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원 오리콤 부사장(오른쪽)이 지난 10월 31일 동생 박재원 두산인프라코어 부장(왼쪽), 부친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가운데)과 함께 한국시리즈 5차전을 관람한 후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
지난 11월 30일 두산그룹은 박서원 오리콤 크리에이티브 총괄 부사장이 ㈜두산 사업부문 유통전략담당 전무를 겸직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박 부사장은 현재 두산그룹 회장을 맡고 있는 박용만 회장의 장남이다. 그가 전무로 겸직하게 된 해당 사업부는 이번에 새로 시작할 면세점과 두산타워 쇼핑몰 등을 담당하고 있다. 박 부사장은 유통 면세점 사업과 관련된 전략수립 등 중추적 역할을 맡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두산 측은 “면세점 분야는 유통과 마케팅이 중요하기 때문에 광고회사 임원인 박서원 부사장이 적임자로 평가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앞서 두산은 지난 11월 14일 서울 시내 면세점 신규사업자로 선정돼 내년 4~5월 개장을 목표로 면세점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면세점의 입지는 서울 동대문의 두산타워 빌딩으로 정했다. 기존 쇼핑몰은 그대로 유지하고, 다른 공간을 면세점으로 활용해 1만 7000㎡ 규모의 면세점을 개장한다는 계획이다.
이번 면세점 사업권 획득으로 두산그룹은 20년 만에 유통사업 부문에 복귀하게 됐다. 두산은 지난 1995년부터 코카콜라, 오비맥주 등 주축이었던 식음료 소비재 부문을 정리하고 두산중공업, 두산건설, 두산인프라코어 등을 중심으로 한 건설·중공업 기업으로 변신했다.
하지만 건설경기 침체와 글로벌 경기 불황이 수년간 지속되면서 재계에서는 두산의 위기설이 끊임없이 나돌았다. 두산중공업과 두산인프라코어는 구조조정까지 들어간 형국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캐시카우(현금창출원)로 인식되는 면세점 사업에 두산이 진출하게 된 것이다.
두산그룹 관계자는 “두산그룹의 중공업부문 매출은 15조 원이다. 그런데 연매출 8000억 원을 계획하고 있는 면세점 사업을 따낸 것을 두고, 면세점이 핵심 사업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강조하면서도 “면세점 사업이 두산에게 새로운 사업 분야이긴 하다”고 전했다.
이처럼 두산그룹이 최근 중점적으로 평가하는 사업에 박 회장의 장남 박 부사장이 임원으로 가게 된 것이다. 박 부사장이 그룹 내 광고 분야가 아닌 사업에서 임원을 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동안 박 부사장은 자신은 ‘광고쟁이’일 뿐이라며 두산그룹 경영과는 일정한 선을 그어왔다. “여느 재벌가 자제들처럼 가업을 물려받으면 된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며 그룹 경영 참여에는 뜻이 없다고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박 부사장이 두산그룹에 합류하게 된 것은 자신의 광고회사 ‘빅앤트’를 창업해 전 세계적으로 실력을 인정받으며 두산 광고계열사 오리콤 부사장직에 영입되면서부터다. 그룹에 들어와서도 박 부사장은 지난해 ‘바른 생각’ 콘돔과 낙과로 만든 잼 ‘이런쨈병’ 등의 사업을 통해 기존의 그룹 오너 후계자들과는 다른 행보를 보여 왔다.
그의 이러한 독특한 이력을 감안할 때 두산 사업부문 유통마케팅·기획 전략담당 전무라는 직책을 맡은 것은 다소 이례적이다. 재계 일각에서는 두산그룹의 경영승계 후계구도에 변화가 생기는 것이 아니냐는 전망이 제기되고 있다.
이미 오리콤의 급속한 성장으로 박 부사장의 능력은 상당 부분 검증된 상태에서, 면세점사업 참여는 그룹 내 존재감을 더욱 부각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면세점 사업은 최근 유통산업의 핵심으로 주목받으며 롯데 신동빈 회장, 삼성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등 다른 그룹들도 오너들이 직접 챙기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박 부사장의 경영능력을 평가하는 시험대가 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오리콤 홈피 속 박서원 부사장 프로필 사진.
박용만 회장 이후로는 대를 넘어가 오너 4세들 간의 ‘사촌 경영’이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박용곤 명예회장의 장남인 박정원 두산 회장을 필두로 차남 박지원 두산중공업 부회장, 박진원 전 두산 산업차량BG 사장·박석원 두산엔진 상무(박용성 전 두산중공업 회장 장남·차남), 박태원 두산건설 부회장(박용현 두산연강재단 이사장 장남) 등이 계열사 곳곳에 포진해 있다. 이런 와중에 박서원 부사장까지 그룹에 합류하며 차기 회장 후보에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이다.
현재로서는 박정원 회장이 박용만 회장에 이어 회장직을 잇게 될 것이란 관측이 가장 우세하다. 박정원 회장은 두산그룹에 처음 입사한 후 10년 만에 임원을 달았다. 이는 한국의 오너 3·4세들 중 임원을 달기까지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린 것으로 평가된다. 그만큼 그룹 내에 가장 오래 몸을 담고 있었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재계 한 관계자는 “그동안 한국의 여러 대기업들이 경영권을 두고 형제간 다툼을 벌이는 모습을 보여 왔다. 언제 어떤 양상이 펼쳐질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고 귀띔했다. 박정원 회장 외에도 누구라도 경영능력을 검증받아 유력한 차기 회장 후보로 치고 나올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두산그룹 측에서는 박 부사장의 ㈜두산 사업부문 유통마케팅·기획 전략담당 전무 겸직을 후계구도 변화와 연관 짓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선을 그었다. 두산그룹 한 임원은 “박 부사장은 오리콤 부사장으로 그룹사에서 역할을 해왔다. 이번에 추가로 새로운 직책을 맡은 것뿐이다. 스태프로서 동현수 두산 사장을 보좌하는 역할이다”라며 “유통사업부문에서도 마케팅 기획을 맡기 때문에 결국 크리에이티브 직종의 연장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따라서 이번 인사를 후계구도와 연관 짓는 것은 무리가 있는 것 같다. 이미 오너 4세들이 계열사 곳곳에서 역할을 맡아 해오고 있다”고 전했다.
또 다른 재계 관계자 역시 “현재 그룹을 경영하는 이는 박용만 회장이지만, 아직 박용곤 명예회장, 박용성 전 회장 등 형님들이 계신다. 두산그룹은 수십 년간 형제경영을 해온 만큼 두산가의 가족회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따라서 박용만 회장도 후계 승계에 대해서는 혼자 결정하지 못할 것”이라고 전했다.
그러면서도 “두산그룹 경영 참여에 뜻이 없다고 밝혀온 박 부사장이 두산 유통부문에 직함을 올린 것은 주목해볼 필요는 있다”고 귀띔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