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0년 평양에 간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다. | ||
DJ는 오는 4월 대통령 전용열차인 ‘경복호’를 타고 북한을 방문할 예정이다. 하지만 DJ의 방북 열차에 그의 ‘순수한’ 열정만 실리는 게 아니다. 일단 그의 방북은 답방을 주저하고 있는 김 위원장에게 ‘유도체’의 역할을 할 전망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지율 하락에 고민하고 있는 열린우리당에게 5·31 지방선거의 한줄기 서광이 될 수 있다. 그동안 X파일 사건 등으로 소원했던 DJ와의 관계 회복을 통해 호남 민심을 얻을 수 있고 이는 지방선거 승리의 또 다른 동력으로 삼을 전망이다.
하지만 한나라당은 벌써부터 지방선거의 이슈가 노무현 정권 중간평가에서 남북통일이라는 ‘엉뚱한’ 쪽으로 튈 것을 우려하고 있다. 보수단체에서는 노 정권이 북측과 ‘낮은 단계로의 연방제 합의’를 할 가능성이 있다며 DJ의 방북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DJ 방북, 그 철길의 뒤안길을 따라가 보았다.
지난해 9월 말경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설’로 정치권이 크게 술렁거린 적이 있었다. 11월 하순 부산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김 위원장이 전격 참석한 뒤 노무현 대통령과 남북정상회담을 할 예정이라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해 6월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김정일 위원장과 전격적인 만남을 가진 뒤부터 대북 특사와 6자 회담 타결 등으로 남북관계가 급속도로 호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 위원장은 부산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고 그의 답방도 흐지부지되는 듯했다.
그런데 당시 청와대 한 고위 관계자는 김 위원장의 ‘불방’을 이미 예견한 듯 그 뒤의 정국 추이에 대해 의미심장한 발언을 한 적이 있었다. 이 관계자는 그때 “11월 6자 회담이 잘 되면 남북정상회담은 빠를수록 좋다고 본다. 하지만 김 위원장 방문은 6자 회담과 APEC 일정상 맞지 않는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 관계자는 김 위원장의 ‘11월 부산 방문’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그의 예상이 들어맞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관계자의 말 가운데 의미심장한 부분은 ‘내년에 남북정상회담이 당권정치나 대권정치를 누르는 비교우위 이슈가 될 수 있다고 보는 건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했다는 대목이다.
이 청와대 관계자의 말을 통해 보면 여권에서는 이미 지난해 9월 말경부터 김정일 답방을 비롯한 남북관계 이슈를 2006년 지방선거 전후의 주요 정책 이슈로 준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청와대는 올해 열린우리당 전당대회를 기점으로 차기 주자들의 당권·대권정치가 정국을 주도할 경우 노무현 대통령은 뒷전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다고 보고 있다. 그런 ‘불행한’ 사태를 최대한 늦추고 대통령 중심의 정치를 계속 견지해나가기 위해 김정일 위원장 답방과 남북정상회담 등의 남북관계 이슈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4월 방북은 남북관계가 올해 노무현 정권의 주요한 정책적 이슈가 될 것임을 암시하는 바로미터가 되고 있다. 노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DJ에게 전화를 걸어 “건강이 허락되면 이전부터 얘기가 있었던 만큼 북한을 한번 다녀오시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는 등 DJ의 방북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 왔던 것도 그런 사실을 뒷받침한다.
DJ의 4월 방북 플랜은 노 정권과 DJ 양측 모두에게 정치적 이득을 안겨줄 수 있는 교집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먼저 DJ는 이번 방북을 통해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을 성사시키게 되면 50년간 이어진 냉전으로 쌓인 상호불신과 적대관계를 청산해 새로운 남북관계를 개척한 선구자로 평가받을 수 있다.
DJ 방북은 여권에게도 달콤한 열매를 줄 것이다. 먼저 5·31 지방선거에 호재로 작용할 것이라는 게 일반적 평가다. 북측이 DJ의 열차방북을 수용할 경우 DJ와 김정일 위원장은 지난 2000년 6월 평양 순안공항에서의 역사적인 만남에 버금가는 뚜렷한 메시지를 국민들에게 던져줄 것이다. 지방선거를 목전에 둔 시점에서 전 국민의 눈과 귀가 DJ의 방북으로 쏠릴 경우 그 ‘여운’이 5·31 지방선거에서 여당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분석이 현재로선 우세하다.
더욱이 호남에서는 DJ의 방북이 일거에 표를 집결시킬 수 있는 태풍이 될 가능성도 있다. 또한 대북 포용정책을 지지하는 세력을 묶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여권의 기획통인 민병두 열린우리당 의원은 이에 대해 “DJ 방북이 수도권의 호남 표 결집에도 도움을 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민 의원은 또한 “DJ와 열린우리당의 관계가 좋다는 인상을 줄 때 호남에서의 당 지지도가 올라가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한나라당은 DJ 방북의 파급력에 상당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이재오 원내대표는 최근 “열린우리당이 DJ 방북에서 얻어진 성과를 국내용으로 다시 만들어 정국 반전을 시도할 것으로 보인다. 현 정부의 대북 정책에 불필요한 색깔론을 제기하진 않겠지만 남북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데는 분명히 반대한다”며 미리 방어막을 치고 나섰다.
이정현 부대변인 또한 “지방선거의 주요 이슈가 노무현 정권의 실정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북풍 분위기로 몰고 가게 되면 선거가 굉장히 어려워질 것이다. 그렇다고 마땅한 대책도 없다. 남북관계를 정략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는 경고 외에 할 일이 있겠느냐”며 난감한 표정이다.
민주당은 DJ 방북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매우 조심스런 입장이다. 유종필 대변인은 “(DJ 방북을) 이용하려 하더라도 요즘 국민이 현명해서 그런 냄새를 금방 맡아버린다. 자칫하면 역작용이 일어날 수 있다”며 사견임을 전제로 “(DJ 방북이) 지방선거가 끝나고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조갑제 <월간조선> 기자도 “굳이 기차를 타고 가겠다든지 4월에 가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5월 지방자치단체장선거에서 노무현 정권을 도와주겠다는 뜻”이라며 야당의 입장에 동조하고 있다.
DJ의 방북을 더 나아가 정계개편의 ‘출발역’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지방선거 뒤 필연적으로 개헌론이 정치권의 핵심 이슈로 등장하게 될 것이다. 이때 여권 일각에서 대통령 4년 중임제와 함께 남북 관계의 변화상을 담자는 주장도 제기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이 최근 ‘헌법상의 영토조항을 변화된 남북관계에 맞춰 개정하자’고 주장한 점을 유의미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DJ가 방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여권이 그 도움으로 지방선거에서 상당한 약진을 한다면 정계개편을 촉발할 수 있는 촉매가 될 수도 있다. 이때는 남북관계 개선에 전향적인 한나라당의 일부 인사를 비롯해 장외에 있는 고건 전 총리 지지세력까지도 아우를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합종연횡이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DJ는 정치권의 이러한 ‘호들갑’에 “일일이 대꾸할 필요가 있겠느냐”며 대응을 자제하고 있다. 청와대도 마찬가지 반응이다. 최근 국회 장관 인사청문회에서 한나라당 박계동 의원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철도 방북이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을 전제로 한 것이라는 얘기가 있다. 6월 답방설도 나온다’고 질문한 것에 대해 이종석 내정자는 “전혀 그런 계획을 갖고 있지 않으며 김 전 대통령 쪽과 대화 나눈 것도 없다”고 부인한 바 있다.
그런데 정치권 일각에서는 DJ가 대통령 전용열차인 ‘경복호’를 타고 방북하는 것에 대해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한완상 적십자사 총재는 “DJ가 단순히 ‘평양을 방문하고 싶다’가 아니라 ‘기차를 통해 방북하고 싶다’고 한 점을 주목해야 한다. 결국 내가 가는 철로가 안전하니까 이 길을 통해 (김 위원장이) 답방하면 된다는 뜻일 것”이라며 “김 위원장의 답방을 쉽게 성사시킬 수 있는 방안을 몸소 보여주려는 의미로 본다”고 풀이한 바 있다. 최근의 중국 방문에서 알 수 있듯이 김 위원장은 국외로 나갈 경우 하늘길보다는 땅길을, 그것도 자신의 전용열차가 달릴 수 있는 철길을 선호해왔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의 전략통인 한 의원은 “김 위원장이 DJ의 방북 열차에 담긴 ‘속뜻’을 읽고 전격 답방을 하게 된다면 이는 지방선거뿐 아니라 차기 대선까지도 연결될 수 있는 메가톤급 파괴력을 지닐 것이다. 대선 판도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하지만 보수단체 일각에서는 DJ 방북에 대해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대령연합회 사무총장이자 대변인인 양영태 박사는 DJ의 방북을 여권의 2007년 재집권 전략의 일환으로 보고 있다.
그는 “이번 북한방문을 노구를 무릅쓰고, 기를 쓰며 가려고 기획했던 것도 일차적인 방북목적이 2007 대선을 겨냥한 ‘신북풍 공작’을 위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틀림없이 2007년 연방제를 제기하며 국민들로 하여금 ‘통일’과 ‘분단’ 중에서 양자택일하라는 강요된 선택을 시도하면서 ‘신북풍’에 의존하여 재집권을 도모하려는 정치작전을 전개할 것이 예상된다”고 주장한다.
안보전략연구소장 홍관희 박사도 “DJ가 지난해 ‘남쪽의 연합제와 북쪽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통합해 통일의 제1단계로 들어가야 한다’고 언급한 것 등을 보면 현 정권이 북측과 낮은 단계로의 연방제를 추진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으로 DJ가 방북하지 않느냐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한나라당 이계진 대변인도 “DJ가 2000년 6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만나 남측의 ‘남북연합’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공통성이 있으며 통일을 이 방향에서 지향하기로 합의한 만큼 두 사람이 다시 만나면 이 문제를 재론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는 또한 “DJ 방북의 진의는 모르겠지만 ‘낮은 연방제’를 공론화하고 정국을 통일세력 대 반 통일세력의 구도로 만들려는 게 아닌가 하는 가설이 있다”고 말했다.
DJ는 80세 노구를 이끌고 열차 방북에 나선다. 그가 타고 갈 ‘경복호’가 통일의 첫 장을 여는 ‘희망호’일까, 아니면 고장 난 ‘열린우리호’를 견인할 ‘구조차’일까.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