담을 통해 이완된 자신의 리더십을 다시 한번 다잡으려 할 것이란 얘기다.
박 대표가 노 대통령과 만나기 앞서 5일 의원총회를 열어 회담 수용 배경과 의제, 방법 등에 대한 의견을 수렴키로 한 것도 자신이 명실상부한 당의 구심점이라는 점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한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한나라당 내에선 노 대통령-박 대표 회담의 성과 여부에 대해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고 있는 상황. 한 핵심 당직자는 “박 대표가 영수회담 제의를 수용한 것에 대해 ‘노 대통령의 쳐놓은 덫에 박 대표가 걸렸다’는 류의 비판도 당내 일각에서 나오지만, 그건 박 대표의 정치력을 폄훼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역대 여야 영수회담의 전후 과정을 보면 야당 대표가 회담에서 그리 손해 본 적은 없다. 특히 이번엔 수세 국면에 몰린 노 대통령이 전적으로 협조를 당부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박 대표가 유리한 입장에서 대화를 주도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반면 박 대표측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소장파의 한 의원은 “노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박 대표가 ‘연정놀음은 이제 그만하고 경제문제에 전념하라’는 등의 훈계성 대화로 일관한다면 박 대표의 리더십이 다시 도마에 오를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대연정 제안을 실질적으로 무력화시킬 수 있는 나름대로의 대안과 프로그램이 있어야 하는데 ‘정치 9단’인 노 대통령에 맞서 박 대표가 제대로 대응할 수 있을 지 의문”이라며 비관적인 전망을 내놨다.
서로 닮은 점이 적지 않으면서도 서 있는 땅이 다른 노 대통령과 박 대표, 어쩌면 두 사람의 본격적인 ‘기싸움’은 단독 회동 이후에 펼쳐질지도 모른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