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2일 새 원내대표로 선출된 이재오 의원과 박근혜 대표. 박 대표는 이명박 시장과의 ‘대리전’에서 참패한 터라 이 의원과 나란히 앉은 박 대표의 표정이 썩 밝게 보이지만은 않는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사립학교법 강행처리(12월9일) 이후 한 달여 넘게 “온 국민이 불같이 일어나 노무현 정권을 응징하자”(1월11일 수원 집회)며 장외투쟁을 진두지휘해 왔지만 정작 당 안팎의 사정은 갈수록 박 대표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가면서다. 정부·여당의 태도변화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장외투쟁의 동력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고, 당 내외에서 박 대표의 입지를 뒤흔드는 일들이 연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을 반영하듯 여론조사에서도 박 대표에 대한 지지도는 큰 폭의 하락세를 보여 고민을 더욱 깊게 만들고 있다.
지난 12일 치러진 한나라당 원내대표 경선 결과는 박 대표가 처한 작금의 어려운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박 대표의 최측근인 김무성 의원과 이명박 서울시장(MB)의 ‘오른팔’ 격인 이재오 의원이 맞붙어, 두 잠룡(潛龍) 간 ‘대리전’ 양상으로 치러진 이번 경선에서 김 의원이 50 대 72라는 스코어로 ‘참패’를 겪은 것이다. 이제까지 여론조사상 대권선호도에서는 MB에 밀릴지라도 당내 기반에선 앞서 있다고 자신했던 박 대표로선 경선 결과가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나라당 내에서는 계파를 불문하고 ‘이재오 원내대표’의 출현을 박 대표의 정치적 패배이자 당내 역학관계가 급격히 변화하고 있음을 뚜렷이 보여주는 징후로 보는 데 별다른 이견이 없는 상태다.
친박(親朴)으로 분류되는 영남권 한 재선 의원은 “장외투쟁이 장기화되면서 의원들 사이에 박 대표의 리더십에 대한 비판론이 확산되고 있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마 박 대표로선 이제까지 쌓아왔던 ‘공든 탑’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었을 것이다”고 말했다.
이 의원은 “이번 경선은 박 대표나 MB가 대외적으로 ‘엄정 중립’을 표명했지만 양측이 처음으로 정면승부를 건 ‘일전’이었다. 그런 만큼 박 대표로선 이번에 사실상 소속 의원들로 부터 ‘정치적 불신임’을 받은 셈이 됐으며, 반대로 MB로선 7월 초 당 복귀시 새로운 주류를 형성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번 패배로 박 대표는 5·31 지방선거와 7월 전당대회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는 데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비주류측에선 계파별로 차이가 있긴 하지만 경선결과에 보다 적극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려는 기류가 대부분이다. 먼저 그동안 현안마다 박 대표와 대립각을 형성해 왔던 ‘수요모임’ 등 소장파 그룹에선 ‘박근혜 체제’의 와해를 기정사실로 여기는 분위기다.
소장파인 A의원은 “경선 표 분석을 해보면 MB계가 주축을 이룬 ‘국가발전전략연구회’(발전연)와 수요모임 등 기존의 비주류 양대 세력은 물론 ‘초지일관’, ‘푸른 모임’ 등 중도파 대부분도 이재오 의원을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보수성향이 강해 박 대표의 확고한 지지기반으로 여겨졌던 영남권에서도 그동안 ‘원내외 병행투쟁론’을 지지했던 중진들과 초·재선들이 이 의원을 지원한 것으로 분석된다. 한마디로 그동안 실체 없이 느슨하게 형성된 당내 ‘친박 그룹’의 알맹이 없는 실체가 고스란히 드러난 것으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발전연을 중심으로 한 MB계는 겉으론 “인물 대결에서 이재오 의원이 승리한 것”이라며 표정관리에 애쓰면서도 원내사령탑을 자파 핵심인사가 장악한 데 대해 고무된 모습이 역력하다.
발전연 소속 한 의원은 “박 대표의 정국 운영과 주변 측근들에 대한 거부감이 승패를 가른 1차 요인이긴 하지만 MB의 대중적 인기가 당내 세력으로 구축되기 시작한 것도 이번 경선이 갖는 의미”라며 “지금 추세라면 앞으로 지방선거 공천과 선거전 과정에서도 MB측에 힘이 실릴 가능성이 높으며 상대적으로 박 대표는 내리막길을 걸을 확률이 크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열악한 당내 상황은 사학법 무효화 장외투쟁 후의 여론조사에서 박 대표의 지지도 급락으로 이어지고 있어 박 대표측의 고민을 더욱 깊게 만들고 있다. 한국사회여론조사연구소(KSOI)가 지난 10일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박 대표의 직무수행 지지도는 장외투쟁 시작 전인 지난해 11월에 비해 무려 13%포인트나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조사에서 박 대표의 직무수행 지지도는 긍정평가가 52.0%를 기록했다. 부정적 평가(33.2%)보다 우세하긴 했지만 65.0%에 달했던 11월 말 조사 결과와 비교하면 ‘적신호’로 받아들이기에 충분한 수치다.
KSOI는 또 이번 조사 결과 한나라당의 지지도는 33.0%로 앞선 조사에 비해 3.6%포인트 하락했다고 밝혔다. ‘사학법 올인’이 박 대표뿐만 아니라 한나라당 지지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KSOI측은 박 대표의 직무수행 지지도는 10·26 재선거 이전으로 회귀한 것이라고 밝혀 재선거 압승으로 따놓았던 포인트를 장외투쟁 국면에 접어들면서 사실상 ‘다 까먹은 셈’이란 해석을 낳고 있다.
특히 박 대표가 ‘헌법정신 수호’라는 명분까지 내걸며 전력투구하고 있는 장외투쟁에 대한 비판여론이 갈수록 높아지는 상황이어서 박 대표의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앞서 언급한 KSOI 조사에서 ‘장외투쟁 철회, 국회 등원’ 의견이 무려 81.8%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등 당 안팎에선 “이대로 가서는 안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 측근 핵심 당직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다. 당장 당 운영에서 이재오 신임 원내대표가 ‘박 대표와 당무를 협의함에 있어서 의견이 다를 경우 내가 양보하겠다’고 하지만 이미 박 대표의 주도권이 흔들리기 시작한 터에 그대로 되겠느냐”고 우려했다.
이와 관련, 일부 측근들은 사학법 재개정과 관련한 여야 협의가 시작돼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되면 박 대표가 당 대표직을 내놓고 재충전 기회를 갖는 방안도 심각하게 고려해 봐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서 주목을 끌고 있다.
영남권에서 대표적인 ‘친박’으로 꼽히는 한 초선 의원은 “지금의 수세 국면을 탈피할 마땅한 카드가 없다면 박 대표가 굳이 지방선거 때까지 대표직을 맡아봐야 그다지 큰 소득이 있을지 의문스럽다. 특히 MB측이 당내에 세력기반을 확실히 마련한 상황에서 ‘지방선거 승리=박 대표의 공로’라는 등식이 당 내외에 먹혀들 가능성이 낮다면 더욱 그렇다. 차라리 지방선거 전 적절한 시점에 박 대표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 보다 자유로운 입장에서 당 내외 상황에 대처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의원은 아울러 “박 대표는 ‘계보를 만들지 않겠다’고 하지만 향후 당내 대선 후보 경선을 제대로 준비하기 위해서는 이제부터라도 캠프 개념으로 네트워크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이번 원내대표 경선에서 보듯 지금처럼 느슨하게 당 내외 인맥 관리를 했다가는 다시 한번 결정적 시기에 낭패를 볼 수 있다. 특히 MB와 손학규 경기지사의 당 복귀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새로운 네트워크의 구성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영훈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