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표와 안철수 의원이 총선 ‘출마’와 ‘불출마’를 두고 어느 쪽이 선거전략에 유리한지 고심을 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30일 김근태 전 상임고문의 4주기 추모행사에서 만나 대화를 나눈 뒤 뒤돌아서는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주도권을 잡은 쪽은 문재인 대표다. ‘김종인 선대위’ 카드를 꺼내 든 문 대표는 지난 19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신년 기자회견에서 백의종군을 전격 선언했다. 친노(친노무현)계 2선 후퇴가 아닌 ‘사퇴’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지난해 2·8 전국대의원대회에서 당 대표에 선출된 지 345일 만이다.
특히 그는 이 자리에서 대표직 사퇴 및 모든 권한을 선대위에 넘기는 ‘원샷’ 전권 이양을 천명했다. 그러면서 문 대표는 “지역구 의원이든 비례대표 의원이든 출마하지 않겠다고 불출마 선언을 해둔 상황”이라며 “그 생각에는 변화가 없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우리 당의 총선 승리를 위해 도울 것”이라고 밝혔다. 대표직 사퇴 등의 배수진을 통해 총선에 ‘올인’하겠다는 전략으로 분석된다.
충격파는 컸다. 당무 거부에 돌입했던 이종걸 원내대표는 문 대표 입장표명 하루 뒤인 20일 복귀했다. ‘문재인 사퇴’를 요구하며 보이콧을 선언한 지 44일 만이다. 추가 탈당을 예고했던 김영록 이개호 박혜자 이윤석 의원 등의 집단행동 기류도 멈칫했다. 당의 원심력이 소강 국면으로 접어든 셈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야권 통합과 연대를 위한 ‘짝짓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1차 대상자는 국민회의(가칭) 창당을 준비하는 천정배 무소속 의원이다. 애초 문 대표는 천 의원에게 호남 몫 선대위원장을 제안했다. ‘김종인·천정배 투톱 체제’를 통해 경제민주화와 호남을 동시에 잡으려는 포석이었다. 하지만 김종인 선대위원장이 “단독 선대위원장이라고 들었다”며 원톱에 방점을 찍자, 문 대표는 한 발 물러섰다.
천 의원을 더민주 선대위의 한 축으로 하려는 1차 목표는 수포로 돌아갔지만, 문 대표는 ‘천정배 끌어안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문 대표는 천 의원에게는 ‘통합’, 정의당에는 ‘연대’를 각각 제안했다. 안철수 신당인 국민의당을 향해서도 “통합·연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압박했다.
이에 천 의원은 △비전과 가치 △반 패권주의 △승리와 희망의 연대 등의 세 가지 조건을 고리로 당 해체 수준의 변화를 요구했다. 심상정 정의당 상임대표는 단순한 정치공학적인 야권연대를 넘어 ‘정권교체를 위한 공동정부’ 구성을 위한 범야권 협의체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문재인 사퇴’가 범야권 통합·연대 논의의 물꼬를 튼 셈이다.
하지만 난제는 산적해 있다. 일단 ‘문재인·심상정·천정배’로 이어지는 삼각 동맹이 현실화될지 미지수다. 독자적 신당 창당 작업에 경고등이 켜진 천 의원은 문 대표가 통합 제안을 한 날 저녁 서울 메리어트호텔에서 국민의당을 창당 중인 안철수 김한길 의원과 비공개 회동을 가졌다. 주요 의제는 야권 통합. 양측 관계자의 말을 종합하면, 국민의당과 국민회의가 창당을 마무리한 뒤 ‘당 대 당’ 통합을 하는 A안과 창당 과정에서 결합하는 ‘준정당 통합’을 골자로 하는 B안이 구체적으로 논의된 것으로 알려졌다.
천 의원이 문 대표와 손을 잡는다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 바로 ‘공천권 지분’이다. ‘친노 패권주의’에 반발해 탈당한 천 의원이 복당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문 대표와 손잡기 위해선 ‘당 대 당’ 통합밖에 없다. 이 경우 당권 지분과 공천권에 대한 합의 내지 이면계약 없이는 통합할 수 없는 현실적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앞서 2014년 3월 통합한 새정치민주연합의 두 축인 민주당과 새정치연합은 당 구성 등을 ‘5 대 5’로 합의한 바 있다.
더민주 범주류 한 관계자는 “천 의원은 결국 우리 쪽으로 올 것”이라며 “지금 갈 데가 없는 상황이 아니냐”라고 반문했다. 하지만 더민주의 공천권은 사실상 원톱 선대위인 김종인 위원장에게 넘어간 상황이다. 더민주 복귀와 안철수 신당 합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천 의원 측은 “아무것도 결정된 것은 없다”며 ‘꽃놀이패’ 게임에 들어갔다.
정의당과의 연대도 문제다. 심 대표가 제안한 범야권 협의체 구성의 방점은 경선이 아닌 ‘정치적 협상을 통한 공천 조정’이다. 2012년 한명숙 체제가 했던 ‘경선+소수당 배려’ 모델의 진화를 원하는 셈이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경선은 최소화·소수당 배려는 최대화’ 전략이다. 4년 전 공천 반발에 시달리던 ‘한명숙 체제’는 당시 통합진보당과의 연대 과정에서 소수당에 지역 배려 원칙을 지키려다가 당이 내홍에 휩싸였다.
이번 야권 통합 과정에서도 더민주와 정의당, 천정배 신당 간의 지분 나누기가 고차방정식으로 격상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다만 역설적으로 문 대표는 주요 변곡점마다 ‘총선 불출마’라는 배수진으로 이들을 압박할 수 있다. 핵심은 기득권 내려놓기다. 이른바 ‘맏형 리더십’을 앞세워 문재인식 범야권 통합·연대 모델을 만든 뒤 총선 승리의 발판을 마련하겠다는 전략적 셈법이 깔렸다. 총선 승리는 곧 대권 직행과 맞물려 있다.
당 내부 의견은 갈렸다. 범친노계 관계자는 “전략적으로 고려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 대표가 지난해 2·8 전대에서 밝혔던 세 번(당대표직·혁신·총선승리)의 죽을 고비 중 당 혁신에서 좌절해 중도 하차한 만큼, 총선 승리를 통해 미완성된 두 번째 고비를 동시에 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명분(당에 대한 무한책임)과 실리(총선 승리를 통한 대권 직행)를 거머쥘 수 있는 일거양득 전략이다. 일각에선 ‘비례대표 후순위’라는 배수진으로 전국 지원유세를 해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책임정치의 실현은 물론 사실상의 사전 대선운동을 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카드다.
불출마 카드는 안철수 의원에게도 유효하다. 국민의당 창당에 나선 안 의원도 독자노선의 궤도 수정이 불가피한 상황에 직면한다면, 불출마 선언을 꼬인 정국을 푸는 반전 카드로 사용할 수 있다. 창당 상황은 좋지 않다. 인재영입은 지지부진하고, 한상진 공동 창당준비위원장의 ‘이승만 국부’ 발언은 당 정체성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길거리 서명운동을 놓고도 당 내부에서 엇박자가 났다.
김한길계인 전략가 최재천 무소속 의원은 안 의원과의 통합 각론을 둘러싼 이견으로 합류를 미루고 있다. 최 의원은 “안 의원과 야권통합에 대한 의견차가 있었다”고 말했다. 국민의당 내 안철수그룹과 김한길그룹의 갈등이 원인이란 말도 나온다. 국민의당에 합류한 한 현역 의원 측은 “이태규 라인에서 최 의원의 합류를 막고 있는 것 같다”라고 귀띔했다. 안철수 측 실세인 이태규 라인과 더민주 탈당파 간 갈등이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안철수 신당이 총체적 난국에 빠졌다는 우려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그러자 당 안팎에선 안 의원의 거취와 관련해 △지역구 변경 출마 △비례대표 △총선 불출마 등의 다양한 시나리오가 나오고 있다. 지역구 변경 출마의 경우 ‘험지’를 넘어 ‘사지’로 갈 가능성이 크다. 일각에선 부산 출마설을 제기하지만,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게 중론이다. 안 의원이 부산에서 야권 깃발을 꽂는 데 성공하더라도 ‘영남 패권주의 논란’이란 거대한 벽을 넘어야 한다. 국민의당 내부에 ‘호남 자민련 대 영남 패권주의’ 구도를 만들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비례대표로 나갈 경우 ‘안철수 간판’을 앞세워 전국 유세지원을 할 수 있다. 사실상 당선 가능성이 없는 후순위 배치를 자처하면서 기득권 포기 명분을 잡을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총선 불출마의 파급력은 앞의 두 가지를 뛰어넘는다. 안 의원이 총선 불출마를 택한다면, 노회찬 전 의원은 경남 창원 대신 서울 노원병에 출마할 것으로 보인다. 안철수의 희생으로 정의당과 국민의당이 선도 연대를 꾀할 수도 있다. ‘반 박근혜’ 연대 과정에서 안 의원이 범야권의 주도 세력으로 부상할 수 있다는 얘기다. 안 의원도 측근들과 더민주 탈당파들에게 “당의 어떤 요구도 받아들일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혁신은 없고 호남 탈당파만 있다고 비판받는 안 의원에게 총선 불출마는 사당화 논란의 불식은 물론, 지도체제 및 구심력 확보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카드다. 문제는 타이밍을 통한 선점효과다. 야권 발 정계개편 과정에서 타이밍 정치로 핑퐁게임을 했던 문·안의 본게임의 막이 올랐다. 이기는 쪽은 차기 대권의 급행열차를 타고 지는 쪽은 정치적 치명상을 입는다.
윤지상 언론인