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4일 민중 총궐기 집회를 경찰이 물대포로 진압하는 모습. 집회 주최측의 요구안 대신 폭력 시위냐 과잉 진압이냐 논란만 부각됐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온다!”
지난 11월 14일 오후, 민중 총궐기 집회에 참여한 한 참가자가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다급히 우산을 꺼내 들었다. 현장에 있던 기자도 이들을 따라 엉겁결에 바닥에 떨어져 있던 우의를 들었다. 절반은 입고 절반은 덮어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운 물보라가 한 차례 지나갔다.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경찰이 차벽 위에서 분사한 캡사이신이었다.
물보라의 방향이 바뀌자, 일부 참가자들은 우산을 들고 차벽으로 뛰어갔다. 이들은 경찰버스를 향해 창문을 찌르기도 했고, 차벽을 해체하려 밧줄을 묶어 끌어당기기도 했다. 다시 캡사이신 분사가 시작되자 우산을 펼쳐 막아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물대포’가 등장한 것. “해산하라”는 경찰의 경고방송에도 집회 참가자들이 물러나지 않자, 살수차 위쪽에 설치된 긴 막대 모양의 ‘붐대’에선 굵고 곧은 물기둥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살수 절차에 따라 ‘분사’에서 ‘곡사’로, 다시 ‘직사’로 바뀐 물줄기에 우산은 앙상한 살만 남아 무용지물이 됐다. 무방비로 서 있던 일부 참가자들은 물대포의 힘을 이기지 못해 넘어지기도 했다.
거센 물줄기 속에서도 참가자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일부 참가자들의 손에는 우산 대신 쇠파이프와 벽돌 등이 쥐어지기도 했다. 차벽에 밧줄을 묶어 끌어내려는 시도도 멈추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파란색 조끼를 입은 한 남성이 경찰 버스에 다가갔다. 그는 홀로 버스에 묶인 밧줄을 맨손으로 잡아당겼다. 다른 곳을 향해있던 물대포는 밧줄이 움직이고 있는 곳으로 돌아섰다. 이후 거센 물줄기가 그의 머리에 내리꽂혔고, 힘없이 쓰러져 움직이지 못하는 와중에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코에선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주변에 있던 동료 한 명이 달려와 그를 부축하려 하자, 또 다시 물대포는 동료를 향했다. 두 명이 더 달려오고 나서야 정신을 잃고 쓰러진 남성은 현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오후 6시56분께, 20여 초 동안 서울 종로구청 입구 사거리에서 일어난 일이다.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백남기 씨(69)는 전남 보성에 거주하는 가톨릭농민회 소속 농민이다. 지난 15일 오전 집회에 참가했던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등은 백 씨가 입원해 있는 서울대병원에서 긴급기자회견을 열고 “뇌진탕과 뇌출혈 등이 있다”고 밝혔다. 백 씨는 현재 뇌수술을 받았다. 뇌가 부어 봉합하지 못하고 열어 놓은 채 중환자실에서 약물 치료를 받고 있다. 아직까지도 의식은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집회가 끝난 이후 주최 측이 발표한 노동 기본권, 국정 교과서 폐지 등이 담긴 ‘11개 영역 22개 요구안’ 대신 ‘불법·폭력 시위냐 과잉 진압이냐의 논란’만 부각됐다. 특히 백 씨의 부상은 이 논란의 쟁점 중 하나로 떠올랐다. 그런데 최근 “백 씨의 부상은 물대포가 아닌 시위대의 폭행으로 인해 중태에 빠졌다”는 주장이 SNS 등을 통해 퍼지기 시작했고, 정치권까지 번져 여·야의 대립으로까지 이어졌다.
일베 회원들이 빨간 우의 남성이 쓰러져 있는 노인을 폭행했다며 증거로 제시한 뉴스타파 영상. 그러나 영상 전후의 맥락을 보면 그 주장은 신빙성이 낮은 것으로 보인다.
논란은 <뉴스타파>에서 백 씨가 쓰러질 당시 상황을 촬영한 영상에서 출발했다. 당초 이 영상은 백 씨가 물줄기를 맞고 쓰러지는 장면과 쓰러진 이후에도 물줄기를 맞고 있는 모습이 모두 담겨있어, 경찰의 과잉진압에 대한 결정적 증거로 제시됐다. 그런데 백 씨가 쓰러진 이후 주변에 있던 남성들이 달려와 부축하는 장면을 근거로 “‘빨간 우비’를 입은 남성이 쓰러진 백 씨를 무릎과 주먹으로 가격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해당 영상을 보면, 백 씨가 쓰러지자 주변에 있던 남성 한 명이 달려와 백 씨의 상태를 확인하고 현장에서 끌어내려 한다. 하지만 도움을 주려던 남성도 물대포에 맞아 백 씨를 부축하지 못하자 두 명이 더 달려온다. 이 가운데 한 명이 ‘빨간 우비’를 입은 남성이다. 이 남성은 물대포를 피해 백 씨가 쓰러진 곳으로 다가왔고, 백 씨 발밑에 정면으로 선다. 그 순간 물줄기가 빨간 우비 남성의 등 뒤를 덮치고, 그는 백 씨 쪽으로 쓰러진다. 이 장면을 두고 “빨간 우비를 입은 남성이 백 씨를 폭행했다”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이 같은 의혹은 지난 11월 16일 트위터에서 먼저 제기됐다. 한 네티즌은 자신의 트위터에 “물대포가 아닌 어떤 빨간 상의 입은 성명 미상의 남자가 쓰러진 노인의 머리를 깔고 뭉갰다. 향후 상해치사나 살인 혐의를 받을 수 있는 이 남성을 수배한다”고 게시했다. 트위터뿐만이 아니었다. 같은 날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에서도 비슷한 내용의 게시물이 올라왔다. 해당 게시물을 올린 네티즌은 빨간 우비의 남성과 쓰러진 백 씨가 촬영된 사진을 올리고 “(빨간 우비를 입은 남성이) 쓰러진 노인 위에 있던 자를 밀쳐내고, 노인의 머리를 가격하는 동시에 무릎으로 복부에 치명타를 입힌다”라고 주장했다. 세월호 특별조사 위원회 여당 측 위원으로 참여했던 차기환 변호사도 자신의 트위터에 “빨간 우비를 입은 자, 쓰러진 할아버지를 무릎과 주먹으로 가격하고 뇌진탕 이상의 중상을 입혔군요. 시위대가 중상을 입혀 놓고 경찰에게 뒤집어씌우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라고 주장했다.
정치권도 가세했다. 김도읍 새누리당 의원은 지난 11월 19일 김수남 검찰총장 후보 인사청문회에서 “빨간 옷을 입은 한 사람이 쓰러져있는 농민에게 주먹질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영상이 찍혀있다”며 “농민의 상해부위나 현재의 위중한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 수사초기에 면밀하게 확인해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같은 자리에 참석한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은 관련 동영상을 틀고 “지금 다쳐서 끌려가는 노인을 빨간 우비를 입은 남성이 어떻게 하는지 보라. 가서 확 몸으로 일단 덮친다”며 “저기 다른 사람이 가서 구호조치를 하려고 하는데, 굳이 가서 올라타는 모습이 보인다. 백 노인이 우측 두개골 골절상을 입었다고 하는데 이게 상해의 원인이 됐다고 보여진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논란이 불거지자 “폭행은 말도 안 된다”는 주장도 나왔다. 먼저 청문회에서 새누리당 의원들이 근거로 삼은 동영상이 악의적으로 편집된 ‘짜깁기 영상’이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그날 청문회에서 서영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원본 동영상을 공개하며 “눈이 있다면 똑바로 보시라”며 ‘시위대 폭행’ 주장을 반박했다. 서영교 의원은 “빨간 옷을 입은 사람이 가서 (물대포를) 막으려 한다. 하지만 뒤에서 물대포가 쏴서 (빨간 옷 입은 사람을) 엎어뜨린다”고 말했다.
집회 주최 측인 민중총궐기투쟁본부도 같은 날 논평을 내고 “새누리당 의원들이 ‘시위대 폭행설’을 유포하고 있다. 어이없는 일이다. 상식의 눈을 갖고 동영상을 보라”고 반박했다. 투쟁본부는 “누가 봐도 명확한 당시 상황을, 인터넷에 떠도는 근거 없는 주장을 활용했다”고 반박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현장에 있던 한 집회 참가자도 ‘빨간 우비 폭행’에 대해 “말도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난 26일 <일요신문>과 만나 “빨간 우비를 입은 사람이 백 씨 쪽으로 쓰러진 것은 맞다. 하지만 고의로는 보이지 않았다”며 “‘빨간 우비’는 동료들이 백 씨를 들어 올린 뒤, 응급차로 후송할 때 자리를 떠나지 않고 뒤에서 계속 따라갔다. 폭행이 목적이었다면 부상자를 따라갔겠나”라며 반문했다.
이런 논란이 제기된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당시 기자도 현장에 있었지만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인 터라 정확한 상황을 목격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는 현장에 있던 다른 목격자나 그 순간을 담아낸 영상도 마찬가지다.
당시 현장에 있던 다른 언론사 소속 기자는 “백 씨가 폭행으로 코뼈가 부러졌다는 일부 주장이 있었고, 보도되기도 했다. 하지만 집회 이후 백 씨의 딸은 ‘외상은 없다. 코뼈가 골절되거나 안구가 다치거나 하지 않았다. 두개골 함몰도 없다’며 ‘뇌 내출혈이 발생했고 뇌가 부어있는 상태’라는 의사소견을 기자들에게 전했다”고 말했다.
여기에 경찰의 당시 상황조사에서도 ‘빨간 우비 폭행’은 언급되지 않았다. 해당 논란이 불거지기 전인 지난 17일 구은수 서울경찰청장은 기자간담회에서 “자체적으로 채증팀이 찍은 당시 상황 영상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당시 간담회에서 ‘빨간 우비 폭행’ ‘시위 참가자 가격’ 등의 얘기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보다 객관적인 분석을 위해 <일요신문>은 비디오 판독 전문가에게 관련 영상 분석을 의뢰했다. 당시 상황을 담은 영상은 총 3개로 확인 됐는데, <뉴스타파>와 <노컷TV>, <미디어몽구> 등이 각각 다른 각도에서 촬영한 영상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비디오 판독 전문가는 “빨간 우비의 남성은 갑자기 등 뒤에서 덮친 물대포의 힘을 이기지 못해 앞으로 넘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가격하기 위해 팔꿈치가 뒤로 꺾여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 “찰나지만 물대포를 맞는 순간 넘어지지 않고 버티려는 모습을 보인다. 팔꿈치가 뒤로 꺾인 것은 그 때문으로 여겨진다. 고의로는 보이지 않는다”며 “넘어진 이후에 양 손을 땅에 짚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빨간 우비 폭행’ 논란이 거세진 이후 “해당 남성은 공공운수노조 배지를 달고 있었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지만, 취재 결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공공운수노조 관계자는 “시위 참가자 전원의 복장 등을 확인할 수 없다. 자체적으로 제작한 배지도 없다”고 말했다. ‘민주노총의 강경 시위 참가자’ ‘폭력 행위 가담자’ 등의 의혹 역시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현재 경찰청은 시위대가 밧줄로 경찰 버스를 끌어내려는 불법시위 현장에 ‘빨간 우비’ 남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 해당 남성에 대한 신원확인 작업을 벌이고 있다. 경찰은 지난 24일 “채증자료 등을 통해 해당 남성에 대한 신원과 집회 현장에서 행위 등을 확인하고 있다”고 밝혔다. 신원이 특정되는 대로 해당 남성을 불러 제기된 의혹에 대한 정확한 사실관계 등을 확인한다는 방침이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