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2일 오전 국회 본회의에서 이해찬 총리가 노무현 대통령을 대신해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국민대통합 연석회의’가 제안됐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이런 정황을 이미 보고받은 노 대통령은 이 총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번 시정연설 내용을 이 총리가 주도해서 만든 것처럼 그 후속조치도 이 총리가 주도해주세요. 총리가 나서 총리실과 청와대가 통합추진체계를 갖춰 운영하도록 만드세요.” 이에 이 총리는 “연석회의 발족 시기를 오는 12월 초쯤으로 잡고 있습니다. 그동안 경제 노동 여성 시민사회 종교 정당 등 각계 인사들을 만나 상의하고 기구를 발족시키겠습니다”라고 답했다.
노 대통령은 다시 “연석회의는 운영의 실효성을 위해서나 명분상으로 보나 총리실 소속의 국정협의체 성격의 기구로 만드는 게 좋겠다”고 의견을 제시했고 이 총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오찬을 끝낸 뒤 의미심장한 미소를 교환했고 굳은 악수를 나눈 뒤 김만수 청와대 대변인을 불러 이 같은 내용을 언론에 발표하게 했다.
# 임기단축 카드?
노 대통령의 ‘연석회의’ 제안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의미 있는 정국구상을 갖는 것이지만, 이면을 들여다보면 또 다른 정치논리가 있음을 알게 된다. 즉 국정을 이원집정제적 운영방식으로 옮겨놓고 ‘노 대통령 외치-이 총리 내치’ 체제를 정착시키려는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 하는 점이다.
여권의 한 주요 관계자는 “지금도 대부분 내치는 이 총리가 하고 있지만 연석회의 발족 과정에서 이 총리 주도의 내치제제가 확립되는 효과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대통령은 중장기 과제-총리는 현안’을 맡는다는 국정운영의 방침이 깨지고 ‘대통령이 중장기 현안에서도 손을 떼는 것 아니냐’는 지적까지 나온다.
그보다는 더 큰 구상이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노 대통령이 연정론을 제기할 때 총리에게 대통령 권한을 이양할 수 있다는 뜻을 밝힌 취지를 이번에 실천한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노 대통령이 지역구도 극복을 전제로 한 임기 단축 발언을 했음을 상기하기도 한다. “내년 초 뭔가 결단을 내리기 위해 이 총리에게 미리 힘을 실어주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그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총리는 이미 수개월 전부터 사회 제 세력 및 부문과 접촉을 벌여 왔다고 한다. 국회 시정연설에서의 ‘연석회의 제안’ 이전부터 이 계획을 세웠고 실행에 옮겨왔다는 뜻이다. 실제로 이 총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사회단체와 시민단체 종교 지도자들을 접촉중이다. 3~4개월 전부터 만나기 시작한 시민 사회 종교단체 인사가 줄잡아 1백여 명에 이를 것이라는 추측도 한다.
열린우리당의 한 재선 의원은 “한나라당 등 야당이 반대의사를 밝혔지만 야당의 참여 없이도 연석회의 출범을 강행시킬 수 있도록 이 총리가 접촉중인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장영달 상임중앙위원도 13일 KBS 라디오에 출연해 “일단 함께할 수 있는 정당과 사회대표기관들이 먼저 출발하면서 한나라당을 설득할 수도 있다”면서 한나라당을 제외한 연석회의의 출범 가능성마저 내비쳤다. 그만큼 대연정론을 제의했을 때와는 달리 추진의지가 강하다는 뜻이다.
▲ 노무현 대통령 | ||
이번 연석회의 구상이 노 대통령의 분권형 국정 운영 의지를 보여주고 이 총리의 역할론을 부각시켰다면 결국 이번 제안의 탄착점은 이해찬 대권주자 띄우기와도 관련이 있는 게 아니냐는 해석이 이런 속에서 나온다.
외형적으로 볼 때 연석회의는 경제·사회적 현안을 다루는 것이고, 대연정은 정치의 구조와 문화를 바꾸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다르지만 결국은 정치적으로 수렴될 것이라는 게 여권 내부의 분석이다.
이 총리의 한 측근은 “우리의 경제사회적 제반 이슈들이 정치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것이 없고, 예컨대 선거제도 개편문제 같은 것이 연석회의에서 다뤄지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면서 “이때 연석회의는 정치협의체로 외연을 확장시킬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귀띔했다.
이 총리의 다른 측근은 “이 총리가 연석회의를 통해 모든 갈등을 조화롭게 해소할 수 있는 기제를 만들어나가고, 사회적 갈등을 완화하거나 해결하는 방안들을 찾아나간다면…”이라면서 말을 줄였다. 이 총리가 향후 대권정국의 강자로 뜰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확신에 찬 전망인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연석회의는 양극화 해소, 노사문제, 국민연금 등 시정연설에서 보여준 것들 이외에도, 의약분업을 둘러싼 의사와 약사의 충돌, 화장터 건설로 비롯된 주민들의 반발, 새만금 간척사업과 관련된 갈등, 지역개발에 따른 환경단체와 건설업체 및 지방주민들 간의 갈등, 쌀시장 개방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 철거민들의 철거반대 투쟁을 조정하는 것 등 ‘사회 모든 분야의 모든 이슈’를 의제로 포함시킬 가능성이 높다.
특히 이 총리가 국내 자본의 이해를 대표하는 삼성이나 LG그룹 등을 사용자 대표로 연석회의에 참석시킬 수 있다면 탁월한 국정 운영 및 갈등의 조정자로서 역량을 인정받게 될 가능성도 있다. 이런 국정 운영의 경험이 이 총리 자신의 정치적 역량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로 이어질 수밖에 없음은 물론이다.
지난 12일 청와대 오찬에서 노 대통령과 이 총리가 손을 맞잡고 미소를 교환한 것은 이 같은 미래적 상황에 대한 복선(伏線)인지도 모른다. 이런 점을 간파한 것일까. 야당은 벌써부터 ‘연석회의=가면 쓴 연정론’으로 이해하고 있다. 대연정의 ‘다른 버전’이며 정국 구도의 변수로 작용할 것이라는 우려인 셈이다.
허소향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