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의 한 정통한 소식통은 “천 장관은 국가의 수사권 전반이 국민의 입장에서 봤을 때 어떤 게 좋은지 모색하다 FBI와 유사한 형태인 국가수사청 신설을 구상하게 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그렇다면 검·경 수사권 조정문제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천 장관이 별도의 수사 기구를 모색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또한 FBI와 유사하다는 국가수사청은 과연 어떤 형태를 띠게 될까. 특히 ‘천정배 구상’이 현재 수사권을 갖고 있는 검찰과 경찰, 국정원 등 해당 수사기관의 조직 체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 있기에 향후 이들 기관의 반응도 주목된다.
지난해 6월 법무부 장관에 임명되기 전부터 천 장관은 한창 논란이 되고 있던 검·경 수사권 조정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왔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리고 장관에 취임하면서 미국 FBI와 유사한 형태의 국가수사청 신설을 구상하게 됐다는 게 앞서 언급한 여권 소식통의 전언이다.
실제로 천 장관의 핵심 측근은 ‘국가수사청’과 관련해 “아직은 초기 구상 단계로 현재 법무부에서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며 “구체적 명칭이나 기구의 성격은 정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미국은 각 주(州)가 자치권을 갖고 운영되는 연방제를 채택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나라의 현실과는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현재 법무부가 FBI와 유사한 수사기구 신설 방안을 마련하고 있기에 FBI 운영체계를 대략적으로나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FBI는 연방법 위반 사건을 수사하면서도 대통령 명령에 따른 특별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FBI는 사건의 현행범이나 준현행범을 체포하기만 한다. 다른 국가의 경찰처럼 경찰 권한을 행사하지 않으며, 검찰이 갖고 있는 기소권도 없는 게 특징이다. 다만 수사하거나 조사한 결과는 연방검찰 등 관계기관으로 보내진다. 그리고 거기서 기소 여부 등 법률상 처분이 결정되고 집행되는 시스템이다.
그런데 법무부가 FBI의 이 같은 시스템을 벤치마킹하고 있다는 얘기다. 다시 말해 천 장관은 검찰이나 경찰, 국정원 등이 집행하고 있는 수사권을 국가수사청으로 일원화하겠다는 복안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앞서의 소식통은 “향후 국가수사청이 신설되면 검찰 업무는 공소 제기와 유지 업무 등으로 한정될 것으로 보인다”면서 “경찰도 자치·행정 업무로 축소될 가능성이 높고, 국정원 역시 정보 기능을 강화하는 대신 내란·외환·반란죄와 군사기밀보호법·국가보안법 등 국가안보와 관련된 수사권이 국가수사청으로 모두 넘어가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마디로 검찰 등 각 수사기관의 조직 형태와 수사 시스템 전반을 ‘한꺼번에’ 바꿀 수 있는 ‘매머드급’ 개혁안인 셈이다.
그렇다면 아직 논란의 불씨가 살아있는 검·경 수사권 조정 문제는 한낱 소모적인 논쟁에 불과한 것일까. 현재 검찰과 경찰이 수사권 조정 문제로 옥신각신해도 향후 ‘천정배 구상’이 추진된다면 논쟁은 별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
우선 검·경 수사권 조정 문제의 현황을 보자. 지난해 12월5일 열린우리당 검·경 수사권조정기획단은 경찰의 수사권 독립을 인정하면서 “검사의 수사지휘를 받는 범죄를 내란, 외환죄, 기타 대통령령에 정하는 범죄로 제한하고 나머지 경우는 경찰이 독자적인 수사권을 갖는 것으로 했다”는 ‘최종안’을 발표했다. 여당이 사실상 경찰의 손을 들어준 셈이었다.
그러자 다음날(6일) 천 장관은 친정인 여당의 고위정책회의에 참석해 이 같은 기획단의 최종안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수사권 조정 문제는 정부 내 권한 분배의 문제다. 때문에 정부 내에서 조정하고 해결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바람직하다. 기획단 조정안이 너무 앞서 나갔다”며 “정부의 조정과정에서 검찰이 일정 부분 (수사권을) 양보할 용의가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당이 개입했다”고 강한 불만을 토로한 바 있다.
그런데 여당의 ‘최종안’ 발표보다 앞서 12월2일 가졌던 당·정·청 간 조율은 실패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당의 조성래 기획단장과 정부의 천 장관, 청와대의 문재인 민정수석 등이 수사권 조정 문제를 논의했으나 합의를 도출하지 못했다는 것. 그러면서 천 장관은 “법무부에서 안을 작성할 때까지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여당이 이를 무시하고서 ‘기습적으로’ 조정안을 발표했고 이것이 천 장관을 분노케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검찰도 여당 조정안에 강하게 반발했다. 정상명 검찰총장은 “절대로, 어떤 경우에도 (여당의 조정안을) 수용하지 않겠다”고 정면으로 거부했다. 이후 경찰과 사활을 건 신경전이 또다시 벌어졌다.
그러자 정부가 수습에 나섰다. 정부는 국무총리실 주관으로 검·경 수사권 조정 문제에 대한 최종안을 1월 말까지 마련하기로 했다. 그리고 오는 2월 임시국회에서 관련법을 처리키로 방침을 정했다.
그런데 정치권에선 2월 임시국회 처리가 힘들 것으로 보고 있다. 시위 농민 사망 사건으로 사임한 허준영 전 경찰청장의 후임으로 이택순 경기경찰청장이 내정됐다. 하지만 신임 경찰청장 내정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 일정조차 잡히지 않았다. 여기에 여당은 신임 당의장을 선출하는 2월18일 전당대회로 어수선한 분위기고, 한나라당은 사립학교법 개정을 반대하는 장외투쟁으로 한 달 이상 국회 등원을 거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인사청문회는 고사하고 2월 임시국회마저 제대로 열릴 수 있을지 미지수다.
따라서 정부가 1월 말까지 최종 조정안을 마련한다 하더라도 2월 임시국회가 불투명한 상황이어서 수사권 조정 문제 처리는 차질이 예상된다. 수사권 문제가 다시 표류할 수도 있는 이 같은 정치 상황은 ‘수사청 신설’이라는 ‘천정배 구상’이 대두될 여지를 넓혀주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천 장관이 구상하고 있는 국가 수사기구는 언제쯤 그 윤곽을 드러내게 될까. 또 수사권 조정 문제와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이에 대해 천 장관의 핵심 측근은 “국가 수사 기구 신설 방안은 중장기적인 과제”라고 말했다. 당장은 현재 직면한 검·경 수사권 조정 문제의 해결이 급선무라는 얘기다.
이 측근은 대략적인 방향과 관련, “(법무부는) 현재의 검·경 수사권 조정 문제의 해법을 찾는 게 우선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국가 수사체계의 바람직한 방향이 무엇인지 재검토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수사권 조정 해결책을 모색하면서 국가의 수사 체계를 바꿀 수 있는 장기 프로젝트도 병행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국가수사청에 대한 청사진이 머지않아 공론화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천 장관의 핵심측근은 “법무부가 구체적 방안을 마련하기 전에는 (국가수사청 신설을) 단정할 수 없다”면서도 “향후에 학계와 국민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국가수사청에 대한) 제안이 있을 수 있다”고 밝혔다.
현재로선 국가수사청이 신설될 것이라 단정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천 장관이 국가 수사체계에 대해 재검토하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가칭 국가수사청의 신설이고, 이에 대해 법무부가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일 향후 ‘천정배 구상’이 구체적으로 추진된다면 당면한 검·경 수사권 문제는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할 것으로 보인다. 국가수사청 신설은 우리나라 수사 체계에 일대 혁신을 몰고 올 ‘쓰나미급’ 위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김지영 기자 you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