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의 ‘이건희 회장(가운데) 구하기’는 일단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왼쪽은 홍석현 주미대사, 오른쪽은 이학수 부회장. | ||
그 자신감의 발로였을까. 지난 9월 초 정치권에서 국정감사 증인 신청 논란이 뜨겁게 일고 있는 가운데 이건희 삼성 회장은 미국으로 ‘유유히’ 출국해버렸다. 일부 강경 정치인들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 격’이 돼 버렸지만 애초부터 정치권은 이 회장의 ‘출두’에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정치권에서는 검찰이 이 회장을 타깃으로 할 조짐을 보이자 이 회장측이 건강을 핑계 삼아 해외로 도피한 것 아니냐는 추측도 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건희 보호 작전’은 일단 성공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온다. 여론이 호전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삼성. 과연 그들은 X파일의 늪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어떤 수를 만지작거리고 있는지 따져봤다.
삼성그룹은 지난 7월 X파일 사건이 불거진 뒤부터 터져나온 일련의 악재를 창사 이래 최대 위기로 규정하고 있다. 삼성 임원들은 평소와 달리 사석에서도 그룹 분위기를 언급하는 것을 일종의 금기로 여기고 있다. 이런 위기의식은 ‘왜 하필 삼성에게만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느냐’는 반감의 표출로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삼성은 ‘일단 소나기는 피하고 보자’는 분위기에다 마땅한 묘책도 없어 사태를 그냥 지켜보고만 있는 상황이다.
삼성은 이번 X파일 위기를 두 가지 측면에서 분석하고 있다. 경영 외적으로는 X파일과 그로부터 불거진 각종 대선자금 의혹, 검찰에 제공했다는 ‘떡값’을 포함한 ‘삼성 장학생’ 문제와 홍석현 <중앙일보> 전 회장의 배달사고 등을 통해 도덕성에 큰 타격을 받은 점이다.
경영 내적으로는 재벌 금융보험사의 계열사 지분 초과 보유분을 강제처분토록 하는 내용의 ‘금융산업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금산법) 개정안, 에버랜드 전환사채 문제, 공정거래법에 대해 삼성이 제기한 헌법소원 등에 대해 삼성에 불리한 결정이 내려질 경우 입게 될 타격을 말한다.
먼저 삼성이 경영 외적인 부분에 대해 펼치고 있는 대응책을 살펴보자.
삼성이 가장 신경을 쓰고 있는 부분은 이건희 회장의 국회 증인 출석 여부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룹 총수가 국회 증언대에 서본 적이 없는 ‘삼성 신화’가 자칫 X파일 정국으로 깨질 수도 있다고 보고, 로비에 사력을 다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사실 이 회장은 지난 2004년 대선자금 수사 때도 1월에 미국으로 출국한 뒤 사건이 다 마무리된 뒤인 5월에야 귀국했던 전례가 있다.
하지만 올해는 X파일 사건의 국민적 여론을 의식해서 증인 채택 가능성이 컸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삼성의 로비도 그만큼 조직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는 이건희 회장 증인 채택에 적극적이었던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그는 이에 대해 “이 회장 소환에 긍정적이던 열린우리당이 지도부의 태도 변화로 며칠 새 반대 기류로 돌아섰다. 국감 증인 채택을 앞두고 대단히 불온한 기운이 휩쓸고 있다. 국회 ‘삼성 장학생’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다. 이것은 누군가 이 회장을 온몸으로 방어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삼성의 조직적 로비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현재로선 국회 증인 신청에 대한 ‘삼성 불패 신화’는 거의 성공적으로 끝날 것으로 보인다. 먼저 재경위 법사위 등에서 이 회장 증인 신청을 적극 추진했지만 일부 위원들의 반대와 여야 합의 실패로 ‘찻잔 속의 태풍’으로 그칠 가능성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이 이건희 회장 보호에는 결사적인 반면 홍석현 전 <중앙일보> 회장은 ‘버리는 카드’로 쓰는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파문 초기와는 다르게 구조본 주변에선 삼성의 ‘주류’가 아닌 홍 전 회장 ‘처리’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분위기다. 이런 기류는 노회찬 의원의 발언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그는 최근 국회기자회견장에서 “비공식적으로는 홍석현 (전 주미) 대사를 불러 줄 테니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을 포기하라는 제안도 있었다”고 주장해 파문이 일기도 했다. 특히 이 회장은 처남 홍 전 회장의 ‘배달사고’ 연루에 상당히 화를 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이런 분석은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한나라당의 한 의원이 “홍라희씨가 동생의 배달 사고 소식을 전해들은 뒤 한때 집에서 두문불출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고 말한 것을 놓고 보면 삼성이 홍 전 회장의 배달사고 의혹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 지난 7월22일 MBC <뉴스데스크>의 ‘도청X파일’ 보도. 이학수 부회장과 홍석현 주미대사가 ‘핵심축’이었다. | ||
하지만 삼성은 이학수 부회장의 처리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삼성 일부에서는 ‘비록 검찰이 이건희 회장을 최종 수사 타깃으로 잡고 있지만 이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X파일의 또 다른 당사자인 이학수 부회장이 일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분위기도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이학수 부회장이 삼성 컨트롤 타워인 구조조정본부의 핵심인 동시에 이재용 상무의 경영권 승계를 전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2선 퇴진은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라는 게 삼성 내부의 입장이다.
그럼에도 삼성에서는 ‘포스트 이학수’를 상정해 그룹 핵심 인사가 모 은행장을 극비리에 만나 구조본의 최고 요직을 제의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최악의 경우 이학수 부회장을 잠시 물러나게 하고 새 인물을 구조본부장으로 내세워 분위기를 일신시켜보겠다는 복안인 것이다. 하지만 제의를 받았던 모 은행장은 정·관계 진출 야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져 그의 영입은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삼성으로서는 이학수 부회장을 절대 버릴 수 없는 카드로 보고 그를 보호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삼성은 X파일 사건 등 경영 외적인 부분에 대한 대응은 ‘무대책이 상책’이라며 소극적인 입장이지만, 경영 내적인 부분만은 적극 대응할 태세다. 금융산업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금산법), 에버랜드 전환사채 문제 등 그룹의 생존이 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문제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맞설 방침인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이들 문제는 그룹 경영뿐 아니라 그룹의 후계구도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삼성은 ‘사활을 건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
삼성측은 ‘재벌의 지배구조 개편’이 주된 목적인 금산법에 대해서는 “만약 (금산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금융 계열사가 보유한 지분의 의결권 제한은 물론 일부 지분을 매각해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으며, 이 경우 그룹 지배구조에 커다란 혼란이 올 수 있다. 절대 용인할 수 없다”는 입장을 수 차례에 걸쳐 보이고 있다. 금산법과 관련해 삼성은 어느 정도 분위기 반전에는 성공했다는 내부 분석도 하고 있다. 애초 박영선 의원을 포함한 여당 의원 다수의 발의로 시작된 금산법이 시간이 지날수록 국회 통과가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는 것.
금산법과 함께 삼성의 목을 죄고 있는 에버랜드의 전환사채와 관련한 법원의 결정에도 삼성은 강하게 대응하고 있다. 오는 10월4일로 선거공판이 예정되어 있지만 삼성측은 연기를 신청할 계획이다. 이 문제가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 삼성이 “모종의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소문도 재계를 중심으로 번져가고 있다. 이 모종의 조치에는 본사 일부의 해외 이전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이 문제는 이건희 회장의 장남 재용씨의 경영승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삼성을 더욱 긴장시키고 있다.
올해 초 공정거래위원회가 삼성생명·삼성카드의 비금융 계열사 지분 불법 초과소유 시비, 비금융 계열사 지분을 일정하게 낮추도록 하자는 주장에 대해 삼성은 ‘헌법 소원’이라는 초강수로 대응한 바 있다.
그런데 최근 삼성은 또 다른 문제로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삼성 구조본의 법무팀장을 맡았던 김용철 변호사가 ‘반 삼성’ 기사를 많이 써온 <한겨레>의 기획위원으로 자리를 옮긴 것. 1997년에 검찰을 떠나 삼성에 입사했던 김 변호사는 이후 이사를 거쳐 전무의 자리까지 오르며 그룹 송사를 총괄해 온 삼성 구조본의 핵심인사였다.
삼성의 한 관계자는 “김 변호사는 X파일과도 관련이 있는 삼성 고위직 출신인데 앞으로 그가 <한겨레>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한겨레>에서 삼성 관련 기사가 나올 때마다 그가 모종의 역할을 할 것으로 본다. 우리로서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정가 일각에선 삼성 구조본의 전무였던 김 변호사의 <한겨레>행(行)에 뭔가 배경이 있지 않느냐는 시각도 있다. 8년 동안 핵심 ‘삼성맨’으로 지냈던 그가 향후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에 따라 삼성은 희비가 엇갈릴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삼성은 경영 외적인 부분, 즉 그룹의 도덕성에 치명상을 가했던 X파일 사건 등에 대해서는 내부적으로 그리 큰 걱정을 하지 않는 것 같다. 힘들긴 하지만 ‘일시적’ 충격일 뿐이며 당장 삼성그룹에 경영상 타격을 주지는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삼성측의 한 관계자는 “처음 문제가 터졌을 때만 해도 회사가 어떻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도 있었다. 그러나 계속 맞다보니 ‘면역’이 생긴 것 같다. 달라진 것은 별로 없지만 이제는 견딜 만하다고 느끼는 것 같다”고 밝혔다. 삼성측은 악화된 여론을 되돌리기 위해 장기적인 공익 이벤트를 활성화할 계획도 세워놓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이건희 회장의 미국 출국에 대해 ‘칭병 도피설’이나 ‘와병설’ 등 갖가지 추측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이런 잡음과는 관계없이 이 회장의 국회 증인 채택은 물 건너 간 분위기다. 사건 당사자를 국민의 대표기관에 불러 증언대에 세우는 것조차 힘겨운 우리 사회의 허약한 정치 시스템을 볼 때, 앞으로도 삼성공화국의 ‘바람’은 계속 위력을 발휘할 것으로 보인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
한상진 기자 sjine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