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용택 전 국정원장(오른쪽) 재임 시절 국정원이 전임 원장인 이종찬씨를 도청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 ||
하지만 육사 16기 동기생으로 국정원장직을 승계한 이종찬 천용택 두 전직 원장은 서로 물고 물리는 악연으로 이제는 ‘DJ정권 도청 의혹’이라는 뜨거운 감자의 중심선상에 다시 서게 됐다. 더욱이 6년 전 정국을 강타했던 ‘언론대책 문건’ 파문의 미스터리가 다시 불거지고 당시 국정원이 이 파문의 내막을 먼저 파악했던 것으로 밝혀지며 이들의 관계가 다시 도마 위에 오르게 됐다. 또한 내막 파악 배경에는 이 전 원장을 포함한 정치인에 대한 국정원의 도감청 행위가 있었을 것이라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며 당시 국정원장이었던 천 전원장의 이름이 주목을 받고 있다.
이종찬과 천용택 두 전직 국정원장의 관계는 그 정치적 부침과 함께 세간에 화제로 곧잘 회자되곤 했다. 일찍이 정치권에 뛰어들어 대선후보로 까지 나선 전력이 있는 이 전 원장에 비해 오래 군에 몸담은 천 전 원장은 까마득한 ‘정치 후배’였다. 엇갈린 길을 걷던 두 사람이 한 배를 타게 된 것은 천 전 원장이 95년 DJ의 국민회의에 입당하면서부터. 한 정치권 인사의 전언에 따르면, 당초 천 전 원장은 이 전 원장 계보로 분류될 정도로 두 사람은 가까웠다고 한다. 심지어 이 전 원장은 DJ정권의 첫 안기부장으로 천 전 원장을 추천한 것으로 알려질 정도.
그러나 천 전 원장이 DJ정권 출범 이후 동교동계와 가까워지면서 두 사람 사이에 이상기류가 형성된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국방장관 시절부터 이 전 원장과 종종 대립되는 모습을 노출시켰다. 급기야는 정치권에 의해 천 전 원장이 이 전 원장을 밀어내고 국정원장에 입성하는 모양새를 낳으면서 상당히 어색한 관계로 발전했다.
국정원장 전격 교체가 단행된 1999년 5월 당시의 상황은 꽤 매끄럽지 못하게 전개됐다. 전직 국정원 관계자 K씨에 따르면 이 전 원장은 자신의 경질 분위기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고 한다. 이 관계자는 “당시 개각 발표(월요일)가 있기 전의 휴일은 석탄일 연휴였다. 이 전 원장은 월요일에 대통령께 보고할 국정원 내부 인사안을 만들어 둔 채, 연휴 동안 골프를 즐기고 있었다. 골프장에서 경질 통보를 받고 상당히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당시 이 전 원장의 전격 경질은 동교동계 정치인들과의 갈등 때문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K씨는 “이 전 원장에 대해 98년 후반기부터 동교동계 실세 정치인들의 집중 견제가 시작됐다. 권노갑씨가 일본에서 귀국한 시점 이후는 더욱 심해졌던 것으로 생각한다. 국정원 내부 인사에 대해 이 전 원장이 동교동계의 요구를 묵살한 것도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전 원장이 국정원 정보를 발판삼아 차기 대권을 노린다는 얘기가 동교동계 인사들에게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고 전했다.
그에 따르면 이 전 원장이 경질당하기 직전 직접 작성한 내부 인사안 또한 동교동계를 자극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 전 원장은 ‘조직을 배신한 사람은 다시 받아들일 수 없다’며 과거 YS정권의 안기부에서 고급 정보를 DJ측에게 빼내 준 의심을 받고 있던 한 인사를 철저히 배척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대부분을 자신의 최측근으로 채웠다는 것.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동교동계는 물론 DJ의 불만까지 초래할 수 있는 부분이었던 셈이다. 결국 이 인사는 천 전 원장 취임 이후 차장으로 중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 원장이 전격적으로 물러난 이후 신임 천 원장은 마치 국정원을 새롭게 만들려는 듯 대대적인 칼날을 휘둘렀다고 한다. 원장 교체시 조직의 안정을 위해 차장과 기조실장 중 일부는 유임시키는 것이 관례였으나 당시 천 원장은 차장 기조실장은 물론 실국장급까지 대대적으로 교체했다. K씨는 “전임 원장에 대해 비토 발언도 서슴지 않을 정도로 천 전 원장은 사실상 이 전 원장의 색깔을 완전히 지우려 했다”고 밝혔다.
▲ 지난 99년 10월 국회 본회의장에서 ‘언론대책문건’을 폭로하고 있는 정형근 한나라당 의원. | ||
당초 정 의원은 “이 문건은 이강래 전 수석이 작성한 대통령 보고용”이라고 의혹을 제기했으나, 국정원은 “언론대책 문건은 중앙일보의 문아무개 기자가 참고용으로 작성해서 이 전 원장 사무실에 팩스로 보낸 것을 우연히 그 방에 출입한 평화방송의 이아무개 기자가 특종의 욕심으로 몰래 빼돌려 돈을 받고 야당에 제공한 것에 불과하다”며 그 내막을 이례적으로 신속히 밝혀냈다. 이 같은 국정원의 정보를 접한 당시 여당은 대대적인 반격을 취했고, 한나라당과 정 의원은 오히려 수세에 몰렸다. 당시 천 원장의 주가는 한껏 치솟았다.
하지만 여권 관계자들조차도 당시 국정원이 어떻게 그렇게 신속하게 사건의 숨겨진 내막을 밝혀낼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놀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6년 만인 지금에 와서 당시의 미스터리는 전혀 뜻밖의 방향으로부터 접근되고 있다. 검찰의 ‘도청 X파일’ 수사가 그것. 당시 국정원이 이 전 원장에 대해 도청을 했다는 정황이 확보된 것이다. 이에 대해 이 전 원장은 지난 9월28일 <동아일보>와의 전화인터뷰에서 “당시 천 원장과 엄익준 차장을 통해 내 전화를 국정원에서 감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김승규 국정원장은 “이 전 원장이 언론대책 문건 파문에 따른 자신의 억울함을 해명하는 차원에서 (국정원에게) 도청을 허락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전 원장이 밝힌 내용에 따르면 실제 당시 국정원의 도청은 문건 파문이 일어나기 전부터 자행됐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제기된다. 이 전 원장의 인터뷰 내용 중에는 “천 원장은 당시 내게 ‘그 문건은 중앙일보의 기자가 팩스로 내 사무실로 보내온 것’이라고 확인해 주면서 이를 감청을 통해 인지했음을 부인하지 않았다”고 밝힌 것.
실제 국정원 출신의 또 다른 한 관계자도 “설사 전직 국정원장의 경우라도 재임 과정에서 인지한 고급 정보의 유출을 막기 위한 차원에서 감청과 같은 감시를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고 밝혔다.
이 전 원장측도 전임 원장인 자신에 대해서까지 도청을 하는 것에 대해 상당히 불쾌해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대해 K씨 역시 “당시의 정황상 이 전 원장에 대해 국정원의 도감청 행위가 충분히 전개됐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그는 “이 전 원장이 퇴임으로 물러나면서 내부 문서를 상당부분 갖고 나간 것이 확인됐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기에 당시 우리 직원들이 직접 이 전 원장 사무실로 가서 유출된 문건을 대부분 회수해온 적도 있다”고 밝혔다. 즉 정치적인 배경으로 전격 경질된 이 전 원장이 실제 내부 문서까지 들고 나간 것이 확인된 만큼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감시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결국 당시 국정원장이었던 천 전 원장에 대해 의혹이 다시 집중되고 있다. 취임 직후 정치 정보 강화를 역설하며 I.O(정보요원)를 확충했던 천 전 원장과 국내 정치 담당이었던 엄익준 차장의 정보력이 정치인들에 대한 밀착 감시 내지는 도감청에서 나왔을 것이라는 의심이다. 실제 언론대책 문건 파문에 대한 국정원의 신속한 내막 정보 역시 이 과정에서 취득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중앙일보의 문 기자가 이 전 원장에게 팩스로 문건을 보낸 사실이나, 평화방송 이 기자가 정 의원에게 돈을 받고 문건을 건넨 사실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쉽게 알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당시 ‘권력의 실세’로 승승장구하던 천 전 원장은 99년 12월15일 법조출입 기자단과의 오찬간담회에서 정형근 의원을 미행한 사실이 있다는 발언을 하는 실수를 범하면서 이 같은 가능성을 더욱 짙게 하고 있다. 그는 이 발언과 함께 ‘DJ의 삼성 정치 자금 수수설’ 까지 언급하는 대형사고를 치면서 7개월 만에 DJ정권 최단명 국정원장으로 낙마하고 말았다. 도청 정국은 이 천 두 전 국정원장의 구원을 다시 불러내 가뜩이나 몸이 불편한 DJ의 심기를 거스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