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은성 전 국정원 차장, 고 정몽헌 회장, 박지원 전 실장(왼쪽부터). | ||
'김 전 차장은 불법 도청을 한 것에 대해 “대통령의 올바른 판단을 위해 풍부한 정보를 드려야 한다는 생각에서 도청을 했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웠다. 하지만 당시 그는 국정원 내규를 무시하고 도청으로 생산한 ‘고급정보’를 자신의 ‘입신’을 위한 지렛대로도 이용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구속영장에 따르면 김 전 차장이 민주당 ‘정풍운동’과 관련해 당시 여권 쇄신파들의 전화통화를 도청한 혐의가 있는데 검찰은 이런 정보들이 권노갑 전 민주당 최고위원 등 비공식적인 채널로 흘러들어갔을 것으로 보고 있다. 김 전 차장이 당시 여권 인사들까지도 폭 넓게 도청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 드러난 이상 그의 ‘레이다’에는 언론계나 재계 등의 사회 각계 각층 인사들도 모두 포함됐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 시작되는 의혹이 바로 이른바 ‘김은성 X파일’의 존재 여부다.
과연 ‘김은성 X파일’의 실체가 있는 걸까. 만약 있다면 대체 어떤 인물들과 관련이 있는지 그 실체를 추적해보았다.
은성씨가 국정원 국내담당 차장으로 근무하던 지난 2000년 4월부터 2001년 11월까지 불법 감청 정도가 가장 심각했다.’
검찰이 김은성 전 국정원 국내담당 차장 구속영장에 국정원 직원들의 진술을 빌려 기재한 내용이다. 김 전 차장이 국내담당 책임자로 재직할 때가 국정원 역사상 가장 빈번하게 불법 도청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불법 도청으로 생산된 ‘고급정보’들이 청와대 등 공식 보고 라인이 아닌 사적인 경로를 통해 광범위하게 불법 ‘유통’되었던 사실도 확인된다. 다음은 국정원 한 전직 관계자의 증언.
“지난 김대중 정권 때는 불법 도청도 많았지만 그렇게 생산된 정보들이 엉뚱한 곳으로 유출돼 정보 생산자들이 곤혹스러웠던 적도 많았다. 정보의 생산과 유통이 모두 엉망이었다. 한 예로 당시 국정원 관계자가 동교동계 인사 한 명에 대한 비리 보고서를 올린 적이 있었다. 그런데 바로 며칠 뒤 보고서를 작성했던 그 관계자가 상사의 부름을 받았다고 한다. 보고서 당사자가 어떻게 알았는지 자신은 그런 비리 사실이 없다며 상사에게 강력하게 항의하는 바람에 자초지종을 다시 물어보았던 것이다. 국정원 관계자는 이후부터 그 인사에 대한 보고를 자제했다고 한다.”
이런 고급정보의 불법 유통 사실은 최근 검찰의 수사 결과에서도 확인됐다. 그런데 이런 왜곡된 정보 유통 구조에는 김 전 차장과 권노갑 전 민주당 최고위원의 커넥션이 대표적인 사례로 떠오른다. 두 사람은 애증이 교차했던 관계였다. 권 전 최고위원과 김 전 차장은 지난 96년 처음 만난 것으로 전해진다. 권 전 최고위원이 당시 국회 국방위와 정보위에서 활동할 때 김 전 차장이 정보위 수석정보위원으로 국회에 파견근무를 나와 있을 때 처음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그런데 검찰 조사 결과 김 전 차장은 DJ정권의 실세였던 권 전 최고위원의 인사전횡 등을 문제삼아 퇴진을 주장한 민주당 소장파들의 전화통화를 도청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각에서는 그 도청 문건이 권 전 최고위원에게 전달할 목적으로 작성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정풍운동이 일어났던 지난 2000년 12월은 ‘진승현 게이트’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기 때문에 김 전 차장이 권 전 최고위원에게 그런 정보를 주려 했을 리가 없다는 시각도 있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권 전 최고위원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시도였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권 전 최고위원측은 “김 전 차장으로부터 그런 정보를 받은 적이 없다”며 펄쩍 뛰고 있다. 그런데 권 전 최고위원은 민주당 정풍운동이 일어나기 전 이미 김 전 차장으로부터 ‘정보보고’를 받은 전력이 있다. 지난 2002년 5월 진승현 게이트 파문이 터졌을 당시 검찰은 권 전 최고위원에게 진승현씨의 돈 5천만원을 전달한 사람은 바로 김은성 국정원 전 2차장이었고, 김 전 차장이 권 전 최고위원을 찾아간 목적은 최규선씨에 대한 정보보고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또한 권 전 최고위원은 당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난 2000년 7월 초 김 전 차장이 집에 찾아와 정보보고를 한 적은 있으나 돈을 받은 적이 없다. 보고 내용은 최규선씨와 관련해서였다. 당시 최씨에 대한 여러 비난의 소리를 들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를 보면 권 전 최고위원이 김 전 차장으로부터 어떠한 정보보고도 받지 않았다는 주장은 그리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당시 비공식 라인을 통해 국정원의 ‘정보보고’를 받은 사람이 권 전 최고위원 한 명뿐이었을까. 이를 규명해보기 위해 김 전 차장이 국내담당을 맡고 있을 당시의 여권 권력구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 권노갑 전 민주당 최고위원 | ||
그런데 이러한 보이지 않는 여권의 권력구도에 또 한 사람의 실세가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다. 당시 권력 막후를 취재했던 한 기자는 이에 대해 “미국 생활 중 권 전 최고위원을 통해 정치에 입문한 박 전 실장은 원래 권노갑계로 분류돼왔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과 권 전 최고위원 사이의 중개역할을 하던 박 전 실장이 청와대에 입성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자연히 권 전 최고위원과 거리가 생기고 김홍일 의원과 가까워졌던 것이다. 그래서 박 전 실장이 김홍일 의원과 친분이 깊었던 김은성 전 차장과도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게 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이런 점에서 김 전 차장의 ‘정보보고’를 김 의원과 박지원 전 실장이 ‘공유’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김 전 차장 입장에서는 자신과 대척점에 서 있던 또 다른 실세 권 전 최고위원에게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할 수 없이 정보를 제공했던 측면이 있었다면, 자신과 같은 권력 라인에 있었던 박지원 전 실장에게는 ‘당연히’ 보고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박 전 실장의 경우 문화관광부 장관 재직 시절 안기부 도청조직 미림팀의 ‘통신첩보’를 접해본 경험이 있다는 점에서 국정원 정보보고에 어느 정도 ‘매력’을 느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지난 99년 9월 ‘안기부 X파일’에 연루되었던 재미교포 박인회씨가 박지원 당시 문화부 장관을 방문해 녹취록을 건네준 뒤 안기부에서 해직된 직원 임아무개씨의 복직 청탁과 함께 자신의 친구 이아무개씨가 관광공사 관련 사업권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부탁을 했다는 주장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 뒤 박 전 실장은 자신의 도청 문건 연루설을 강하게 부정하면서 “천용택 국정원장에게 그런 사실을 신고하고 테이프를 전량 국정원에 주었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박 전 실장측은 김 전 차장의 도청 정보와 관련해서도 “평소 주변관리를 잘하는 분인데 도청으로 만들어진 정보보고를 받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정치권 일각에서는 박 전 실장이 지난 2000년 당시 문화부 장관으로 재직(1999년 5월~2000년 9월)하면서 굵직굵직한 사건에 대한 ‘정보보고’를 받았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정치권의 한 정보소식통은 이에 대해 “지난 2000년 6월15일 남북정상회담을 전후해 박 전 실장이 ‘비선 라인’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이와 관련한 정보도 모니터링했을 가능성이 있다. 김은성 전 차장의 정보망이 정·재·계를 비롯해 언론계까지 워낙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었기 때문에 2000년의 최대 이슈였던 남북정상회담과 관련된 각종 정보들이 자연스럽게 수집되었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 같은 개연성은 지난 2002년 9월 정형근 한나라당 의원이 국청원의 도청 문건이라고 밝힌 내용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당시 정 의원은 박지원 전 실장이 대북 송금에도 간여했다고 주장하면서 그와 대북 밀사 요시다 간의 국제전화 3건을 도청한 문건을 제시했다. 정보 보고의 수혜자였던 박 전 실장 자신도 도청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정 의원은 “당시 국정원이 현대아산 직원이 대북 송금과 관련해 베이징 주재원과 통화한 내용까지도 도청했던 것으로 밝혀졌다”고 말했다. 또한 정 의원은 도청 사실을 토대로 2000년 3월9일 싱가포르에서 국정원 김보현 3차장이 송호경 부위원장을 만날 때,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과 김윤규 사장이 동행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당시의 도청 정보 속에 정상회담과 관련된 ‘꺼내놓지 못할 이야기’가 담겼을 가능성이다. 박 전 실장은 지난 2003년 대북 비밀송금 특검 과정에서 현대 정몽헌 회장으로부터 양도성예금증서(CD) 1백50억원을 이익치씨를 통해 전달받았던 것으로 드러나 큰 곤욕을 치렀다. 현재 이 사건은 대법원에서 무죄 취지로 환송돼 재판이 진행중이지만 정 회장과 박 전 실장 사이의 앙금의 골이 깊어진 것은 물론이다.
이와 관련해 한 북한 소식통은 “정상회담이 끝나자마자 현대 정 회장의 대북 사업이 현대건설의 유동성 위기와 겹쳐 2001년에는 금강산 관광 사업 대가로 주는 대북 송금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때 정 회장이 박 전 실장에 대해 내심 서운했을 것 아닌가. 그런데 김은성 전 차장이 2001년 당시에도 광범위한 도청을 하고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현대 정 회장의 그런 분위기나 성토 발언을 박 전 실장에게 전달했을 가능성이 있다. 박 전 실장도 정 회장의 ‘서운한 감정’을 읽게 됐고, 그 결과 갈등을 일으킨 양측이 대북 송금 특검 과정을 거치면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관계가 틀어졌던 것이 아닌지 추측해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 전 차장이 재직했던 2000~2001년 당시 불법 도청이 가장 빈번하게 이뤄진 점을 감안하면 남북정상회담과 대북 비밀송금 과정 등 당시의 중요한 ‘국사’와 관련된 인물들을 국정원이 ‘모니터링’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어쩌면 아직까지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박지원씨의 현대 비자금 사건 등 김대중 정권 당시의 ‘비사’를 푸는 키가 김은성 X파일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