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6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민주당 지도부를 만났다. 이날 DJ는 임동원 신건 전 국정원장의 구속에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국회사진기자단 | ||
DJ는 동교동 비서를 통해 “대한민국을 부인한 사람(강정구 교수)은 불구속되고 대한민국을 지켜낸 사람은 구속됐다”며 “이는 형평성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라고 현 정부에 대한 불만 어린 심기를 드러냈다. 이에 대해 동교동계 인사들은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DJ가 이번엔 진짜 화가 난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이 같은 해석에 대해선 정치권 인사들도 대부분 수긍하는 편이다. 심지어 일각에선 “‘DJ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게 아니냐”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퇴임 이후 그동안 드러내지 않았던 참여정부에 대한 불편한 속내를 앞으론 감추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뒤따랐다.
[장면1] 지난 8일, 열린우리당 신임지도부 DJ 예방
지난 10·26 재선거에서 참패한 후 당 지도부를 새로 꾸린 열린우리당 지도부가 DJ를 예방했다. 이날 DJ는 정치적으로 의미심장한 발언을 내놓았다. 그는 정세균 당 의장 등 신임 지도부에게 “여러분들은 나의 정치를 계승한 분들이라고 생각한다. 전통적 지지표 결집 노력을 열심히 해야 한다”고 밝혔다. 민주당과 함께 ‘DJ 적자’ 공방을 벌이고 있는 열린우리당에 대한 DJ의 속내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어서 이날 발언은 주목을 끌었다.
[장면2] 지난 16일, 민주당 지도부 DJ 면담
전날(15일) 밤 임동원·신건 전 국정원장이 도청 사건과 연루된 혐의로 전격 구속된 상황에서 DJ는 한화갑 대표를 비롯한 민주당 지도부를 만났다. 이날 DJ는 “두 전직 국정원장은 내가 같이 일해 봐서 잘 안다. 내가 절대로 도청을 하지 말라고 했더니 도청을 하래야 할 수가 없을 뿐더러 할 필요도 없다고 하면서 나더러 걱정하지 말라고 하더라. 나는 두 전직 국정원장을 완전히 믿는다”면서 “(참여정부가) 지금 무리한 일을 하는 것이다”며 현 정부에 가시 돋힌 발언을 했다.
그러면서 “내가 대통령을 그만두고 청와대를 나올 때는 편안하게 살고 마음고생을 안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뜻대로 안되고 지금도 힘들게 사는 것을 보니 내 인생이 그런 것 같다”는 소회를 털어놓기도 했다.
이 발언과 관련, 민주당 이낙연 의원은 “현 정부가 두 전직 국정원장을 동시 구속한 데는 ‘국민의 정부’를 흠집 내려는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다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열린우리당의 한 재선 의원도 “참여정부가 시작되자마자 DJ의 최대 업적인 대북사업에 칼을 들이댄 ‘대북송금 특검’,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 등 최측근들의 잇따른 구속, ‘햇볕정책의 전도사’였던 임동원 전 국정원장 등의 구속으로 그동안 쌓였던 불만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 같다”는 입장을 밝혔다.
DJ가 퇴임 이후 현 정부에 대해 심중에 켜켜이 쌓여있던 불만이나 섭섭한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앞에서 짐작할 수 있듯 임동원-신건 구속으로 DJ의 행보가 백팔십도 바뀌었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그동안 자제했던 ‘정치적 행보’를 시작했다는 것.
동교동계의 한 인사는 전화 통화에서 “현 정부 들어와서 동교동계 식구들이 줄줄이 감옥에 다녀오지 않았나. 아무래도 현 정권(노무현 정부)의 주인이 자신들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선 전 정권(DJ정부) 인사들을 장악해야 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권노갑이나 박지원이 현대 이익치에게 돈을 받지 않았다는 정황이 알려지고 있지 않나. 그런데도 표적 삼아 우리를 감옥에 보냈으니 DJ의 심기가 불편하지 않았겠나. 거기다가 이번엔 자신이 임명했던 정보기관장을 세계적으로 유례없이 두 사람이나 동시에 구속시켰으니 더 이상 (DJ로서도) 참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DJ는)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의 통합문제에 대해서도 앞으로 자신의 의중을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같은 가운데서도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14일 “지금 열린우리당에 가장 중요한 것은 창당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창당 정신’을 강조했다. 여권에선 노 대통령의 이 같은 발언에 대해 현재 제기되고 있는 민주당과의 통합론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피력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DJ의 ‘전통적인 지지세력 결집 발언’과도 상충되는 것이어서 향후 정계 개편의 또 다른 불씨가 될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다. 여기에 열린우리당의 호남 지역 의원들도 민주당과의 통합 내지 소연정을 공공연히 주장하고 있어 노 대통령의 이번 ‘창당 정신 발언’과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향후 정계 개편 구상과 관련해 DJ와 노 대통령의 갈등이 심화될 공산도 적지 않다는 게 정가의 시각이다.
동교동계의 또 다른 인사는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이 10%대로 떨어졌다. 이게 곧 민심 아닌가. 민심을 중시하는 DJ는 이런 점도 아쉬워했을 것”이라며 “(DJ는) 심사숙고해서 말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이번에 두 국정원장이 구속된 것에 대한 심경을 말한 것도 전혀 우발적인 것이 아니다. 그동안 하고 싶은 말씀을 함축해서 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 일을 계기로 앞으로도 DJ는 정치적 견해를 밝힐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현 정부에 대한 DJ의 불만이 흘러나오자 열린우리당은 노심초사하고 있는 형국이다. 정세균 당 의장은 16일 확대간부회의에서 “검찰은 (YS 정부시절 운영된 안기부 도청팀인) 미림팀을 비롯한 권위주의 정부시절의 문제에 대해서 역사적·사법적 정의를 세우는 데 앞장서야 될 것이다. 형평이 어긋나는 그런 일이 계속돼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또한 민주당에 이어 열린우리당도 임동원-신건 전 원장의 무료변론을 자처하면서 10여 명의 변호인단을 구성했다. 이와 함께 YS정부 시절 운영됐던 미림팀 도청 사건을 처벌하기 위해 공소시효를 연장하는 방안도 검토중이다. DJ시절과 함께 YS시절 도청도 동시에 처벌함으로써 DJ정부로 집중된 도청파문에 ‘물 타기’를 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다.
정치권에선 ‘죽은 권력’인 DJ가 ‘살아 있는 권력’인 여권의 정치 역학구도를 바꿀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데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특히 대부분의 호남 출신에겐 아직도 ‘DJ 향수’가 남아 있다. 호남 민심이 이렇기 때문에 당장 내년 지방선거에서 DJ가 민주당 손을 들어줄 경우 여당으로선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DJ는 지난 16일 민주당 지도부와 면담할 당시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그는 “내가 여러분을 정신적으로 성원은 하지만 일일이 당에 가서 결재하고 공천을 지시하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 아니냐”며 “여러분이 당당하게 정치를 해 나가라. 지난번에(2월17일) 내가 말했다시피 민주당이 50년 걸어온 길이 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평화통일 정책을 민주당이 일관되게 걸어왔다. 한 번도 바꾸지 않고 그 길을 걸어 왔으니 여러분의 갈 길은 분명하다”고 했다. ‘김심(金心)’이 민주당에 실린 듯한 발언이어서 열린우리당으로선 속이 탈 수밖에 없다.
게다가 호남 사람들은 최근의 도청정국과 관련해 현 정권이 DJ의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힌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따라서 호남 지역에서 현 정부에 대한 민심 이반 현상이 극심해질 경우 내년 지방선거는 물론, 향후 대선에서도 선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분석이 여당 일각에서도 나오고 있다.
특히 지난 17일 유력한 차기 대권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고건 전 총리가 동교동을 방문한 것을 두고도 정가에서는 미묘한 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물론 고 전 총리측은 “김 전 대통령이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문병 가지 못해 문병 겸 인사차 방문한 것”이라며 정치적인 해석을 경계했다.
그렇지만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고 전 총리의 동교동 방문이 아무리 정치적 목적이 없었다 해도 대권주자로 거론된 다음 전직 대통령으론 처음으로 DJ를 예방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보다 앞선 지난 14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도 동교동을 방문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서 DJ와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두 대권주자의 동교동 방문은 사뭇 의미가 다르다는 게 정가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한 원로 정객은 “향후 DJ는 결국 자신의 정신과 뜻을 ‘발전적’으로 계승할 수 있는 정치세력에 힘을 실어줄 것이다. 도청정국이 전개되는 지금으로선 열린우리당보다는 민주당에 훨씬 가깝다. 그러나 민주당 독자적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게 DJ의 고민이다. 결국 과거 DJP식의 연합을 훈수할 수밖에 없는데 그 대상이 문제다. 유신 독재자의 딸인 박 대표는 DJ의 대안이 될 수 없는 반면 고 전 총리는 DJ의 대안으로 선택될 수 있다. DJ와 고 전 총리의 만남이 어떤 식으로 발전할지 좀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라고 말했다.
최근 DJ는 ‘응접실 정치’를 통해 ‘세상 밖으로’ 자주 노출되고 있다. 심지어 일각에선 요즘 DJ의 모습이 과거 야당총재 시절과 흡사하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야당 시절의 DJ는 투사였다. 과연 DJ는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새로운 전쟁을 시작한 것일까.
김지영 기자 you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