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정상회담 이후 중국과 일본의 관계에 훈풍이 불고 있으나 정작 중재자로 나선 한국은 실리를 챙기지 못했다는 분석이다. 박근혜 대통령(가운데)이 지난 1일 한·중·일 정상회담에 참석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왼쪽), 리커창 중국 총리와의 공동기자회견에서 발언하는 모습. 연합뉴스
[일요신문] 동북아 금융·물류 중심 국가를 꿈꾸던 대한민국이 요즘 위태롭다. 그동안 우려 섞인 전망으로만 제기되던 샌드위치·넛크래커(호두까기)론이 차츰 현실화하고 있어서다. 한국의 자동차·스마트폰은 중국의 가격경쟁력과 일본의 기술경쟁력에 밀리고 있으며, 해외의 대규모 사회간접자본(SOC) 개발 사업 수주전에서는 번번이 낙방하고 있다. 국내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부진을 면치 못하며 상품수출과 해외직접투자는 이미 감소세로 돌아섰다. 이런 문제 극복을 위해 나서야 할 정부도 글로벌 세일 외교에서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 실태를 조명한다.
한국의 글로벌 비즈니스가 어려움을 겪는 현장은 자동차·스마트폰·조선 등 국내 주요 산업 모두 해당된다. 현대·기아자동차는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현대·기아차는 지난 2011년 미국 시장에서 8.9%의 시장점유율을 기록한 뒤 2013년까지 3년 연속 8%대의 시장점유율을 자랑했다. 그러나 지난해 미국 자동차 회사들의 신차 출시, 엔화 약세 등의 여파로 지난해는 7%대로 쪼그라들었다.
LA 오토쇼 현대차 부스에 전시된 ‘신형 아반떼(현지명 엘란트라)’. 현대·기아차는 미국 시장 점유율이 7%대로 내려앉았다.사진제공=현대차
이 기간 도요타는 미국에서 현대·기아차보다 2배 많은 237만 대(시장점유율 14.4%)를 팔아 6%의 신장률을 기록했고, 스바루는 51만 대를 판매해 21%나 성장했다. 닛산은 전년보다 11% 많은 138만 6895대를 판매했고, 시장점유율도 8%에서 8.4%로 올랐다. 현대·기아차가 닛산에 추월을 허용한 것은 지난 2011년 이후 3년 만이다.
삼성전자 역시 스마트폰 분야에서 미국 애플과 중국 업체들 틈바구니에서 분전하고 있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다. 삼성전자는 올 3분기 전세계적으로 8380만 대의 스마트폰을 팔아 23.7%의 시장점유율로 업계 1위 자리를 수성했다. 그러나 시장점유율을 지키기 위한 마케팅 비용 등 판매관리비 증가, 중저가폰 판매 확대 등의 영향으로 수익성은 곤두박질쳤다.
이런 가운데 중국의 샤오미·레노버·화웨이 등 중저가폰 제조사들이 아시아·아프리카 시장을 중심으로 시장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어 삼성전자의 1위 자리는 위태롭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글로벌 시장에서 3~4위를 다투던 LG전자는 이미 시장점유율이 10%대 초반으로 꺾이고 업계 순위도 6위로 내려앉는 등 경쟁에서 탈락했다.
선박류 -63.7%, 석유화학 -31.6%, 철강제품 -29.6%, 반도체 -7.0%, 자동차 -1.3%, 석유제품 -44.9%, 평판디스플레이 -9.7%, 자동차부품 -7.5%.
갤럭시S6엣지 플러스(왼쪽)와 갤럭시노트5(오른쪽)을 들고 있는 신종균 삼성전자 IM부문 사장. 삼성 스마트폰이 중국의 중저가폰업체들의 틈바구니에서 분전하고 있다.사진제공=삼성전자
한국의 글로벌 비즈니스 부진은 최근 인프라 개발이 활발한 동남아시아 시장에서도 잘 살펴볼 수 있다. 동남아시아 최대 경제국인 싱가포르와 베트남에 대한 한국의 수출 증가율은 지난 2011년 36.7%, 39.5%에서 지난해 6.6%, 6.0%로 각각 30.1%포인트, 33.5%포인트 급감하는 등 성장 부진에 빠졌다.
이에 비해 중국은 싱가포르 수출액이 지난 2010년 323억 3300만 달러에서 2012년 403억 2100만 달러로 껑충 뛰었고, 대베트남 수출은 2013년 485억 4400만 달러에서 2014년 636억 1800만 달러로 확대됐다. 싱가포르와 베트남은 이제 중국의 10대 수출국에 포함된다. 한국이 글로벌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아 휘청거리는 사이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이 동남아 시장을 잠식한 것이다.
SOC 등 인프라 사업 수주 경쟁에서는 일본에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국제무역연구원의 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아세안 국경 간 인수·합병(M&A) 시장 규모는 394억 달러(623건)로, 이 가운데 일본이 13.0%의 비중으로 1위를 기록했다. 동남아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친일본 정서가 SOC 사업, 나아가 M&A 시장에 영향을 준 것이다. 이에 비해 한국은 2.4%로 12위에 머물렀다. ‘일대일로(一帶一路)’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설립 등 신경제 프로젝트를 추진 중인 중국은 8.1%로 5위를 차지했다.
인천국제공항공사는 미얀마 제2양곤(한타와디) 신공항 개발사업에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가 지난해 말 최종 낙방했다. 인천공항공사는 총 사업비 11억 달러, 최대 운영 기한 50년이나 되는 이 사업에서 낙찰까지 9부 능선을 넘었으나, 협상 막판 미얀마 정부가 자금 조달 방식을 바꾸면서 수주에 실패했다.
당시 미얀마 정부는 자금조달 방법을 투자에서 대외원조 방식으로 바꿔 달라고 요구했는데, 인천공항과 함께 컨소시엄에 참여한 건설사·은행들이 저가 수주의 위험성과 리스크 부담 증가를 꺼려하며 협상은 최종 결렬됐다. 정부도 협상기한 및 조건변경 제안 등의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결국 본계약자로는 미얀마 정부의 모든 안을 수용한 일본·싱가포르 컨소시엄이 선정됐다.
미얀마 정부는 또 지난해 9개의 외국계 은행에 영업권을 주기로 하고 심사를 벌여 일본 은행 3개, 싱가포르 은행 2개, 중국·말레이시아·태국·호주-뉴질랜드 합작 은행을 각각 1개씩 선정했다. 이때 국내 4대 은행들도 영업 신청을 넣었으나, 모두 물을 먹었다.
베트남의 경우 오는 2030년까지 원전 10기를 도입할 계획인데, 1기는 러시아, 2기는 일본이 수주한 상태며, 한국은 아직 수주를 따내지 못했다. 아시아개발은행(ADB)에 따르면 오는 2020년까지 아시아지역의 인프라 투자 수요는 매년 7300억 달러(약 800조 원)에 달할 전망인데, 한국은 수요 증가에 전혀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해 한국의 아시아 지역 건설수주 실적은 159억 2000만 달러. 전년 대비 42% 급감한 수준이다. 글로벌 비즈니스의 성과물이라고 볼 수 있는 FDI(외국인직접투자) 추이를 살펴보면, 한국은 지난 2012년(상반기 기준) 35억 3355만 달러를 고점으로 2013년 27억 7795만 달러, 2014년 25억 9459만 달러 등 하락세다. 올 상반기 FDI 규모는 29억 877만 달러. 경제개발협력기구(OECD)가 지난 2010 출간한 ‘경제세계화지표(Economic Globalization Indicators)’를 보면 한국의 2005~2008년 평균 FDI 건수와 금액 모두 OECD 국가 가운데 최하위권에서 맴돌고 있다.
이런 가운데 동남아 국가들이 보호무역을 강화하고 있어 한국 기업들에게는 험로가 예상된다. 베트남은 태국·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등 아세안 회원국에 적용하는 9인승 이하 자동차의 수입 관세율을 올해 50%에서 2018년 0%로 낮출 예정인데, 이에 비해 한국과 일본·인도산 자동차에는 70%의 수입 관세율을 유지한다는 계획이다. 이는 점유율 1위인 한국 등 베트남 수입차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나라들에 대한 견제의 목적이 짙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한국의 아세안 교역 비중은 12.6%(2014년 기준)으로 미국(10.5%)을 앞서고 있는 가운데 이 같은 보호무역 조치는 한국 기업들의 수출 전선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특히 아세아 10개국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2010~2019년 연평균 5.7%에 달하는 등 빠르게 성장하고 있어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한국 기업들의 안방이라 불렸던 동남아시아 시장, 나아가 글로벌 비즈니스에서 한국의 경쟁력이 예전 같지 않은 이유는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이 하락한 점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프라윳 태국 총리는 비즈니스 협력과 투자유치를 위해 지난해 12월과 올 2월 중국과 일본을 각각 방문해 정상회담을 가졌는데, 이 일정 중 한국은 빠져 있었다.
조코 위 인도네시아 대통령도 경제협력 논의를 위해 지난 3월 일본과 중국을 연달아 방문하고 82조 원 규모의 투자를 약속 받았는데 이때도 한국은 고려 대상에서 제외됐다. 중국과 일본은 각각 화교 문화와 막강한 외교·경제력을 앞세워 동남아 주요국들과 협력 관계를 강화하고 있는데 비해, 한국은 ‘변방’에 머물고 있다.
동남아시아뿐만 아니라 유럽 주요국들도 중국과 일본에 적극적으로 애정 공세를 퍼붓고 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올 3월 일본을 방문해 일본 경제인들과 조찬 회담을 갖고 적극적인 경제협력 방안을 도출했다. 당시 조찬에는 그로리 독일산업연맹회장, 슈바이처 독일상공회의소연합회장 등 독일 재계를 대표하는 재계 인사 10여 명이 참석했다. 일본에서는 사카키바라 사다유키 게이단렌 회장 등 재계 거물들이 대거 참석했다. 당시 메르켈 총리는 위안부 문제 등 일본의 역사관에 비판적인 발언을 쏟아냈지만, 실제로는 경제적 실리를 챙겼다.
이밖에 미국 대통령 부인 미셸 오바마와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 코모로프스키 폴란드 대통령, 사야손 라오스 대통령, 무히딘 말레이시아 부수상 등이, 지난해에는 스리랑카 대통령과 이스라엘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해 경제협력 방안과 투자 방안을 도출했다.
이들은 동아시아 비즈니스 외교를 펼치겠다며 중국과 일본을 순회했지만, 정작 한국은 찾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는 중국과 미국·일본의 경계선에서 균형 외교를 펼치고 있다며 ‘외교’를 현 정부의 가장 큰 치적으로 꼽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경제적 실리는 챙기지 못하는 모습이다.
이런 가운데 중국과 일본의 경제적 관계가 긴밀해지고 있다는 점은 한국에는 큰 위협이다. 서울에서 한·중·일 정상회담이 열린 직후인 지난 4일. 일본의 재계대표단 220명이 중국을 방문해 리커창 총리와 면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는 무네오카 쇼지 일중경제협회 회장, 사카키바라 게이단렌 회장, 미무라 아키오 일본상공회의소 회장 등도 참석했다. 일중경제협회는 게이단렌, 일본상공회의소 등 3개 단체 연합으로 중국을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대표단 규모도 사상최대였다.
“일본 재계는 양국 관계 개선 및 안정 확립을 지지한다. 우리는 중일 양국 전략적 호혜 관계 발전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일본 대표단은 이번 회담에서 중국에 적극적인 구애 공세를 펼쳤고, 중국도 이에 화답했다. 일본경제협력 대표단이 중국 총리를 만나는 것은 지난 2009년 이후 6년 만으로, 한·중·일 정상회담이 화해의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한국은 중재자를 자임하며 중·일 정상을 대화의 장에 앉혔으나, 정작 실리를 챙긴 것은 중국과 일본이다.
김서광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