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1일 열린우리당 지도부와의 만찬에서 와인을 마시는 노 대통령의 표정이 자못 심각하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여당이 이토록 노 대통령의 탈당 ‘압박’에 바짝 몸을 사리는 데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정부와 정책 협의를 하지 못하게 되면 집권여당의 의미가 사라지게 된다. 또한 정동영, 김근태 의원 등의 차기 주자들도 집권이 유력한 여당 대통령 후보로서의 상징성과 ‘파워’를 모두 잃어버리게 된다. 물론 정부로서도 여당의 강력한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면 정책 추진력이 현저하게 떨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노 대통령은 왜 당·정이 모두 망하는 길로 갈 수도 있는 자신의 탈당설을 이 시점에 또 흘린 것일까. 혹시 ‘자신의 팔을 잘라 상대의 목을 베려는’ 노무현식 역발상의 정치를 또 다시 감행하려는 것은 아닐까. ‘노무현 탈당 정국’의 이면을 따라가 봤다.
“대통령 탈당이 뭐 그렇게 중요하다고 또 저렇게 야단법석인가.”
혹자는 이렇게 푸념할지도 모른다. 노무현식 ‘배짱정치’에 짜증이 난다는 국민들도 많다. 하지만 이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대통령의 탈당은 민주주의의 근간인 정당정치의 뿌리를 송두리째 흔들 수도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는 게 정치학계의 중론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정치학 교수의 설명은 이렇다. “노무현 대통령이 탈당을 하게 된다면 예상보다 훨씬 심각한 부작용이 초래될 것이다. 정부가 구상하는 개혁 정책이 입법화가 되어야 하는데 여당이 없어지면 그 주체가 모호하게 돼 입법화가 굉장히 어렵게 된다. 더 심각한 것은 의회와 정부가 따로 가게 된다는 점이다. 민심의 발로인 의회의 견해가 정부 정책 결정에 반영되어야 하는데 양측이 따로 가게 된다. 정치학 용어로 그리드락(Gridlock·교착국면)이라고 하는데, 행정부와 입법부가 주요 정책법안에 합의할 수 없고 어느 쪽도 타협하려 하지 않을 때 의안이 꽉 물려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을 말한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당·정 협의도 하지 않는 상황에서 정부 정책에 굳이 동조할 이유가 뭐가 있나. 이런 점들은 국가 경쟁력과 민생에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이 교수는 또 “지금 노 대통령은 전 세계에 유례가 없는 희귀한 정치실험을 하고 있다. 사실 노태우 김영삼 전 대통령 등의 역대 정권은 임기 말에 탈당을 한 전력이 있지만 임기 중간에 이렇게 쉽게 탈당 운운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로 극심한 혼란만 초래할 것이다”라며 강한 어조로 탈당 발언을 비판했다.
물론 청와대는 ‘과거완료형’이라는 단어까지 동원하며 탈당은 이미 시효가 지난 이야기라고 주장한다. 지난해 대연정 제안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다가 얘기가 나온 것일 뿐이라는 해명이다. 그러나 여당 내에서조차 이 같은 해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분위기다. 오히려 시기를 알 수 없을 뿐 ‘대통령의 탈당’은 여전히 ‘물밑진행형’으로 여기고 있다.
그렇다면 학계도 여론도 여당마저도 우려를 금하지 못하는 ‘탈당 카드’를 노 대통령은 왜 들먹인 것일까. 여기에는 두 가지 해석이 나오고 있다. 먼저 유시민 입각 파동을 잠재우기 위한 노 대통령의 ‘고단수 진압 작전’이라는 해석이 있다.
열린정책연구원의 한 전략 관계자는 이에 대해 “대통령의 탈당 발언 의도는 단기적으론 당내 반발 제어를 위한 ‘엄포용’이지만 정치적 고비마다 정계개편을 겨냥하는 등 언제든지 써먹을 수 있는 카드로 이용할 것이다. 결코 이른 시간 내 탈당을 결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국정 지지도가 낮은 상황에서 여당과 손을 끊는 것은 후반기 국정운영을 더욱 어렵게 할 수 있는 정치적 자살행위다”라고 단언했다.
실제로 노 대통령은 11일 청와대 만찬에서 당·청 간 관계 개선을 위한 태스크포스(TF) 구성에 합의하는 등 결속 모습을 보여준 데다 2·18 전당대회나 5·31 지방 선거를 앞두고 지금 탈당해 얻는 것보단 잃는 것이 더 많을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탈당 카드를 쉽게 꺼내진 못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 간담회 참석자 상당수가 노 대통령의 탈당 발언의 심각성을 인정한 것을 보면 이런 해석이 그다지 명쾌해 보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먼저 대통령의 당시 발언을 들어보자.
노 대통령은 만찬 막바지에 “YS가 포항에서 ‘화형’당했고, DJ가 결국 탈당했다. 다 안다. 나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고부간 갈등 치유법을 참고할 필요 있다. 오늘 참모들이 얘기하지 말라고 했지만, 하겠다. 자식들도 데리고 아웅다웅 하느니, 내보내면 1주일 지나면 좋아진다. 떨어져 있는 것도 좋겠다. 갈등해소가 안 되면 아예 원수가 될 수 있다. 적절한 시기에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건강할 수 있다”고 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과의 이별’을 정국 해법의 하나로 여기고 있는 노심의 일단이 읽혀지는 대목이다.
정치권에서는 이번 탈당 발언 사태를 두고 ‘유시민 파동’에 대응하는 수준의 일차방정식이 아니라 노 대통령이 의도적으로 갈등을 조성해 정계개편 등의 고차방정식을 전개하려 한다는 해석이 더 유력하다.
▲ 지난 11일 청와대에서 만찬장으로 향하는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 지도부. 청와대사진기자단 | ||
그렇다면 노 대통령이 탈당을 전제로 그리고 있는 ‘그림’은 무엇일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예상 수순은 거국 내각 구성이다. 노 대통령이 탈당할 경우 내각 구성의 변화는 불가피하다.
열린우리당의 핵심 전략관계자 A씨는 이에 대해 “대통령이 탈당을 하면 이미 그 자체로 거국내각 아닌가. 당 출신 장관들도 위치가 애매해질 것이다. 대통령의 탈당은 새로운 인적 자원과 정치 기반을 요구하게 되기 때문에 초당적 거국 내각이나 중립 내각, 연정(연립내각) 등의 그림이 그려질 수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한나라당이 거부하고 있는 대연정이나 민주당 등과의 소연정은 실현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렇다고 관료와 전문가 등만으로 내각을 꾸릴 수도 없다. 결국 여야 각 정파의 정치인들이 입각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야당 정치인이 입각하게 될 경우 자연스러운 정계개편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앞서의 A씨는 이에 대해 “노 대통령이 ‘중립 총리’를 내세우고 ‘거국 내각’을 구성하게 되면 한나라당 내의 합리적 세력들 가운데서도 사실상 집권을 의미하는 거국내각 참여를 수용할 세력이 생길 것이다”라고 내다봤다.
이 외에 노 대통령이 그와 정치 이상을 같이 하는 소수의 세력을 중심으로 신당을 창당할 수도 있다는 관측도 있다. 일각에서는 노 대통령의 기간당원제에 대한 소신을 예로 들며 ‘제2의 개혁당 창당을 구상중에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유시민 의원을 보건복지부 장관에 입각시키는 것도 젊은 대통령이 퇴임 뒤 자신의 정치적 영역을 구축하기 위한 장기 포석이라는 해석이 여기에 등장한다. 자신이 계속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기간당원제를 매개로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 내정자 등의 열린우리당 내 친노 세력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치 결사체를 구성하는 방안이다.
이 같은 시나리오는 열린우리당의 분당과 정계개편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한나라당 맹형규 의원은 이와 관련해 “정동영 전 장관과 김근태 전 장관이 당에 복귀함과 동시에 그들은 ‘노 대통령 때리기’에 나설 것이고 정국 주도권을 뺏기지 않으려는 노 대통령이 그 과정에서 탈당과 동시에 그의 직계 세력이 출당 내지는 탈당을 서두를 것이다. 이는 곧 열린우리당의 분당으로 이어지고 노 대통령은 새로운 세력들을 중심으로 신당을 창당한 뒤 다른 당과의 공조를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고 밝힌 바 있다.
노 대통령 탈당 발언의 배경으로 개헌론을 들 수도 있다. 여권 핵심관계자는 “노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부터 개헌 일정을 제시했다. 개헌 공론화를 촉진하기 위해서라도 당적 이탈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개헌론은 앞서 살펴본 정계개편 시나리오와는 조금 다른 궤적을 그린다. 먼저 노 대통령이 탈당해 거국내각이 구성되고 이어 선거구제 개편 등의 논의를 거쳐 개헌을 한다는 시나리오다.
그런데 개헌론에 대해 이명박 서울시장의 이춘식 정책특보는 “차기 대권주자들의 정치권 이해관계가 첨예한 상황에서 대통령의 개헌론 추진이 동력을 얻을지 미지수”라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야당에서는 오히려 노 대통령이 개헌 자체보다는 선거구제 개편 쪽에 더 신경을 쓸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한나라당의 공성진 의원은 “선거구제 개편을 통해 노 대통령이 영남 출신 최측근들을 원내에 진입시켜 퇴임 후 영향력을 유지하려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현 소선거구제에서 이들의 원내 진출은 힘들다. 중대선거구제나 최소한 권역별 비례대표제라도 해야 영남권에서 그들의 지분 확보가 가능하고 노 대통령의 퇴임 후 정치적 위상도 그대로 유지될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고 밝혔다.
정치학계의 한 학자는 최근 노 대통령의 탈당 사태를 레임덕 방지를 위한 ‘방책’으로도 보고 있다. 그는 “노 대통령이 열린우리당을 만든 뒤 당·정분리를 실험하고 있는 점은 인정한다. 이를 통해 공천에 개입하지 않고, 운영자금도 지원하지 않고, 당 대표나 사무총장의 인사에도 전혀 관여하지 않는 등 개혁적인 정책을 잘 실천했다. 하지만 그렇게 ‘3불 정책’을 쓰다 보니 당에 대한 지배력은 현저히 약화되었다. 그래서 여당의 주요 대권주자들을 정부로 데려와 묶어두었기 때문에 그나마 당을 제대로 통제할 수도 있었다고 본다. 하지만 대권주자들이 당으로 복귀하고 당에 대한 지배력도 현저히 떨어지는 상황에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여당과의 고리를 끊고 레임덕에 대비한 새로운 전략을 짜고 있다고 본다”고 밝혔다.
만약 노 대통령이 탈당을 감행하게 된다면 그 시점은 언제가 될까. 먼저 오는 5월 지방선거와 2007년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 탈당할 가능성이 있다. 두 선거를 통해 당과 대권주자측에서 대통령의 낮은 지지도를 본격적으로 문제 삼고 대통령도 ‘새판 짜기’ 등 정계개편 차원에서 적극 고려하는 등 탈당 환경이 조성될 수 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의 성향상 지방선거 이전에라도 감행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노 대통령이 11일 탈당과 관련해 “전당대회와 지방선거가 있으니, 일단 두고 보겠다”고 말한 것은 상황에 따라 ‘앞서 결행할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으로 풀이된다.
노 대통령은 지난해 7월부터 지금까지 다섯 차례나 탈당을 언급한 것으로 전해진다. 과연 언제쯤 그 소모적 논쟁에 종지부를 찍게 될지 관심이 모아진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